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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분석 / 김수영(金洙暎)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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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 / 김수영(金洙暎)




1.  작가 (1)
  김수영(金洙暎,1921~1968) : 서울 출생.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5인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0년대의 모더니스트 중 주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모더니즘 시의 공허함을 느끼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4.19가 일어난 1960년 무렵을 고비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시의 모습을 바꾸었다. 이후 그는 지식인의 내부적 갈등과 고뇌를 정직하게 파헤치면서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시들을 발표하여 이 방면 시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달나라의 장난』(1958), 『거대한 뿌리』(1974) 등 시집과 『시여 침을 뱉어라』(1975)라는 평론집 및 기타 번역서 여러 권이 있다.

2.  작가 (2)
  김수영(1921~1968) 시인. 1945년 ‘묘정(廟庭)의 노래’로 등단하여 초기에는 모더니즘 시 운동을 펼치며 도시 소시민의 비애와 우수를 정직하게 노래하였다. 그 후 4월 혁명을 통해 정신적 충격을 받고 시 세계를 전환하여 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탁월한 비판 의식의 시를 썼다. 그리고 1970년대 민중 문학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시집으로 ≪달나라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평론집≪시여 침을 뱉어라≫등이 있다.

3.  ‘풀’과 ‘바람’의 상징적 의미
(1)  ‘풀’의 상징적 의미 :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 민초(民草), 민중(民衆))
(2)  ‘바람’의 상징적 의미 :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외부의 힘 또는 어떤 세력)(→ 외세, 독재 권력)

 

 


4.  작품 감상 (1)
  사소한 자연현상 속에서 인간 세계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시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생명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거대한 힘과의 싸움을,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의 말로써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 ‘풀’과 ‘바람’의 상징 의미를 생각해 보자. ‘풀’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바람’은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힘으로 상정해 보며 시를 이해해 보자.


  이 시에서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라는 네 개의 동사가 반복적인 대립 구조를 이루고 있다. ‘풀’과 ‘바람’이라는 대립이 ‘눕는다’와 ‘일어난다’는 운동의 반복 속에서 하나로 합일되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음에 유의하여 이 노래를 散文의 내용으로 바꾸어 보자. 문장의 기본 골격은 ‘날이 흐리다’, ‘바람이 분다’, ‘풀이 눕는다’, ‘풀이 운다’, ‘풀이 일어난다’가 될 것이다.

5.  작품 감상 (2)
  이 시는 ‘풀’과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의 시상을 전개시킨 시이다. 그렇다면 ‘풀’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풀은 파릇하게 돋은 그 모습으로 인해 생명의 상징이 되지만 쉽게 짓밟히거나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고 쓰러지므로 연약한 존재의 전형(典型)이다. 그러나 그 쓰러짐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풀’의 가치가 있다. 풀은 쉽게 쓰러지는 것 같으면서도 이내 원래의 모습대로 일어난다. 어떠한 강풍이 분다고 할지라도 그 현상은 마찬가지이다.


  아름드리 고목이 뿌리가 뽑혀져 쓰러질지언정 풀은 뿌리 뽑히지 않고 자기의 의연한 자세를 유지한다. 이것은 마치 포악한 힘으로 자신들을 짓누르는 위정자들(외세)에 대항하는 민중, 민초들의 모습과 같다. 민중들은 언제나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지만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으면서 그 저력을 역사적으로 보이고 있다. 민중이 있기에 그나마 역사의 강이 그 본류를 잃지 않고 흐르고 부정과 부패가 깊숙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시인은 바람에 의해 쓰러지다 이내 일어서는 풀의 모습에서 포악한 힘에 의해 억압당하다 그에 맞서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본 것이다.

6.  작품 감상 (3)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반서정성(反抒情性)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든 그의 후기시 세계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다. 


  60년대 민중문학을 신동엽과 함께 이끌고 온 김수영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과는 달리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해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의 진수를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권력, 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시는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날이 흐리고, 흐려서] 폭력화되었을 때[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풀은 눕고 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바람보다 먼저 웃는] 인류 역사의 총체적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평이한 우리말 시어와 ‘풀․바람’,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 등의 시어를 과거시제에서 현재시제로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함으로써 ‘풀’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현상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중후하면서도 명징(明澄)한 현실주의적 의미를 제시하는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7.  작품 감상  (4)
  시인들은 때때로 평범한 자연 현상 속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비유 또는 상징을 발견한다. ‘풀’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흐린 날 비가 오기 직전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을 생각해 보자. 그 들판에는 아주 여린 무수한 풀들이 돋아나 있고, 비를 몰아 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 풀들을 눕히고, 쓰러뜨리고, 또 울리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풀은 다시 일어나 웃는다. 이것이 이 시의 표면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시는 풀과 바람의 단순한 현상적 관계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시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는 풀과 바람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는 데에 있다.


