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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온 연애 편지 / 오탁번(吳鐸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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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온 연애 편지 / 오탁번(吳鐸藩)

 

나는 시를 쓰면서 늘 어린이의 시선(視線)을 닮으려고 애쓴다. 때묻지 않은 어린이의 시선이야말로 시인의 시정신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어린이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사물을 노래하기도 하고 어린이의 눈에 비치는 자연과 인간의 참모습을 노래하려 하기도 한다.

 

나의 시 작품에는 우리 집 아들과 딸의 어렸을 때 모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많다. 아빠와 엄마를 졸돌 따라다니며 온갖 질문을 해서, 때로는 어른들을 웃기기도 하고 때로는 난처하게도 만드는 철모르는 어린이야말로 시인의 눈을 가장 닮았는지도 모른다. 아래의 시 꼴뚜기와 모과는 초등 학교 1학년인 딸의 표정과 말씨를 그대로 빌려서 쓴 시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포장마차에 갈 때

그림 일기 그리다 말고 나도 따라나선다.

아빠는 똥집 안주로 소주 한 병 마시고

살짝 데친 꼴뚜기 한 접시는 내 차지다.

꼴뚜기처럼 생긴 애가 골뚜기를 참 좋아하네

포장마차 할머니는 아빠를 본 체도 안 하고

꼴뚜기 먹는 나만 바라본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우리 집 망신은 요놈이 다 시키누나.“

아빠는 하하 웃으며 술잔을 비운다.

 

엄마 따라 춘천 가는 국도 가에는

호박이랑 모과를 파는 길가 가게가 많다.

엄마는 춘천 대학 국어 선생님

나는 서울 종암 초등 학교 1학년.

엄마는 모과 다섯 개를 고르고 나서

과일 가게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데

오천 원은 비싸요, 천 원 깎아요.”

모과 파는 아줌마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요즘 모과는 망신이 아니고 자랑이에요.

이 애가 모과처럼 예뻐서 주는 거예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줌마를 보면서

우리 집 망신은 요놈이 다 시키누나.”

엄마를 깔깔 웃으며 모과 봉지를 집어든다.

큰소리치면서 작은 것 잡아먹는

상어나 문어는 나는 싫다아.

잘생기고 커다란 과일도 싫다아.

꼴뚜기와 모과가 나는 젤이다아.

오늘 오가혜 그림 일기는 이만 끝.

 

이 시를 쓸 때, 나는 철부지 딸의 모습에서 진정한 시인의 마음을 발견했다. 나의 딸이 그랬듯이 어린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를 바라본다. 어른들처럼 딱딱한 사회의 관습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말은 살아 있는 말이다. 어린이와 같이 살아 있는 말로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表現)하는 것이 시를 짓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잘생긴 과일보다 꼴뚜기와 모과가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나의 딸처럼.

 

우리 집 딸이 초등 학교 5학년이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딸이 제 방으로 돌아가더니 문을 꼭 닫고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그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면서 웃고 까불던 아이였는데, 그 날은 참 이상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중이라도 들었나? 준비물을 챙겨 가지 못해서 미술 시간에 낭패라도 보았나? 아냐,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저 녀석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남학생한테서 편지(便紙)라도 받은 것 아닐까? 그래, 연애 편지를 받았나 보다.’ 나는 혼자서 빙긋 웃으며 딸아이를 불렀다.

 

너 남학생한테서 연애 편지 받았지?”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말했다. 딸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아빠, 어떻게 알았어요.”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정말 텔레파시라는 게 있는 것일까? 딸은 제 방으로 가서 편지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아빠, 여기.”

편지를 건네주는 딸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남학생한테서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내 딸을 축복하듯 밝은 햇살이 거실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편지를 펴서 본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 편지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알 수 없는 부호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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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꽃무늬가 그려진 편지지 다섯 장에 신비스러운 부호가 또박또박 그려져 있었다. 누구한테 받았느냐고 묻자 딸아이는 말했다.

우리 반, 남자 부반장…….”

얘가 너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글자일까?

 

나는 그 신비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내 방으로 왔다. 신성한 편지를 욕되게 하거나 우스개로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게 무슨 부호이며 어떤 내용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어 중학생인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그 편지를 보여 주었다. 아들은 그것을 보더니 모스 무선 전신 부호라고 금방 알아보았다. 소년 소녀 백과 사전에서 그런 부호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들 녀석은 제 방으로 가서 한 시간도 더 넘게 뜸을 들이더니 마침내 신비한 편지를 해석해 가지고 나에게로 왔다. 아들이 풀어 낸 편지는 이런 말이었다.

 

가혜, 안녕?

비록 짧지만 평소에 꼭 해 보고 싶었던 말이다.

추석 잘 지냈니?

별이 빛나는 밤에 연필을 들었다.

왠지 네 옆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이고

도망가고 싶었다.

기분 탓일까?

난 빨리 키가 크고 싶다.

 

모스 무선 전신 부호로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남몰래 편지를 쓴 이 소년이야말로 눈빛이 빛나는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소년은, 누구나 다 아는 말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면 소중한 자기의 진심이 흐려질까 염려하여 모스 전신 부호로 정성을 들여 편지를 쓴 것이다. 좋아하는 여학생 앞에서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그냥 도망가고 싶다는 이 소년의 고백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있을까? 시를 쓴 것은 아니지만, 밤을 새우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해 줄까 망설이면서 눈망울을 수도 없이 깜박였을 이 소년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 아닐까?

 

내 딸이 남학생한테서 연애 편지를 받아 온 후부터 나는 현대 시론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몇 살 때 첫 연애 편지를 받아 보았느냐고 질문 아닌 질문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내 딸처럼 무선 전신 부호로 된 비밀스러운 편지를 받은 사람 있느냐고 하면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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