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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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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음.

〔개 요〕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는 〈수영야류 水營野遊〉를 보고 시작한 것으로 18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937년 중일전쟁이 난 해까지 연희되다가 중단되었다. 그 뒤 재연되어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놀음은 세시민속놀이로 연희되었다. 연희시기는 음력 정월보름에 행해지는데, 준비과정은 야류 탈놀음 계원(契員)들이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동네 각 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여 비용을 마련한다. 음력 정월보름날 동부·서부간의 줄다리기가 끝난 이튿날 밤에 동래 중앙통 광장 패문리(牌門里)에 무대를 가설해놓고 놀았다.

무대는 목재를 사용하여 관중보다 약간 높게 만들고 관중은 삼면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악사석은 무대를 향해서 왼쪽에 있다. 무대 뒷면은 개복청으로 흰 포장(布帳)으로 가려져 있다.

이 놀음은 밤에 연희되므로 연희 때는 무대 좌우 적당한 곳에 불을 밝히고 놀음판을 좀 더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제등(提燈)을 공중에 달았다. 연희자들은 가무(歌舞)에 소양이 있는 평민 남자들로, 대개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며 그 가운데 연장자가 지휘한다.

〔공연내용〕

놀음의 내용은 앞뒤 둘로 구별되는데, 앞은 길놀이와 군무 및 잡희로 이루어지고 뒤는 탈놀음이다. 들놀음을 하는 날 해가 지면 먼저 길놀이를 한다. 그리하여 놀음판에 도착하면 길놀이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춘 뒤 탈놀음이 시작된다. 탈놀음은 모두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과장은 문둥이가 나와 미쳐 날뛰다가 딩굴면서 춤을 춘다. 이것은 문둥이의 원한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과장은 양반들에게 하인 말뚝이가 불평불만을 토로하면서 양반을 모욕하는가 하면 때로는 곁말로 조롱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샌님의 대부인과 사통(私通)하였다고 하며 양반의 체면을 여지없이 손상시킨다.

셋째과장은 영노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양반을 한층 신랄하게 모욕하는데, 양반은 자신을 양반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사람이 아닌 짐승·똥 등 온갖 것이라고 한다.넷째과장은 영감이 첩을 얻자 본처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본처와 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영감은 화병으로 죽고 만다.

사용되는 등장인물의 탈은 원양반·차양반·셋째양반·넷째양반·종가집도령·말뚝이·문둥이·할미·제대각시 등이고, 탈의 재료는 ‘두룽다리(셋째양반)’처럼 털가죽으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개는 바가지로 만든다.

가면 좌우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굵은 노끈을 꿰어서 붙잡아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원양반·차양반·넷째양반·종가집도령 가면은 입술과 턱부분이 윗부분과 분리되어 노끈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연희자가 재담을 할 때마다 마치 산 사람의 얼굴처럼 턱이 움직여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놀이가 끝난 뒤에는 탈을 마을의 동사(洞舍)나 공청(公廳)에 보관했는데, 이는 탈에 악귀가 붙는다고 생각하여 집에 보관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반주악기는 북·장구·해금·젓대·피리·꽹과리·징 등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은 주로 타악기만을 사용한다.

연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로 무가J54153(巫歌J54153)·상도군(喪徒軍)소리 등을 부른다. 춤은 ‘덧보기장단’이라 부르는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추는 ‘덧뵈기춤’이 대부분이다.

역대 기능보유자로는 박덕업(朴德業:말뚝이)·신우언(辛祐彦:제대각시) 등이고, 현재는 문장환(文章垣:원양반)·양극수(梁克銖:할미)·천재동(千在東:가면제작)·변동식(邊同植:악사) 등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있다.

[표] 동래야류의 탈 복식 소도구

탈이름

탈의 특징

복식·소도구

원양반

바가지에 종이를 바름. 눈썹과 수염은 따로 붙임.

청·백·분홍색의 도포, 흰 도루마기, 紗帽, 紗扇, 쥘 부채, 담뱃대, 개털관, 정자관, 갓, 복건, 지팡이

차양반

바가지탈, 묽은 입, 위로 향한 눈초리. 눈썹과 수염은 따로 붙임.

