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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 본문 일부 및 해설 / 한용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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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 한용운

 

 

 

서론(緖論)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다. 모든 일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위 성공을 하고, 실패도 하고 하지 않음이 없으니, 만약 사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따름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이것을 따져서 말해 보면, 사람에게 성공하기에 족한 노력(謀)이 있어도 하늘이 이를 실패로 돌리기도 하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노력밖에 없는데도 하늘은 이를 성공시키기도 한다는 뜻이 된다. 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흥이 깨지고 낙담케 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늘이 이같이 사람이 꾀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닌 바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한다는 것은 들어본 일도 없고, 목격한 바도 없는 터이다.

 

저 소위 '하늘'이란 형태 있는 하늘을 말함인가. 아니면 형태 없는 하늘을 기리킴인가. 만약 형태가 있는 하늘을 말함이라면 어찌 저 위에 나타나 있어서 그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형태가 있고 보면, 하늘도 현상의 하나의 것이 되고 그렇다면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것을 침범할 수 없는 점에서 딴 현상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을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 수효를 헤일 수 없는 터에, 어찌 모두가 대단치도 않은 한 유형물에 의해 성패를 지배당하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형태 없는 하늘을 기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하늘의 도리를 말함이요, 우리가 이르는 하늘은 아닌 것이다. 하늘의 도리란 기실 진리의 뜻이 된다. 그리고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공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이며, 실패는 본디 스스로의 힘으로 실패한 것이 된다. 다시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따위를 입에 담을 여지가 있겠는가.

 

(중략)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천만년 이전의 일을 연구하는 이가 있고, 천만 년 뒷일을 연구하는 이도 있어서, 천지 사이의 형이상 형이하의 문제 치고 새로이 하지〔維新〕않음이 없어, 학술이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일 수 없도록 접종(接種)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괘라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되는 까닭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아, 그러나 이것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껏 드러남이 없는 것은 유독 무슨 때문일 것인가. 하나는 천운(天運)에 돌리고 하나는 탓함이 그 원인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일을 이룸이 하늘에 있다'는 주장에 의혹을 품게 된 후에 비로소 조선 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을 뿐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후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갑자기 깨달은 나머지, 유신해야 할 까닭을 얼마쯤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논(論)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인 형제들에게 알리는 터이다.

 

(중략)

 

불교의 유신은 마땅히 파괴가 선행되어야 함을 논함.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比例)의 학문에 있어 추리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보다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 파괴가 느린 사람은 유신도 느리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빠르며,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큰 것이니,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대야 하는 것이 파괴임이 확실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큰 종기를 앓아 여러 의사에게 보여 치료한다고 하자. 이때 그 종기가 저절로 터져서 병이 스스로 낫기를 기다릴 뿐 손 쓸 바를 모르는 사람은 의사로서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니까 논외(論外)로 돌리겠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라 해도 대강 침구(鍼灸)를 가함으로써 겉으로 그 피부만 아물게 하고 근원을 제거하지 않아서, 일시적인 효과나 기대하는 것은 의사로서 용렬한 자이다. 이런 사람이야 어찌, 치료에서 손 뗀 며칠 사이에 미쳐 제거하지 못한 피와 독이 피부 안에서 곪고 들떠서, 병자의 고통이 치료받기 전보다 더욱 심하고 죽을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나 명의(名醫)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다. 군살을 쪼개고 엉긴 피를 빼어, 그 독을 제거하고 그 병근(病根)을 뽑은 다음, 증세에 따라 약을 주어서 점차 완전히 아물게 하여 병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종기를 앓지 않은 것처럼 만든다. 저 용렬한 의사가, 만약 한 번 살을 베어 피를 빼서 조금도 동정하지 않은 광경을 보았던들, 자못 놀라고 괴이히 여겨, 생각하기를 사람을 죽이는 행위여서 희망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완치된 후에 비교해 본다면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했는지, 누가 우수하고 누가 못한 지를 지자(智者)나 우자(愚者)나 똑같이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파괴는 살을 베고 피를 빼내는 등속(等屬)이니 유신을 꾀함에 있어서 마땅히 파괴를 앞세워야 함이 의사가 살을 베고 피를 빼는 것과 같다. 유신을 말하면서도 파괴를 기피하는 이는, 남쪽에 있는 월국(越國)에 가려 하면서 마차를 북으로 모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은 유신을 능히 해내지 못할 것이니, 승려의 보수파(保守派)가 유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대저 누구가 일이 더욱 오래 유지되면서도 폐단이 안 생기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더욱 깊어지고 보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폐단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여, 급속도로 악화해 전일(前日)의 면모가 없어지고 만다. 우리 조선에 불교가 시행된지도 천 5백여 년이나 되었다. 오랜 시일을 거치는 동안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다시 폐단을 낳아, 지금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그 극치에 달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소위 폐단이란 실로 파괴해야 할 자료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파괴해야 할 자료를 지닌 채 피상적인 개량이나 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릇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라면 파괴하지 못함을 시정해야 할 것이다.  (후략).

