가을 밤 / 방정환 착한 아가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혼자 앉아 꿰메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기러기 떼 날아간 뒤 잠든 하늘에 둥근 달님 혼자 떠서 젖은 얼굴로 비치어도 비치어도 밤은 안 깊어. 지나가던 소낙비가 적신 하늘에 집을 잃은 부엉이가 혼자 앉아서 부엉부엉 울으니까 밤이 깊었네.
청 명 /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 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어진 ..
嘉實[가실] / 이광수 一[일] 때는 김 유신이 한창 들날리던 신라 말이다. 가을 볕이 째듯이 비치인 마 당에는 벼 낟가리, 콩 낟가리, 모밀 낟가리들이 우뚝우뚝 섰다. 마당 한쪽 에는 겨우내 때일 통나무더미가 있다. 그 나무더미 밑에 어떤 열 예닐곱살 된 어여쁘고도 튼튼한 처녀가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남쪽 한길을 바라보고 울고 있다. 이때에 어떤 젊은 농군 하나이 큰 도끼를 메고 마당으로 들어오 다가, 처녀가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우뚝 서며, 『아기, 왜 울어요?』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처녀는 깜짝 놀라는 듯이 한길을 바라보던 눈물 고인 눈으로 그 젊은 농군을 쳐다보고 가만히 일어나며, 『나라에서 아버지를 부르신대요.』 하고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우는 양을 감추려는 듯이 외면을 하고 돌아..
황홀한 달빛 / 김영랑 황홀한 달빛 바다는 은(銀)장 천지는 꿈인 양 이리 고요하다 부르면 내려올 듯 정든 달은 맑고 은은한 노래 울려날 듯 저 은장 위에 떨어진단들 달이야 설마 깨어질라고 떨어져 보라 저 달 어서 떨어져라 그 혼란스럼 아름다운 천둥 지둥 호젓한 삼경 산 위에 홀히 꿈꾸는 바다 깨울 수 없다
春 心[춘 심] / 김영랑 ──南方春信[남방춘신] · 3 이 고삿 저 골목에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유창하다. 정초 나들이에 길거 리서 잠깐 만나 인사하는 소리만도 아니다. 웬 음성을 그리 높이 낼 리도 만무하다. 음향이 봄기운을 타는 것이다. 휭휭 울려난다. 어린애들은 벌써 츰내(호도기)를 만들기로 댓가지를 부러뜨린다. 더 일찍 아는 것 같다. 뒷 언덕에 산소나 물그대로 의자(倚子)를 만들고 흥청거리면서 늬나늬 늬나누 ── 를 분다. ‘어 ─ 허참’ , ‘잉 ─ 이’ 하는 소리가 윳댁(宅)에서 들 려 나온다. 사이좋은 고부(姑婦)간의 살림 수작이 그러하다. 전라도서도 이곳 말이란 것이 처음 듣는 이는 아직 말이 덜 되었다고 웃 고, 자주 듣는 이는 간지러워 못 듣겠다고 얼굴에 손까지 가리운다. 시인 C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