  풀은 만물 가운데 가장 흔하다. 또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부러 키우지 않아도 억세게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민중들을 이 풀에 비유해 왔다. 결국, 풀은 ‘민중’이며 이 작품은 민중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바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올바르지 못한 세력의 상징이다.


  제1연에서는 풀과 바람의 관계를 설명한다. 풀은 바람에 의해 나부끼고, 눕고, 운다. 제2연에서는 풀과 바람의 대조가 뚜렷하다.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먼저 일어난다. 우리는 여기서 풀의 연약함과 아울러 ‘먼저 일어난다’는 끈질김을 볼 수 있다. 제3연에서는 풀과 바람이 대립을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의미는 대략 드러난다. 풀과 바람의 싸움은 이 세상에 있는 연약한 민중들의 굳센 생명력과 그것을 억누르고 괴롭히려는 세력의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하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의 끈질김이야말로 어떤 불의한 외부의 억압도 이겨내는 힘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에서 역사의 흐름이 비관적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이 시는 아주 일상적인 자연물인 풀과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8.  작품 감상 (5)
  풀과 바람을 소재로 하여, 보잘것 없는 듯이 보이는 생명과 그것을 억누르는 힘과의 싸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비슷한 말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단순성이 이 시를 무척 친근하게 느끼로독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의 폭을 넓게 하여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김수영의 시는 대개 조금 낯설고 어려운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가 모더니즘을 극복하려고 많이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 자취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시가 지닌 지적 태도와 기지(機智)의 복잡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 보는 ‘풀’은 예외적이게도 극히 단순하다.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정밀한 해석은 더 어렵기도 하다. 


  작품의 표면 문맥은 굳이 해설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단순하다. 땅 위에 숱하게 돋아나 있는 풀이 비를 몰아 오는 바람에 나부껴 눕고 울다가 마침내는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다. 물론 이처럼 단순한 내용만으로 요약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과 반복되는 말을 통한 리듬의 흐름이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은밀한 공감을 일으키는 점은 따로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는 분명히 풀과 바람 그 자체만을 노래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풀과 바람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풀은 세상에 있는 생물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풀은 또한 모든 목숨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가꾸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자라나고, 없애려고 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속성으로 해서 풀은 ‘세상에 무수히 많이 있으면서 어떤 시련에도 견디어 내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흔히 이해된다. 이 작품에서의 풀 역시 그러하다.


  작품의 문맥에 의하면 바람은 이러한 풀의 생명을 억누르는 어떤 힘에 해당한다. 그 억루름은 쉽게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은 눕고 또 운다(즉, 바람에 흔들리어 소리를 낸다). 그러나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끝내 완전히 억누르거나 없애지 못한다. 풀은 바람이 지나가면 곧 일어나고, 어떻게 보면 바람이 부는 순간에도 스스로의 삶을 지키고자 싸우면서 일어나려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풍의 근본적 의미는 대략 드러난다. 풀과 바람의 싸움은 곧 이 세상에 무수히 있는 굳센 생명들과 그것을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괴롭히는 힘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하잘것 없는 듯이 보이는 생명의 끈질긴 힘이야말로 모든 외부적 억압을 이겨 내는 것임을 지극히 평범한 말씨와 어조로,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없이 말한다. 


  이와 같은 일반적 의미는,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억세고 길긴 삶을  지켜 온 민중과 그들을 일시적으로 억압하는 사회 세력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들판의 수많은 풀처럼 이 세상에 언제나 무수히 있어 왔던 서민들. 풀이 끊임없는 시련을 견디며 삶을 지키고 번성하였듯이 그렇게 살아 왔던 민중들-이러한 상징적 연결은 극히 자연스럽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들은 민중을 ‘민초(民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거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역사 안에서 끊임없는 시련을 받으며 살아 온 민중이 결국은 그들을 누르는 일시적 강제의 힘을 이겨내는 생명력의 원천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인은 한 방울의 이슬에서도 우주를 보아야 하는 것이 시의 눈이라고 하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범상한 풀과 바람 사이에서도 역사와 사회를 읽어 내는 것이 또한 시의 정신이다. 바로 그러한 눈과 정신이 단순하고 평범한 듯한 몇 마디 말들에 놀라운 감동의 힘을 불어 넣고 우리를 새로이 눈뜨게 한다. 

