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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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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춤

사자의 탈을 쓰고 추는 춤. 삼국시대에 서역(西域)으로부터 들어와 연행되었다. 진흥왕 때 우륵(于勒)의 12곡 중에 〈사자기 獅子伎〉의 이름이 나오고,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 중 산예(壟猊)는 바로 사자무에 대하여 읊은 시이다.

그리고 1893년(고종 30)에 간행된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에 그 무보(舞譜)가 전한다. 윤용구(尹用求)의 ≪국연정재창사초록 國博呈才唱詞抄錄≫에 의하면, 사자무는 본래 성천지방의 잡극이었는데, 1887년에 궁중에 들여왔다고 전한다.

사자춤은 〈영산회상 靈山會相〉에 맞추어, 청사자(靑獅子)·황사자(黃獅子)가 요신족도(搖身足蹈)하여 앞으로 나아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선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 탁지(啄地)·관목(癸目)·휘미(揮尾)·개구고치(開口鼓齒) 등 사자의 여러가지 동작을 흉내내며 추는 춤이다. 현재 함경북도 북청지방의 〈북청사자놀음〉과 황해도 〈봉산탈춤〉 속에 사자춤이 들어 있다. ≪참고문헌≫ 呈才舞圖笏記, 國博呈才唱詞抄錄, 韓國傳統舞踊硏究(張師勛, 一志社, 197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자놀음(獅子 ──)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큰 마을에서 벽사진경(邪進慶)을 목적으로 놀았던 민속놀이.

나무·종이·대광주리·천 등으로 사자의 형상을 한 사자탈을 만들어 놀이꾼이 뒤집어 쓰고 풍물패와 함께 어울려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노는 탈놀음이다. 이는 각 가정과 마을에 대한 벽사의 뜻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집주인으로부터 사례로 받은 돈과 곡식 등은 마을 공공사업과 사자놀음의 비용 등에 충당되어 마을민의 공동체의식을 결속시키는 데 한몫을 한 세시풍속이었다.

사자놀음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 사자춤만 따로 놀기도 하고 탈놀이 속에 한 과장으로 어울려 놀기도 하는데, 그중 북청사자놀음이 유명하다. 그외 현존하는 민속극에서 사자춤이 연행되고 있는 것은 봉산탈춤·통영오광대·수영야류·하회별신굿탈놀이 등에서이다. 사자춤은 보통 2명이 사자의 앞뒤를 맡아 앉아서 좌우로 머리를 돌려 이를 잡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면서 몸을 긁기도 하며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다가 봉산탈춤에서는 채찍으로 때리는 사자몰이를 사자가 잡아먹고, 통영이나 수영사자는 장단에 맞춰 담비와 싸우다가 담비를 앞다리 안으로 끌어들여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사자는 극동지역에는 없고 서역에 있는 짐승이므로 사자놀음 또한 서역에서 들여온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중국에도 민속사자무(民俗獅子舞)가 있고, 한국에도 여러 사자춤이 있으며, 일본에도 민속사자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의 사자놀음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향악잡영 鄕樂雜詠〉에 보이는 산예(猊)는 사자춤인데, 〈향악잡영〉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예(技藝)들이 서역에 근원을 둔 것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귀복(歸伏)시킬 때 목우사자(牧牛獅子)를 썼다는 기록이 있고, 우륵이 지었다는 12곡 가운데 〈사자기 獅子技〉라는 가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자춤은 이미 신라시대에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민속사자무에서는 사자를 불보살(佛菩薩)로 숭상하고, 봉산탈춤에서도 사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관련시켜 파계승을 벌하러 내려온 부처의 사자로 보고 있다. 또한 사자는 맹수 중의 맹수로 치기 때문에 사자춤은 벽사진경을 목적으로 한 민중의 의식무용으로 널리 행해졌다.(출처 : 브리태니카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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