셋째양반

얼굴 바탕은 고양이털(원래는 개털), 턱 양쪽은 방울, 코는 움직임.

넷째양반

바가지탈, 노란색 바탕, 묽은 입, 눈썹·수염은 따로 붙임.

종가도련님

바가지탈, 달걀색 바탕, 붉은 입

말뚝이

바가지탈, 고동색 바탕, 덩실한 코, 튀어나온 눈, 드러난 이, 얼굴 전면에 돌기

흑색 등걸이, 청색 반소매 웃저고리와 바지, 造花 달린 패랭이, 채찍

문둥이

바가지탈, 1개는 미색 1개는 분홍색, 얼굴 전면에 돌기, 비뚤어진 입, 코는 1개는 뚫렸고 1개는 납작함.

평복, 소고, 북채

할미

바가지탈, 밤색 바탕, 군데군데 돌기, 비뚤어진 입

흰 동저고리와 몽당치마, 방울달인 지팡이, 쪽박

제대각시

바가지탈, 흰색 바탕에 머리와 눈섭은 검게 그렸음. 양볼에 연지

흰 손수건, 노랑 저고리와 옥색 치마

≪참고문헌≫ 東萊野遊臺詞 말뚝이科場(宋錫夏, 朝鮮民俗 2, 1934), 東萊野遊假面劇劇本(崔常壽, 慶尙南道誌 下, 1963), 野遊·五廣大假面劇(崔常壽, 慶尙南道誌 下, 1963), 野遊·五廣大假面劇의 硏究(崔常壽, 成文閣, 197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래들놀음

 

東萊 ──

 

부산광역시 동래지역에 전해오는 영남형 탈춤의 하나.

 

한자로 동래야류(東萊野遊)로 표기하기도 한다.

 

들놀음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수영들놀음[水營野遊]과 마찬가지로 동래들놀음은 앞놀이격인 길놀이가 들판에서 시작되는데, 길놀이가 다른 탈춤에 비해 유난히 성대하며 들놀음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동래들놀음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중상류의 직업적 예인 광대탈춤의 영향 속에 형성된 영남권 탈춤문화의 한 분파이면서, 동시에 동래 고유의 큰줄땡기기와 지신밟기 등 농경예축행사와 밀접한 관련 속에 전승된 향촌의 토착연희물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들놀음은 낙동강 서쪽 경상남도 일원에 분포된 오광대와는 달리 거창한 가장행렬인 길놀이와 집단군무의 덧배기춤판으로 앞놀이를 벌이고 나서, 판놀이로서 탈춤판이 있고 여흥의 뒤풀이로 마무리되는 집단적 대동놀이이다. 바로 이 점이 영남권 탈춤의 다른 갈래인 오광대와 구별짓는 근거가 된다. 들놀음은 정월 보름날 상원(上元) 행사의 하나로서 세시풍속의 일환으로 거행되었다.

 

다만 같은 들놀음 계통으로서 수영들놀음이 산신제와 더불어 벽사연상(邪延祥)의 종교의례적 의의를 지니면서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데 비해, 동래들놀음은 큰줄땡기기를 전후로 하여 이긴 쪽의 축하행사로 행해지는 민중축전으로서 한량놀이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는 동래지역 특유의 풍토와 예인기질에서 비롯된 듯하다.

 

전승

 

동래들놀음은 산대도감극 계통의 초기분파로 보기도 하고, 낙동강 중류인 초계밤마리(지금의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대광대패[竹廣大牌]의 연희물이 수로를 따라 지역적으로 분파·정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승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세시풍속과 더불어 토착적이고 비직업적인 향촌 탈춤이 토대가 되어, 이 위에다 산대희나 예인광대탈춤의 영향을 받아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향촌 탈춤으로 전승·발전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래들놀음이 새로이 정착된 것은 대체로 19세기 후반쯤으로 추정된다. 놀이의 경비는 이러한 놀이로 걸립한 전곡과 관리출신의 모임인 기영회(耆英會)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1910년대 중엽부터는 신흥계(新興契)에 이어 망순계(望筍契)가 주동이 되어 놀이를 이끌어왔는데 1935년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망순계가 해체되면서 들놀음의 명맥도 끊어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아 청년들 중심으로 남우회(南友會)를 조직하여 3·1절 기념행사로 들놀음을 놀았는데, 없어진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1965년 10월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제6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후 1967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 기·예능보유자는 말뚝이 역에 박덕업(朴德業), 원양반 역에 문장원(文章垣), 제대각시 역에 이남선(李南善)이었고, 그후 할미 역에 양극수(梁克銖), 악사·탈제작에 양세주(梁世珠) 등이 지정되었다.