9.  이 시의 운율적 특성 : 반복의 율조가 이 시의 운율적 특성이다.
(1)  동일한 시어(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 등)와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으로 동적(動的)인 운율을 획득한다.
(2)  대립적 심상(눕다 : 일어나다. 울다 : 웃다, 먼저(빨리) : 늦게 등)의 반복 제시로 주제를 부각시킨다.⇒ 지속되는 ‘반복’의 율조는 율동감을 자아내고, 이 율동감은 자연스럽게 풀의 역동성이라는 의미, 즉 ‘끈질긴 풀(민초, 민중)의 생명력’이라는 주제의식을 강화시킨다. ‘풀’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인식은 70년대 민중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0.  시의 구조와 주제
  이 시의 표면적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흐린 날 비가 오기 직전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을 상상해 본다. 그 들판에는 아주 여린 무수한 풀들이 돋아나 있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 풀들을 눕히고, 쓰러뜨리고, 또 울리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풀은 다시 일어나 웃는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날이 흐리다 → 바람이 분다 → 풀이 눕는다 → 풀이 운다 → 풀이 일어난다 → 풀이 웃는다’와 같은 기본 구조가 된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의 단순한 현상적 관계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는 양면적이라 하겠다. (1) 표면적 주제 : 이 시는 ‘풀’이 거센 ‘바람’ 앞에서 눕고 울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는 것이 표면적 내용으로, ‘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한 서정시이다. (2) 내면적 주제(사회적 의미) : 이 시는 현실 인식과 사회 의식을 나타낸 민중(民衆)의 이야기이다. ‘풀’은 민초(民草), 즉 민중, 백성을, ‘바람’은 억압하는 어떤 세력 내지 힘(나아가서는 외세 내지 독재 권력)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억세고 끈질긴 삶을 지켜 가는 민중은 일시적으로 억압하는 어떤 세력 앞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극복한다’는 내용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 시이다. → 사회 비판적 주제 의식

11.  시상의 흐름
  이 시는 ‘풀’과 ‘바람’의 대립이 ‘눕는다’와 ‘일어난다’의 운동의 반복 속에서 하나로 합일되는 체험을 노래함으로써 ‘풀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개되는 이 시의 시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1연 : 풀의 나약함(- 풀의 수동성)
(2)  2연 : 풀의 (강인함)(- 풀의 능동성 : 나약함의 극복)
(3)  3연 : 풀의 넉넉함, 여유 그리고 너그러움(- 풀의 포용성)   ⇒ 풀의 끈질긴 생명력

12.  문학사적 의의
  김수영은 60년대 한국시에 있어서 현실 감각이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된다.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두어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하여 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에 가담하였다. 그러한 맥락 위에 놓인 작품이 바로 ‘풀’이다. 이 작품에서 보인 ‘민중 의식’은 이후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 정희성, 문병란, 신경림 등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 문학의 기틀’을 이룬다.

13.  참여 문학(參與文學) 
  참여 문학(앙가주망, engagement)은 ‘문학가는 미래의 자유로운 발전과 존속을 위해 정치나 사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학 이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20년대 ‘카프’나 ‘문학가 동맹’ 측에 의하여 논의된 바 있으나, 그들이 신봉한 것은 이데올로기였고, 문학, 예술은 그 이데올로기를 단지 맹목적으로 집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올바른 참여의 태도를 그들에게서 구하기는 힘든 것이다. 한편 이러한 논의는 6·25 이후 또다시 신진 비평가나 작가들에 의해 대두되었다. 그들은 작가가 시대나 역사의 이방인이 되지 말기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곧 문학의 사회 참여를 의미한다. 정을병의 ‘개새끼들’, 선우 휘의 ‘망향’, 오상원의 ‘모반’, 김성한의 ‘바비도’ 등의 소설과 신동엽의 ‘금강’, 신경림의 ‘갈대’, 전봉건의 ‘의식’, 김수영의 ‘눈’ 등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14.  핵심 정리 
  ▷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주지적, 참여적
  ▷ 운율 : 반복과 대구에 의한 리듬 형성
  ▷ 특징 : 대립 구조
  ▷ 구성 : ① 풀의 나약함 - 수동적인 모습(1연)
           ② 풀의 생명력 - 수동성→능동성(2연)
           ③ 풀의 넉넉함 - 능동성 강조(3연)
  ▷ 제재 : 풀
  ▷ 주제 :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김수영과 4.19묘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기념탑을 세우자/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김수영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김수영(1921~68)의 이 시는 그의 가장 좋은 시도 아니며 4․19를 노래한 가장 빼어난 시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1960년 4월26일 이른 아침에 쓴 이 시는 4․19의 순수 절정의 순간을 직접 호흡하고 있다는 미덕을 안고 있다. 이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사의 표명은 2백명 가까운 젊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갈구하던 바의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그 최소치에는 가까웠던 것이다.


