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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야류(水營野遊) 제 3 과장 : 할미·영감 ― 할미·영감·제대각시의 장 ― (초라한 옷차림에 죽장을 짚고 피로한 기색이 보이는 할미가 등장하여 털썩 주저앉는다. 할미는 면경 파편을 앞에 놓고 노끈으로 털을 밀며 화장한 연후에 일어난다.) 할미 : 영감이여- 영감이여 - (창)(영감이 뒤따라 등장하는데 오광대의 가면 중 셋째 양반이나 넷째 양반의 것을 사용한다.) 영감 : 할마닌가 ― 할마닌가 ―. (창) (서로 영감, 할미를 호창(互唱)하면서 장내를 빙빙 돌다가 할미는 영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할미 : (창조로) 영감, 애얼레 망건(網巾) 쥐꼬리 당줄 대모 관자(玳瑁貫子) 호박 풍잠(琥珀風簪) 통영(統營) 갓은 어데 두고 파립 파관(破笠破冠)이 웬일이오. 영감 : (창조로)그것도 내 팔자라..
사자춤 사자의 탈을 쓰고 추는 춤. 삼국시대에 서역(西域)으로부터 들어와 연행되었다. 진흥왕 때 우륵(于勒)의 12곡 중에 〈사자기 獅子伎〉의 이름이 나오고,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 중 산예(壟猊)는 바로 사자무에 대하여 읊은 시이다. 그리고 1893년(고종 30)에 간행된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에 그 무보(舞譜)가 전한다. 윤용구(尹用求)의 ≪국연정재창사초록 國博呈才唱詞抄錄≫에 의하면, 사자무는 본래 성천지방의 잡극이었는데, 1887년에 궁중에 들여왔다고 전한다. 사자춤은 〈영산회상 靈山會相〉에 맞추어, 청사자(靑獅子)·황사자(黃獅子)가 요신족도(搖身足蹈)하여 앞으로 나아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선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 탁지(啄地)·관목(癸目)·휘미(揮尾)..
봉산(鳳山) 탈춤 제 1과장 : 사상좌춤(四上佐舞) 상좌 넷이 사방신(四方神)에게 배례하는, 놀이를 시작하는 의식무(儀式舞) 장면이다. 흰 장삼에 붉은 가시를 메고 고깔을 쓴 상좌를 목(먹)중이 하나씩 업고 달음질하여 등장, 타령곡에 맞추어 장내를 한 바퀴 돌고 새면(樂士度) 앞에 내려 놓는다. 같은 방법으로 둘째, 셋째, 넷쩨 상좌를 등장시키고 퇴장한다. 상좌들 일렬로 서서 잽이(樂士)들이 연주하는 느린 영산회상(靈山會相)곡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도도리 곡을 바뀌면 두 사람씩 동서로 갈리어 서서 대무(大舞)한다. 다시 타령곡이 나오면 목중 하나가 등장하여 쓰러진다. 상좌들은 계속 춤추면서 퇴장한다. 제 2과장 : 팔목중춤(八目僧舞) 제 1경 : 목중춤 첫째 목중이 한삼이 달린 붉은 원동..
봉산탈춤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연대 : 미상(조선 후기로 추정) 형식 : 가면극, 민속극, 구비 희곡 탈춤(대본), 전통극 성격 : 평민적, 해학적, 풍자적, 탈중세적, 근대지향적 문체 : 대화체, 구어체 전승지역 : 황해도 봉산 배경 : 시간적 배경으로는 조선 후기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이고, 사회적 배경으로는 봉건질서가 해체될 무렵으로 신분 질서 와해기이며, 공간적 배경으로는 황해도 봉산 지방임. 공연 주체 : 상인들과 이속 또는 중인 계급 표현 : 서민적인 비속어와 양반투의 한자어나 한시구를 동시에 구사하여 언어의 양면성, 대담성, 솔직성 등이 나타나 있고, 말의 성찬으로 인한 자유분방한 열거와 대구, 인용, 반어, 언어 유희, 익살, 과장 등이 풍부해 고도의 풍자성이 있음. ..
만석중놀이 경기도 개성지방에서 연희되던 무언인형극. 음력 4월 8일에 행해졌던 놀이로 망석(忘釋)중놀이·망석(亡釋)중놀이·만석승무(曼碩僧舞)·만석(萬石)중놀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했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비용을 만석이나 받아먹어 그 탐심을 욕하기 위해 연희했다고도 한다. 이를 통하여 명칭의 유래와 아울러 불도(佛道)를 망쳤거나 잊은 승려를 우롱하여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행해지는데, 개성사람들에게는 초파일이 특별히 중요시되어 이날부터 겨울옷을 봄옷으로 갈아입고, 일손을 놓고 특별한 음식을 풍성히 장만..
동래야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음. 〔개 요〕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는 〈수영야류 水營野遊〉를 보고 시작한 것으로 18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937년 중일전쟁이 난 해까지 연희되다가 중단되었다. 그 뒤 재연되어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놀음은 세시민속놀이로 연희되었다. 연희시기는 음력 정월보름에 행해지는데, 준비과정은 야류 탈놀음 계원(契員)들이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동네 각 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여 비용을 마련한다. 음력 정월보름날 동부·서부간의 줄다리기가 끝난 이튿날 밤에 동래 중앙통 광장 패문리(牌門里)에 무대를 가설해놓고 놀았다. 무대는 목재를 사용하여 관중보다 약간 높게 만들고 관중은 삼면에서 볼 수 있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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