 

오늘날은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와 동래야류보존회가 동래 금강공원에 전수관을 마련하고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진행절차

 

큰줄땡기기를 전후하여 날을 잡아, 저녁 무렵 해가 저물면서 고을 사람들과 연희자가 세병교(洗兵橋)나 만년대(萬年臺), 염창(廉倉) 마당, 마암곡(馬巖谷), 범어교(梵魚橋)에 모여 탈놀이판인 복천동 패문루(牌門樓 : 지금의 동래시장 앞 네거리) 앞까지 1시간 남짓 길놀이를 벌인다. 행렬에는 3현6각의 풍악대, 갑옷 입고 말 탄 중군(中軍), 남녀 소리꾼과 더불어 길군악대, 8선녀 기생들과 한량배, 원양반을 비롯한 탈놀음패, 가마탄 할미광대, 소리를 주고받는 한량배, 오색천으로 장식한 선유(船遊), 각 마을 풍물매구패 등이 늘어서고 일반 군중이 가세하여 일대장관을 이룬다. 일행이 놀이판에 당도하여 무리를 지어 길놀이의 여세를 모는 동안 크고 작은 등불과 모닥불, 횃불로 어둠을 밝히고 집단군무의 덧배기춤판으로 난장을 튼다.

 

밤이 깊어 아녀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야 탈놀음패가 꽹과리를 선두로 해서 판을 휘어잡으면 문둥이가 나오면서 탈놀음이 시작된다. 탈놀음은 첫째마당 문둥춤마당, 둘째마당 양반마당, 셋째마당 영노마당, 넷째마당 할미마당으로 진행된다. 탈놀음이 끝나면 오돌독이타령·고사리꺾자타령·요동춤놀이 등으로 즉흥적인 여흥을 벌이는 뒤풀이로 넘어간다.

 

탈놀음의 내용

 

동래들놀음에는 오광대에서 흔적을 보이는 오방신장무가 없고 파계승마당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들놀음 계통인 수영들놀음에 나오는 사자춤마당도 없다. 문둥춤마당도 한때 소멸된 것을 복원한 것이고 영노마당도 채록본에는 있으나 오늘날에는 공연되고 있지 않다.

 

문둥춤마당

 

낙동강 유역의 병신춤이나 병신굿놀이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승되어 왔을 문둥춤마당은 수영들놀음에서는 보이지 않고 고성오광대·통영오광대·가산오광대 등에 나온다. 동래들놀음에는 출신이 불투명한 두 문둥이가 차례로 나오는데, 자빠지기도 하고 누워 뒹굴기도 하면서 좀더 사실적으로 내면화하여 그려내는 것이 다른 지역의 것과 비교된다. 관중은 문둥춤에서 불구자의 애환을 감싸안으면서 문둥이가 느끼는 육체해방의 생명 에너지와 자족감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양반마당

 

말뚝이와 양반이 대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동래들놀음을 말뚝이탈놀이라고 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말뚝이의 거침없는 욕설과 가차없는 질타가 영남지방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위협적인 말뚝이탈의 형상이 이미 그 자체로 공격적인 면을 부각시켜주고 있고 거기에 활달한 건무형식의 춤이 위압감을 더해준다. 말뚝이는 호령조의 말투와 한문구절을 인용한 입씨름으로 양반을 한껏 조롱한다. 특히 대부인마나님과 통정을 나눈 것을 폭로함으로써 양반들에게 더할 수 없는 낭패감을 안겨준다. 이는 체제를 유지하는 도덕률을 허물어뜨리는 극적 격파술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관중은 인간 보편의 도덕성이 파괴되는 데 대한 불안정한 배반감과 함께 중세적 기존 도덕률이 붕괴되는 통쾌감을 맛본다.

