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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 동생에게 / 신영복 ‘미’(美) 자는 ‘양’(羊) ‘대’(大)의 회의(會意)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모든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의 임자인 인간의 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용모나 각선 등 조형상의 구도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없음은 마치 공간을 피해서 달아나거나 시간을 떠나 존재하거나, 쉽게 말해서 밑바닥이 없는 구두를 생각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李永女[이영녀] 登場人物[등장인물] 李永女[이영녀](二八[이팔]) 明 順[명순](一三[일삼]) 官 九[관구](一○[일공]) 淑 照[숙희](五[오]) (登場[등장]치 안함) 안숙이네(四五[사오]) 仁範[인범]이네(三○[삼공]) 점돌이할멈(五九[오구]) 車琪一[차기일](三八[삼팔]) 林道允[임도윤](四○[사공]) 柳書房[유서방](三○[삼공]) 第一幕[제일막](一九二四年[일구이사년] 夏[하]) 夜[야] 第二幕[제이막](一九二五年[일구이오년] 初春[초춘]) 午後[오후] 第三幕[제삼막](一九二五年[일구이오년] 冬[동]) 早朝[조조] 第一幕[제일막] 陽洞[양동], 원숙이네 집 마당. 丘陵[구릉] 우에 잇는 이 마당 울타 리를 隔[격]하야 길이 잇고 그 우로 儒達山[유달산]의 螓蛾[진아]한 바우돌峰[봉]이 하눌을 밧..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 정약용 ◇ 친구를 사귈 때 가릴 일 몸을 닦는 일〔修身〕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효도와 우애에다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않으면 비록 학식이 고명(高明)하고 문체가 찬란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흙담에다 아름답게 색칠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몸을 엄정(嚴正)하게 닦아놓았다면 그가 사귀는 벗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이어서 같은 기질로 인생의 목표가 비슷하게 되어〔同氣相求〕친구 고르는 일에 특별히 힘쓰지 않아도 된다.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였고 또 어렵고 험난한 일을 고루 겪어보아서 사람들의 심리를 두루 알게 되었는데, 무릇 천륜(天倫)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는 안되고 믿을 수도 없다. 비록 충성스럽고 인정 있고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온 정성을 다..
돌팔이 의사 / 이희승 어느 지방에 돌팔이 의원(미숙한 의사) 한 사람이 있었다. 병을 곧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에 매우 바빴다. 그러나, 의사라고는 하지만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같은 의서(醫書)는 아예 이름도 알지 못하고,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적은 없다. 어던 병에는 무슨 약이 특효라거나 아무개가 어떠한 증세의 병으로 오래 고생을 하다가, 이러저러한 약을 쓰고 건강을 회복하였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듣는 족족 병명 또는 증세와 그 약 이름을, 수첩과 같은 작은 책에 적어 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몇 해를 계속하였든지, 그 수첩은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차 있었다. 이 의원의 의술(醫術)은 이것이 유일한 밑천이었다. 환자를 볼 적마다 이 수첩을 뒤져서, 그런 병..
딸깍발이 / 이희승 「딸깍발이」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 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 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구경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日人(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 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는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 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나막신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다지 얘깃거리 가 될 것은 없다. 다만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유별난 窮狀(궁상)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
무궁화 / 유달영(柳達永)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다. 미국은 주마다 주의 꽃이 정해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법으로 정한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궁화가 국화(國花)로 굳어졌고, 또 국민들은 이 꽃을 사랑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를 뜰에 심는 것조차 일인 관리들이 몹시 단속(團束)했고, 무궁화로 한반도 지도를 수놓아 벽에 거는 것은 거의 반역죄(反逆罪)를 범한 것처럼 다루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 오는 동안에도, 무궁화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자랐다. 남궁 억(南宮檍) 선생은 강원도 홍천 보리울에서 청소년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무궁화 묘목을 다량으로 길러 널리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과 용기를 길러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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