 

 

또 다른 역문

 

서론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다. 모든 일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니, 만약 사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따름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이것을 따져서 말해 보면, 사람에게 성공하기에 족한 노력이 있어도 하늘이 이를 실패로 돌리기도 하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노력밖에 없는데도 하늘은 이를 성공시키기도 한다는 뜻이 된다. 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흥이 깨지고 날담케 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하늘이 이같이 사람이 꾀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닌 바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나는 삶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한다는 것은 들어본 일도 없고 목격한 일도 없는 터이다.

 

  저 소위 '하늘'이란 형태 있는 하늘을 말함인가. 아니면 형태 없는 하늘을 가리킴인가. 만약 형태가 있는 하늘을 말함이라면, 어찌 저 위에 나타나 있어서 스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형태가 있고 보면, 하늘도 현상의 하나인 것이 되고, 그렇다면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것을 침범할 수 없는 점에서 딴 현상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는 터에, 어찌 모두가 대단치도 않은 한 유형물에 의해 성패를 지배당하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하늘의 도리를 말함이요, 우리가 이르는 하늘은 아닌 것이니, 하늘의 도리란 기실 진리의 뜻이 된다. 그리고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공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이며, 실패는 본디 스스로의 힘으로 실패한 것이 된다. 다시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따위를 입에 담을 여지가 있겠는가.

 

  형태가 있는 뜻의 하늘이건 형태가 없는 의미의 하늘이건 그것이 다같이 해당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늘 있음을 알고 사람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 성명이 이미 노예의 명부에 오르고 마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저를 사랑하지 않음이 이같이 심한 것이랴. 만약 문명인으로 하여금 이런 말 하는 사람을 오래 된 무덤 속으로부터 끌어 내어, 자유룰 포기한 죄를 책망케 한다면 변호하고자 해도 변호할 길이 없을 터이다.

 

  진실로 하늘이 일의 성패와 관계없음이 이와 같다면, 만물의 수효가 많다 해도 이런 이치를 파악하면 될 뿐이다. '일을 꾀함이 나에게 있다'고만 이를 것이 아니라, '일을 이루는 것도 나에게 있다' 고 해야 하리니, 이런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되 남을 책망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믿되 자기 아닌 다른 것(하늘 따위) 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사리를 논하는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가지고 종지를 삼음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오,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천만 년 이전의 일을 연구하는 이가 있고, 천만 년 뒤의 일을 연구하는 이도 있어서, 천지 사이의 형이상·형이하의 문제 치고 연구하여 새로이 하지 않음이 없어서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도록 접종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까닭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아, 그러나 이것 역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 드러남이 없는 것은 유독 무엇 때문일것인가. 하나는 천운에 돌리고, 하나는 남을 탓함이 그 원인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일을 이룸이 하늘에 있다'는 주장에 의혹을 품게 된 후에 비로소 조선 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후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갑자기 깨달은 나머지 유신해야 할 까닭을 얼마쯤 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논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인 형제들에게 알리는 터이다. 이 논이 문명국 사람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실로 무용지장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승려의 전도를 생각하는 처지에 선다면 반드시 조금은 채택할 것이 없지도 않으리라 생각된다. 대저 거짓 유신이 있은 후에 참다운 유신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니, 이 논이 후일에 가서 거짓 유신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필자의 영광이 이보다 더함이 없겠다.

