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짓 / 김영랑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양 묵은 壁紙[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 쯤 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묵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風景[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民聲[민성]》 5권 8호)
朴龍喆[박용철]과 나 / 김영랑 朴龍喆[박용철] 全集[전집] 1권 後記[후기] 용철(龍喆)이, 용철이 다정한 이름이다. 스무 해를 두고 내 입에서 그만큼 많이 불려진 이름도 둘을 더 꼽아 셀 수 없을 것 같다. 20년 후 처음으로 벗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여 나는 여태껏 가장 허물없 고 다정하고 친근하고 미더운 이름으로 용철(龍喆)이, 용철이, 불러 온 것 이다. 아! 그가 영영 가 버리고 만 오늘 나는 그대로 그 이름을 자꾸 불러 보아 오히려 더 친근하고 다정하여 혓바닥에 이상한 미각(味覺)까지 생겨나는 것 을 깨닫나니 아마 내 평생을 두고도 그러 아니치 못하리로다. 용철이, 용철 이, 서로 이역(異域) 하늘 밑에 서툰 옷들을 입고 손을 잡아 아는 체하던 바로 그때부터 가장 가깝고 ..
바람 따라 가지오고 / 김영랑 바람 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셈 소리없던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듯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듯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어라 나는 그윽이 저 창공의 은하만년을 헤아려 보노니
바다로 가자 / 김영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제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구나 큰 바다로 가자구나 우리는 바다없이 살았지야 숨 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퉁겨나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거꾸러져 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제주야 가고오고 독목선(獨木船) 왜섬이사 갔다왔지 허나 그게 바달러냐 건너 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3년 걸려도 큰 배를 짓잤구나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 배 타고 떠나가자구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
물 보면 흐르고 / 김영랑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스런 눈물에 안껴 흩은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드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들어 가건만 그 밤을 홀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文學[문학]이 副業[부업]이라던 朴龍喆兄[박용철형] / 김영랑 ⎯ 故人新情[고인신정] 영영 가 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질 것 없으매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 영겁(億萬永劫)이 아득할 뿐. 용철(龍喆) 형! 가신 지 이미 10년도 넘었으니 형은 이제 참으로 옛사람이 되었구료. 10년도 이만저만 아니지요. 인류사(人類史) 있은 뒤 처음 무서운 전쟁의 수행(遂行), 과학의 승리, 역사(歷史)의 창조, 그리하여 민족의 해방, 동혈(同血)의 상극(相剋)이 모두 그 양(量)으로나 질로나 어느 전세(前 世)에도 볼 수 없는 최선 극악(最善 極惡)의 10년이고 보니 이렇게 형을 불러 보는 내 심정 천감만래(千感萬來)에 숨이 막히고 마나이다. 내 죽음에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는 이즈음 근대(近代)의 일편(..
겨레의 새해 / 김영랑 해는 저물 적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일을 잊음의 큰 바다로 흘려 보내지만 우리는 새해를 오직 보람으로 다시 맞이한다 멀리 사천 이백 팔십 일년 흰뫼에 흰눈이 쌓인 그대로 겨레는 한결같이 늘고 커지도다 일어나고 없어지고 온갖 살림은 구태여 캐내어 따질 것 없이 긴긴 반만년 통틀어 오롯했다 사십 년 치욕은 한바탕 험한 꿈 사년 쓰린 생각 아즉도 눈물이 돼 이 아침 이 가슴 정말 뻐근하거니 나라가 처음 만방평화의 큰기둥 되고 백성이 인류 위해 큰일을 맡음이라 긴 반만년 합쳐서 한 해로다 새해 처음맞는 겨레의 새해 미진한 대업 이루리라 거칠것없이 닫는 새해 이 첫날 겨레는 손 맞잡고 노래한다
망각 / 김영랑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 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웬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 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달리는 행상(行喪)을 보랐고 있느니 내 가 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메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 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