 

영노마당

 

영노마당에서는 양반 사이의 의견충돌과 분란을 군데군데 엿보이면서 체제붕괴가 가속화된다. 양반을 잡아먹는 영노에게서 관중의 대리만족은 극대화된다. 또한 말뚝이는 통영오광대에서처럼 양반행세를 하는 자들이 비천한 태생임을 폭로하여 그들의 허세를 꺾고 말뚝이 자신이야말로 진짜 양반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진짜 양반과 가짜 양반의 싸움이 된다. 이부분은 신분제의 동요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민중의식이 빚어낸 굴절로 보기도 한다.

 

할미마당

 

영감과 할미는 놀이판에서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오랫만에 상봉하여 얼싸안고 반긴다. 그러나 영감의 첩 제대각시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 할미의 성화로 제대각시는 물러선다. 자식들이 죽은 사연을 알고 난 영감은 화가 나서 할미를 발길로 차니 할미는 쓰러져 죽는다. 당황한 영감은 의원을 부르고 봉사의 독경을 해보지만 하릴없어 무당을 불러 오구굿을 한다. 상도꾼들이 상여를 매고 나간다. 오구굿과 상여운반은 해서나 중부지역 탈춤의 진오귀굿과 오광대의 상여출상의 복합양상일 것이다. 처첩간의 갈등과 생활의 곤궁함을 그려내고 있는 이 마당은 우리나라 탈춤의 공통된 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남성의 횡포를 보여준다. 또 여기서 할미의 느닷없고 허름한 죽음은 그것이 바로 민중적 죽음의 한 모습임을 드러내준다. 곧 그것은 삶의 무기로서 일상적인 죽음이며, 이는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다는 민중적 세계관을 말해준다. 할미의 죽음은 민중적 삶의 상황을 보편적 진실의 세계로 진입시킴으로써 민중적 신명을 분출시키고 일상화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탈과 춤

 

동래들놀음의 탈은 바가지 위에 종이를 물에 불린 지토(紙土)나 나무껍질·볏집 등으로 눈·코·입·귀를 나타내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라 말린 다음 아교 단청으로 인물의 전형을 그려낸다. 영노·의원·봉사·향도꾼은 탈이 없이 분장만으로 출연한다. 동래말뚝이탈은 한국 말뚝이탈의 대표격이라 할 만큼 조형미가 뛰어나고 어깨가 왜소해 보일 정도로 크다. 길고 굵은 남근 같은 큰 코에 날카로운 톱니이빨, 불거져나온 큰 눈망울, 군데군데 검은 점 등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양반탈은 윗입술과 아래턱이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것이 사실감을 더해준다.

 

음악은 풍물패의 편성으로 설쇠·종쇠·꽹과리를 중심으로 한 타악기로 편성되어 있다. '웅박캥캥'이라는 굿거리장단과 자진모리장단에 태평소가락이 얹어진다. 춤사위는 경상남도 고유의 향토춤인 덧배기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유연하고 멋스러운 가락에 어름새·배김새·푸는새가 잘 어우러져 있는데, 특히 원양반의 춤과 활달한 건무형식의 말뚝이춤에서 동래 특유의 덧배기가락을 맛볼 수 있다. (蔡熙完 글)

 

참고문헌

 

오광대와 들놀음연구 : 정상복, 집문당, 1986

야류·오광대 : 강용권, 형설출판사, 1977

동래야류연구-양반과장에 나타난 세계관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27 : 황경숙, 부산대학교, 1990

원양반춤과 말뚝이춤사위에 대한 비교연구-동래야유를 중심으로 〈논문집〉 8 : 김온경, 부산대학교, 1980

동래들놀음 연희본 〈창작과비평〉 8-4 : 심우성, 창작과 비평사, 1973.12

동래야류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 : 최상수, 문화재관리국, 1965(출처 : 브리태니카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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