 1960년 3월15일의 제5대 정부통령선거는 `국부' 이승만의 본질과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기회와도 같았다. 노욕과 망상으로 똘똘 뭉친 우남이 입 안의 혀 같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저지른 미증유의 선 거부정은 당장 그날로부터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다. 마산에서 터져 나온 항의시위는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그보다는 그날 실종된 한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그였다.


 김주열의 주검에 다시 십여명의 사상자로 대답한 마산의 2차 시위는 남한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4월18일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건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19일 성난  학생과 시민들은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치달아 독재타도를 외쳤으며 경찰은 발포로써 응답했다.


 비상계엄령이라는 채찍과 자유당 총재직 사임이라는 당근으로써도 우남은 돌아선 민심을 되잡을 수 없었다. 4월25일 대학교수단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을 때 그의 운명의 나침반은 이미 하와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남에게는 정치적․인간적 실패, 나아가 역사적 죽음으로까지 다가왔을 4․19는 한국문학으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은 4․19가 열어놓은 해방의 공간이 자유로운 문학적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의미와, 4․19 자체가 두고두고 한국문학의 가물지 않는 수원(水源)이 됐다는  두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시에 있어서 4․19의 적자는 김수영과 신동엽이었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며 4월혁명을 동학혁명에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성과와 한계,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가리고자 했다.


 김수영에게 있어 4월혁명은 시세계의 전면적인 변모를 가져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50년대를 철저한 모더니스트로 통과한 김수영은 1960년 4월19일을 기점으로 해서 참여적인 사실주의 시인으로 변모한다. 앞서 인용한 시를 비롯해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만시지탄은 있지만' `그 방을 생각하며' 등 4․19를 직접 다룬 일련의 시편들은 물론, `가다오 나가다오' `거대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사랑의 변주곡' 등 현실의 치부를 구체적이면서도 신랄하게 까발린 시들이 직․간접적으로 4․19의 영향 아래 쓰여졌다.


 그리고 그같은 변모의 궁극은 뜻밖의 교통사고로 숨지기 불과 보름 전에 토해놓은 절창 `풀'이었다. 산문투의 장광설과 거칠것 없는 발성으로 특징지어지던 김수영 시세계의 또한번의 변모를 예감케 하는 이 시가 그 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는 사실은 한국문학사의 안타까움이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 `풀' 전문).


 4․19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 들어선 것은 자유당과 별다를 것도 없는 민주당 정부였다. 그나마도 1년 뒤에는 박정희 소장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4․19의 이념은 철저히 능욕당했다. 그런 점에서 4․19는 미완의 혁명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계속 진행중인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승옥씨가 70년대 초 월간 <샘터>에 발표한 짧은 이야기에 `정직한 이들의 달'이 있다. 바로 4월19일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그날 밤 수도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둔 서울 문리대 수학과 학생 김치호의 마지막을 그린 것이다. 김치호가 말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어요. 부정한 짓을 하면 안 된다구. 그래서 선거를 부정으로 한 사람들에게 선거를 공정하게 다시 하라구 말했어요.(…)학교 교과서가 주동자예요. 부정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부정이라고 가르치는 교과서가!󰡓
  그 김치호는 지금 서울 수유리 북한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4․19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다른 많은 교과서주의자들과 함께. 4․19 묘지는 혁명 이태 뒤인 1963년 현재의 위치에 조성됐으며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국립묘지로 새단장했다. 평일 오후의 4․19 묘지는 참배객이 드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온 젊은 엄마들, 근처 국립재활원의 환자들, 노인들, 연인들,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비둘기들로 채워져 여느 시민공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을 보면서 생각한다. 4․19가 추구했던 정신과 이념은 이 묘역의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제가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일까, 청장년의 나이로 4․19를 겪었을, 그러나 이제는 다만 무력한 삶의 구경꾼으로 가라앉아 있는 노인들일까. 아니면 유영봉안소니 만장이니 수호자상이니 수호예찬의비니 하는 각종 시설물일까. 4․19는 성소에서 기림을 받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 한정된 넓이의 묘역에 갇혀서 숨막혀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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