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화가 이중섭 / 엄광용(嚴光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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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중섭 / 엄광용(嚴光鎔)

 

1

 

소년 이중섭은 풀밭에 엎드린 채 황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서산 아래로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황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이중섭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중섭은 오산 학교 재학 시절, 틈만 나면 들판에 나가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떤 날은 동쪽 오봉산에 해가 솟아오를 때부터 서쪽 제석산 너머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움직일 줄 모르고 소만 관찰하기도 했다.

, 오늘도 소 데생하러 갔다 오는 거야?”

 

집에 돌아오자, 같은 방을 쓰는 후배 김창복이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중섭은 오산 학교 5학년이었고, 김창복은 그보다 3 년 후배로 둘 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 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거든.”

, 마을 사람들이 형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소에 미친 녀석이래.”

 

어느 하나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거야. 창복아, 나는 앞으로 조선의 진짜배기 소만 그릴 거다. 소한테선 순수한 조선의 냄새가 나거든. 너도 앞으로 조선의 냄새가 풍기는 그림을 그려.”

 

이중섭은 1916410, 평안 남도 평원군 부농의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오산 학교를 다니면서 민족 의식에 눈을 떴다. 당시 오산 학교는 민족 의식이 강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교장은 조만식이었고, 함석헌도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강한 선생님들의 피끓는 강의는 젊은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오산 학교 시절에 이중섭이 최선을 다해 공부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가 열성적으로 그림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 덕분이었다.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가 오산 학교에 부임한 것은 이중섭이 5학년 되던 해였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 미술학부를 1등으로 졸업한 유명한 화가였고, 백남순은 일본의 여자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한 화가였다.

 

중섭아, 진정한 예술 작품은 수없이 많은 습작(習作)에 의해 만들어진단다.”

이중섭은 임용련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깊이 아로새겼다. 이중섭이 들판에 나가 황소 그림에 몰두하게 된 것은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기 시작하면서였다. 이중섭은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수없이 데생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이중섭은 밀가루에 수채 물감을 범벅해서 그것을 짓이겨 바르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물감이 마르자 화면에선 밀가루 더뎅이가 독특한 입체감을 나타냈다. 이것을 보고 임용련은,

그래, 중섭아. 바로 이거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거야. 독창성을 길러야 해. 새로운 소재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끝내 조선에 대해 국어 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민족 의식이 강했던 오산 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더 철저하게 감시를 받았다. 어느 날, 이중섭은 하숙방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창복아, 우리 말과 글을 없애면 우린 뭐가 되겠니? 나중에는 우리가 조선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될 거 아냐? 난 한글을 소재로 그림을 그릴 거야. 한글 자모(字母)를 조합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우리 말과 글도 없어지지 않겠지?

 

그 날 이후, 그는 황소를 데생하기 위해 들판에 나가는 것도 미루고, 한글 자모를 이용해 독특하게 구성한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이중섭은 그 그림을 임용련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선생은 말없이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2

오산 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조선 사람은 조선 땅이 좋고, 또 조선 땅에서 살아야 한다면, 굳이 일본 유학을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흙 냄새를 맡으며 그림을 그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너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조선의 황소가 일본에는 없지만, 정말 힘 좋은 조선의 황소를 그리려면, 일본에 가서 그림 공부를 더 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도 일본을 알아야 한다.”

임용련 선생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 미술 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일본 화단은 서양의 전위 미술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서양 그림을 모방하는 분위기였다. 이중섭은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이중섭은 서양의 유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성뿐만 아니라 역사성마저 결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된 예술은 태어나 자란 곳의 땅 냄새가 물씬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이중섭은 동경 제국 미술 학교를 그만두고 동경 문화 학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동경 문화 학원은 한 일본 건축사가 세운 학교인데, 남녀 공학에다 교복을 입지 않을 정도로 자유 분방한 학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의 창조적 능력을 장려하는 학교였다. 이중섭은 동경 문화 학원에 다니면서 비로소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 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림밖에 모르던 이중섭에게도 사랑스러운 여성이 나타났다. 동경 문화 학원의 2 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였다. 마사코는 유화과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림보다 문학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중섭 역시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마사코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마사코는 늘 우울한 표정을 짓고 다니는 이중섭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 나라 이야기를 하려니까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서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요, 우리 나라는…….”

이중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19385, 이중섭은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자유 미술가 협회의 공모전에 응모하여 협회장상을 받았으며, 일본의 여러 평론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1943년에는 망월이라는 작품을 출품(出品)해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그림은 화면 왼쪽에 둥근 달이 떠 있고, 중앙에는 한쪽 손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달을 바라보는 얼굴 모습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머리가 반쯤 잘린 소가 그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하에 있는 조국의 비운과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 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중섭은 귀국하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마사코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했다. 새로 마련한 살림집은 광석동 산마루에 있었다. 마당이 넓어서 한쪽에 닭장을 짓고 닭을 키웠다. 이중섭은 자연히 닭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닭은 곧 그에게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이중섭은 닭을 너무 가까이하다가 닭의 깃털 속에 살고 있던 닭니가 옮아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 하나에 관심을 가지면 적극적으로 물고늘어지는 사람이었다.

