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by 송화은율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작가 : 한용운(1879-1944) 본명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아명 유천(裕天). 호는 만해(卍海). 용운(龍雲)은 법호(法號). 충남 홍성 출생.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며 등단. 한말에 의병운동을 했으며, 3․1 운동 당시 33인 중의 주동자로 피검되어 3년간 투옥. 승려, 급진적 불교개혁론자, 독립 지사.
그는 당시의 퇴폐적인 사조에 초연하면서, 단 한 권의 시집으로 우뚝한 시사(詩史)의 봉우리를 점했다. 그는 종교적 민족적 전통시인인 동시에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며, 그의 시는 깊은 사색과 신비적인 특성을 드러냈다. 특히 동인 활동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이고도 전통적인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특기할 만하다.
그의 전작(全作)은 『한용운 전집』(신구문화사, 1973)에 수록되어 있다. 장편소설로 「흑풍(黑風)」(조선일보, 1935), 「후회(後悔)」(조선중앙일보, 1936) 등이 있고, 이외에도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의 저서가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이 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해가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를 읽고 난 뒤,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의 문학관 및 종교관이 나타나 있어 주목을 끈다. 타고르는 동양 최초로, 그것도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인으로서 노벨 문학상(1913년)의 수상자가 된 사람이다. 우리 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던 그가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던 당시의 많은 우리 문학인들에게 ‘동방(東方)의 시성(詩聖)’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가 이 땅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17년 육당의 청춘을 통해서였으며, 본격적인 소개는 김억에 의해서였다. 만해의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편들은 타고르의 본격적 도입 이후 창작된 작품이며,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그 전개에 끼친 타고르의 영향은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타고르의 시 ‘Gardenisto’라는 작품은 ‘원정(園丁, 정원사) The Gardener’의 에스페란토 역(譯)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타고르의 시에 상당히 감동받았으면서도 전적으로 타고르의 시 세계에 공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타고르의 시에 나타나는 초월적 세계에의 지향에 대하여 만해는 많은 이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만해에 의하면 현실을 떠나 영원한 피안(彼岸)의 세계를 노래하는 타고르의 시는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경건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절망의 노래요, 죽음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시는 타고르의 시에 대한 만해의 소감을 ‘벗’이라고 지칭된 타고르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된 전 4연 구성의 자유시이다.
1연에서 만해가 평가하는 타고르의 시는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이나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의 향기’와도 같이 대단히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아무리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라 하더라도 진정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일견 희망의 노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희망을 포기한 ‘절망인 희망의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2연에서 만해는 그에게 눈물을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라고 한다. 떨어진 꽃에 눈물을 뿌리는 일은 소용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3연에 이르면 더욱 분명해져 그의 시를 ‘무덤을 그물친 황금의 노래’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현실의 생명과 유리된 허황한 아름다움만을 가진 노래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추’는 것은 현실의 삶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있는 만해로서는 그에게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발을 세우’라고 진심으로 충고한다. 즉, 고통스런 현실의 역사를 회피하지 말고, 그 안에서 참된 가치의 실현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마침내 절망적 현실인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게 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4연에서 만해는 그의 시에 대한 감상을 종합적으로 ‘부끄럽고 떨리는’ 것으로 말하고 나서, 왜 ‘내가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것인지 밝힘으로써 자신의 문학관이자 종교관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란 현실을 떠난 영원한 내세로 구원시켜 주는 데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현실의 고통에 맞서 능동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해 주는 데 그 가치가 있으며, 문학 또한 그 같은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만해는 이 시를 통해 지금과 같은 암울한 현실 상황하에서 필요한 것은 절망적 노래가 아니라, 현실 상황과 대결하며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을 이루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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