 

불교의 성질

  오늘 불교의 유신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불교의 성질이 어떤지를 살피고, 이것을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상황에서 비추어 검토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왜 그런가.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추세에 있으며, 만약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을 경우에는 죽음에서 살려 내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르틴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이를 지하에서 불러 일으켜서 불교를 유싱코자 한다 해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로서 우수한지 어떤지와, 미래 사회에 적합할지 어떨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데. 불교는 인류 문명에 있어서 손색이 있기는커녕 도리어 특출한 점이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는 이에 불교의 성질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들 것은 종교적인 성질이다.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들의 가장 큰 희망이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밑천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니, 만약 희망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게으르게 살아서, 그날 그날을 편히 넘기는 것으로 만족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정신과 육체를 괴롭혀 가면서 일을 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희망이라는 것이 없으면 사람이건 사람 아닌 것이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의 없어질 것이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황폐·음악에 흘러 전일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을 터이다. 필시 지옥을 연상시키는 생활과 야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위가 나타나 참담하고 추악하기 끝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위 문명인들은 어느 외진 곳에 도피하여 숨을 죽이고, 생존의 의욕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희망이 행여나 크지 못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시로 욕심낼 만한 달콤한 것을 무형의 세계에 만들어 놓고, 답답한 중생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희망을 걸게 한 것이 불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의 발상의 온상이 되었다. 예수교의 천당, 유태교가 받드는 신, 마호멧교의 영생 따위가 이것이니, 다 깊이 세상을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임수의 말로 일관하여 천당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받드는 신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영생의 약속이 사실인지 어떤지에 대해 조금도 냉정히 검토함이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미신을 지녀 네려오니, 이는 사람을 이끌어 우매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것이라는 비난이 이미 철학가들 입에서 끊이지 않은 터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구차스러운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미신인 점은 인정하나, 여러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효능을 인정해야 한다. 2세기 이래 구미 각국에서 전개된 놀라운 업적을 보지 못했는가. 이것은 반이나마 그 미신이라는 종교의 힘이었던 것이니, 미신이 세계에 끼친 공로가 어찌 크다고 하지 않으랴'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역사상에 아주 저명하여 오늘까지 미담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 치고 누구가 무수한 사람의 피를 흘린 끝에 그 공을 자기 한 몸에 거두어 들이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인가. 저 정치가들이 만약에 미신으로 민중의 정신을 세뇌하지 않았던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박탈하여 사지에 몰아넣어 버릴 수는 없는 터이었기에, 백방으로 획책하여 미신으로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를 삼고, 또 사람의 생명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총알을 삼았던 것이니,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천만이 한두 개의 미신에 속아 두 번 누릴 수 없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 수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미신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 수밖어 없다는 것은 비애의 중의 비애임에 틀림없다. 미신은 인류에 공이 있는 듯도 보이지만, 기실 폐해가 너무나 큰 터이다.  불교는 그렇지가 않다

 

.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정변의 주장이 다 그런 취지였으니, 이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셨다고 하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부터 6년에 걸친 고행과 49년의 설법과 열반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동정과 한 말씀과  한 침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가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뜻 아님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천당·지옥의 주장과 불생 불멸의 말이 있기는 있는 터이나, 그 취지인즉 다른 종교와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경에 이르기를 '지옥과 천당이 다 정토가 된다'고 하셨고, 또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라 하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은 상식으로 생각되는 그런 천당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건설되는 천당이며, 지옥도 죽어서 간다는 그런 뜻의 지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삼라만상이 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터이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우리의 마음을 떠나 별것이 따로 있음은 아닌 것이니,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천당이니 하는 따위를 받드는 소위 미신과 그 거리가 어떻다 하겠는가. 또 불생 불멸은 다른 종교의 영생 등속과는 다르다. 그것은 참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세계의 주인공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저 죽은 자를 모두 살려 놓는다는 따위는 암우하기 그지없는 밥통이나 하는 소리다. 세로는 삼세를 포함하되 오래다 하지 않고, 가로는 시방에 걸치되 크게 안 여겨서, 멀리 감각 기관과 그 대상을 초탈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는 것을 진여라 이른다. 이 진여는 결국 불변의 뜻이니, 이것이 어찌 생사와 관련이 있겠는가.