 

1946년은 이중섭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해였다. 그 무렵, 원산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의 형이 대지주로 규탄받아 원산 내무서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첫아이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중섭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 때, 이 소식을 듣고 한 친구가 달려왔다. 새벽녘에 잠을 깬 친구는 이중섭이 일찍 일어나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흠칫 놀랐다. 이중섭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림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이봐, 중섭이! 자네 그게 무슨 짓인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벙글 하고 있나?”

 

그림을 그리고 있네. 우리 아들 천당에 가면 얼마나 심심하겠나? 동무하고 같이 뛰어놀라고 꼬마들을 그리는 걸세.”

그는 속으로 놀라며 이중섭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여러 장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 한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뭔가?”

, 그거? 천도복숭아야. 우리 아들 하늘 나라에 가서 따 먹으라고…….”

 

3

1950, 625 전쟁이 일어났다. 이중섭의 집은 비행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하늘에선 비행기의 폭격이 계속되었고, 땅에선 육군 포대의 포격이, 바다에선 함포 사격이 쉴새 없이 이어졌다. 이중섭은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다.

부산은 피란민으로 들끓었다. 남한에 친척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그는 부두에 나가서 기름통을 굴려 화물차에 싣거나, 선박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의 날품팔이를 했다. 그의 모습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추운 겨울을 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옷이란 옷을 다 껴입고 자는 데도 추위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그런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자는 아내와 두 아들을 보고 있자니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중섭은 문득 부산보다 덜 추운 제주도 생각이 났다. 그 곳은 조카 이영진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에는 유채꽃이 한창 들판을 수놓고 있었다.

 

난 그림을 그릴 거야. 정말 이 곳에선 안심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 저 파도 소리를 들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군.”

이중섭은 곧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그림을 그렸고, 아내는 이웃집에 일을 하러 나갔다. 아내가 일하러 나가면 이중섭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갔다. 태양과 바다, 모래와 게, 그리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곧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4

195112,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중부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휴전 문제가 얘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중섭은 다시 부산으로 건너왔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했다. 이중섭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두 노동이나 운수 회사의 인부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가 버는 돈으로는 식구들의 끼니를 이어 가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불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장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아내의 건강이 나쁜데다, 또 알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일본에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내는 심한 영양 실조로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는 중증 환자였다. 그런데 아내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생활고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난 이중섭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신문사 문화부장에게 이중섭을 추천했다. 이중섭에게 소설 삽화라도 맡겨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문화부장은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신바람이 난 그는 이중섭을 찾았다.

 

중섭이, 인제 되었네. 신문 연재 소설 삽화를 맡아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것만 그리면 부두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가족끼리 함께 살 수도 있고…….”

나는 삽화를 그릴 자신이 없어.”

이중섭은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

미안하네. 삽화는 못 그려…….”

친구는 이중섭이 삽화를 그리지 않겠다는 까닭을 알았다. 삽화를 그려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그림이 아니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중섭은 개털 외투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종이를 꺼내 친구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건 담뱃갑의 은박지가 아닌가?”

그래, 은박지 그림이지. 요즘 이런 걸 그리는 재미로 산다네.”

이중섭이 내민 은박지 그림을 받아들고, 친구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중섭의 삶 자체가 그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은박지에는 발가벗은 아이들이 바닷게와 장난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 하나하나에는 모두 사연이 담겨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림으로 표현한 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야기가 많았고, 문학적인 향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기도 했다.

삶은 슬프고 아름다워.”

그래도 이중섭은 이 은박지 그림을 낙서화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5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이들이 떠난 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대구와 부산, 통영, 진주, 서울, 대구, 칠곡을 오가면서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다. 그러던 19551, 이중섭은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45점이었다. 전시회는 연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중섭은 그림이 팔릴 때마다 고객들에게 큰절을 했다.

 

아직 공부가 덜 된 그림을 좋게 봐 주시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되면 지금 선생님께서 계약한 그림과 바꾸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이중섭은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다. 병세가 심해지자, 그는 대구의 어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중섭은 거식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혼자서 병실 세 개를 온통 흰 페인트로 칠하기도 하였다.

 

이중섭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19567, 서울 서대문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식사를 거부했다. 게다가 몸이 점점 부어올랐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손톱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195696,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달빛만 창문 가득히 쏟아져 들어와 흰 침대보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날 이중섭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튿날, 적십자 병원 영안실 게시판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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