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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 / 이병기(李秉岐) 나는 난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데에서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 홍술햇골에서 살 때의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에서..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 박동규(朴東奎) 군고구마 장수 벌써 날씨가 쌀쌀해졌다. 가을이 속절없이 가고, 서리가 온 벌판을 덮으며 겨울의 옷자락이 살며시 다가오면, 도시의 길가 한 구석에 군밤이나 군고구마 장수들이 나타나게 된다. 환도를 하고 폐허가 된 서울에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던 1955년 초겨울, 우리 동네 어귀에도 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했다.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군고구마 통을 껴안고 앉아 면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구워 내던 우리 동네 아저씨는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낮 동안에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덩그렇게 불 꺼진 군고구마 통만이 전봇대 아래에 놓여 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골목에서 한참 아이들과 놀다 보면, 아저씨는 고구마 통에 불을 지피느라고 연기를 피우곤 ..
들판에서 / 이강백 등장 인물 : 형, 아우, 측량기사. 조수들. 사람들 장소 : 들판 무대 뒤쪽에 들판의 풍경을 그린 커다란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샛노란 민들레꽃, 빨간 양철지붕의 집,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이 동화책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킨다. 막이 오른다. 형과 아우,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형은 무대의 오른쪽에서, 아우는 왼쪽에서 수채화를 그린다. 둘 다 즐거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른다. 형, 아우에게 다가가서 그림을 바라본다. 형 : 야, 멋진데! 아주 멋지게 그렸어! 아우 : 경치가 좋으니까 그림이 잘 그려져요. 형 : 넌 정말 솜씨가 훌륭해. 아우 : 형님 솜씨가 더 훌륭하죠. 형 : 아냐, 난 너만큼 잘 그리지 못하는걸. 아우 : (형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다..
딸에게 온 연애 편지 / 오탁번(吳鐸藩) 나는 시를 쓰면서 늘 어린이의 시선(視線)을 닮으려고 애쓴다. 때묻지 않은 어린이의 시선이야말로 시인의 시정신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어린이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사물을 노래하기도 하고 어린이의 눈에 비치는 자연과 인간의 참모습을 노래하려 하기도 한다. 나의 시 작품에는 우리 집 아들과 딸의 어렸을 때 모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많다. 아빠와 엄마를 졸돌 따라다니며 온갖 질문을 해서, 때로는 어른들을 웃기기도 하고 때로는 난처하게도 만드는 철모르는 어린이야말로 시인의 눈을 가장 닮았는지도 모른다. 아래의 시 ‘꼴뚜기와 모과’는 초등 학교 1학년인 딸의 표정과 말씨를 그대로 빌려서 쓴 시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포장마차에 갈 때 그림 일기 ..
화가 이중섭 / 엄광용(嚴光鎔) 1 소년 이중섭은 풀밭에 엎드린 채 황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서산 아래로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황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이중섭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중섭은 오산 학교 재학 시절, 틈만 나면 들판에 나가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떤 날은 동쪽 오봉산에 해가 솟아오를 때부터 서쪽 제석산 너머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움직일 줄 모르고 소만 관찰하기도 했다. “형, 오늘도 소 데생하러 갔다 오는 거야?” 집에 돌아오자, 같은 방을 쓰는 후배 김창복이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중섭은 오산 학교 5학년이었고, 김창복은 그보다 3 년 후배로 둘 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응, 소를 보고 ..
먹어서 죽는다 /법정(法頂) 우리 나라는 어디를 가나 온통 음식점 간판들로 요란하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가든’이 왜 그리도 많은지, 서너 집 건너마다 가든이다. 숯불 갈비집을 ‘가든’이라고들 부르는 모양이다. 사철탕에다 흑염소집, 무슨 연극의 제목 같은 ‘멧돼지와 촌닭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 땅에서 이미 소멸해 버리고 없다는 토종닭을 요리하는 집도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있다. 게다가 바닷가에는 동해, 황해, 남해 가릴 것 없이 경관이 그럴 듯한 곳이면 횟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먹을거리에, 그 중에도 육식(肉食)에 열을 올린 지는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60년대 이래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식생활이 채식 위주에서 육식 위주로 바뀌었다. 국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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