 

  중생이 이런 더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 설법하시었다. 다만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다르므로 쓰여진 방편이 여러 가지이긴 했으나 궁극의 목표는 각자가 지닌 진여를 때닫게 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목적에 도달하면 수단은 잊고 마는 것이매, 이것이야말로 고기를 잡고 통발을 잊음이요, 달을 보고 그것을 가리킨 손가락을 망각함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통발과 손가락을 미신이라고는 못할 것이니 방편은 방편대로 역시 귀중함이 사실이다. 이에 중생들이 비로소 얼마 안되는 이 몸으로 수십 년 동안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다 허망함을 알아 불생 불멸의 경지를 영원한 참된 자아에서 구하게 된다. 이런 희망이 과연 다함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찌 유독 미신을 지닌 뒤에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하겠는가. 불교는 지혜로 믿는 종교요, 미신의 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 불교의 철학적 성질이다. 철학자와 종교가가 왕왕 서로 충돌하여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미신과 진리가 본래 상극인 까닭이다. 종교가들이 한결같이 미신에 얽매여 깨어날 줄 모른다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온 힘을 기울여 이에 항거함으로써, 소위 미신적인 종교가로 하여금 지금부터 1세기 안의 천지로부터 종적을 감추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 불교가 어찌 이런 미신적인 종교들과 한 운명을 더듬겠는가.

 

  불경에 '복과 지혜가 아울러 구족했다' 하셨고, 또 '일체 종지'라 하셨다. 일체 종지라 함은 자기 마음을 깨달아 투철하고 막힘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철학자들의 궁극 목표가 아니겠는가. 다만 철학자들은 포부는 크되 힘이 모자라 허덕이고 있거니와, 우리 부처님에게 있어서야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철학의 대가가 누군지 알고자 하면 석가를 젖혀 놓고 다른 대가가 없을 것이니,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동서양 철학의 불교와 합치되는 것을 들어 대략 검토해 보겠다.

 

  중국인 양 계초는 이렇게 말했다.

  '불교·기독교의 두 가지가 다 외국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중국에 들어왔는데 불교가 널리 퍼진 데 대해 기독교가 퍼지지 못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기독교는 오직 미신을 주로 하여 그 철리가 천박해서, 중국 지식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 대해 불교의 교리는 본래 종교면서 철학인 양면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 증도의 이상을 깨닫는 데 있고, 도에 들어가는 법문은 지혜에 있고, 수도하여 힘을 얻음은 자력에 있으니, 불교를 예사 종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학문이 중국에 들어옴으로부터 그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지기에 이른 그 다음에야 중국 철학이 이채를 띠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철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실로 불교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아, 불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도 지금에 1천 5백여 년이 지났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1천 5백여 년 동안 이 조선 땅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에게 '중국은 저렇거니와, 불교를 들여온 후에 조선 철학은 얼마나 발전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같은 손을 안 트게 하는 약이건만 한 사람은 이를 써서 장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이것을 사용하면서도 솜빠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생각컨대 이 약을 어떻게 쓰는가는 사람의 책임이매, 손을 안 트게 하는 약에게야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독일의 학자 칸트는 말했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가 다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낸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 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본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정한 자아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진정한 자아는 반드시 항상 활발 자유로와서 육체가 언제나 필연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과는 같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러면 소위 활발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 하고 악한 사람이 되려함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데서 생겨나는 생각이다.

 

  자유 의지가 선택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에 소위 자유성과 부자유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음이 이론상 명백한 터이다.'

 

  양 계초는 이 주장을 이렇게 해설했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라는 것이 있는데, 진여란 곧 칸트의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며, 또 소위 무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인 자아에 해당하는 개념이어서 필연의 법칙에 구속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또 부처님의 말씀에, "생각컨대 우리가 무시 이래로 진여·무명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성해와 식장 속에 포함되어 서로 훈습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범부는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는 까닭에 반야지를 그르쳐 식을 삼고, 도를 배우는 자는 또 진여로 무명을 훈습하는 까닭에 식을 전환시켜 반야지를 이룬다" 하였다. 송대의 유학자는 이 범례를 따라 중국의 철학을 조직한 터이었으므로 주자는 의리의 성과 기질의 성을 나누어서 <대학>을 주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인바,허령 불매해서 모든 이치를 구비하여 온갖 사물에 응해 작용하는 당체이다. 다만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으로 인해 때로 어두워지는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체요, 각자가 제각기 한 진여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했고, 칸트는 사람이 다 한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했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못한다" 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중생을 널리 구제하자는 정신에 있어서 좀더 넓고 깊으며 더없이 밝다고 할 만하다. 이에 대해 칸트는 "만약 선인이 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누구나 선인이 된다"고 했으니, 그 본체가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어서, 수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좀더 절실하고 행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 이에 비겨 주자의 명실설 같은 것은 만인이 동일한 본체를 지니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부처님에게 못 미치는 점이라 하겠고, 또 말하기를 이 명덕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여,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연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겨 미흡한 점이다. 칸트의 본의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는 결코 다른 무엇에 의해 구애되든지 가리어지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구애를 받고 가림을 받는 이상 그것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양 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거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2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영국의 학자 베이컨이 말했다.

  '우리의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다. 그리하여 대상이 와서 비치는 경우, 혹은 뾰죽이 나온 곳에 비치기도 하고, 혹은 움푹 팬 데에 비치기도 한다. 이에 있어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비치는 데가 다르기에 주관의 관찰에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첫째 원인이다. 또 오관이 감각하는 것은 대상의 본바탕이 아닌 그것의 거짓 모습이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둘째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이 각기 다른바, 이것이 오류룰 범하는 세째 원인이다,'

 

  베이컨의 이 학설은 정력을 기울여 사색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난 뒤에 말한 이론이어서 <능엄경>의 교리와 적젆게 유사한 데가 있다. 그 경에 이르되, '비유컨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서 깨끗한 눈으로 갠 하늘을 바라보면, 오직 맑은 하늘만이 보일 뿐, 다른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응시한 끝에 피로해지면, 하늘에 헛것의 꽃이 보이게 된다' 하셨다. 깨끗한 눈과 피로한 눈은 곧 베이컨의 울퉁불퉁한 거울의 뜻이 된다. 이와 같이 뾰죽이 나오고 움푹 들어간 거울인 까닭에 같은 물건도 비치는 것이 달라진다 는 베이컨의 이론은, 하늘이 깨끗한 눈에는 하늘로 비치고, 피로한 눈에는 꽃으로 보인다는 경의 말씀과 같다고 할 것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몸과 감각이 둘이 다 허망하다' 하셨으니, 감각의 대상과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다 가짜 모습일 뿐 실체가 아닌 까닭에 '둘이 다 허망하다'고 하신 것이었다. 베이컨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과 한가지로 실체가 아님은 몰랐던 것이니, 이는 베이컨이 부처님만 못한 점이다.

 

  경에 또 이르기를 '한 물 속에 해 그림자가 비쳤는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를 보고 나서 각각 동서로 간다고 하면, 해도 각각 두 사람을 따라 간다. 그리하여 한해는 동으로 가고 한 해는 서로 가서 햇빛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다'고 하셨는데, 베이컨의 제3 원인이란 것도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프랑스의 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각자가 자기 나름의 믿는 바 진리가 있을 경우, 그 진리를 견지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고,자기 소신과 다른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항하여 공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고받으며 서로 토론하면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는 완전한 진리가 결국 그 사이에서 생겨날 것이다. 왜 그런가. 지혜에 고하·대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본성은 동일하며, 진리의 성질이 또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까닭이다.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진리를 구함에 있어서 힘써 이 일에 종사하는 경우, 어찌 방법은 달라도 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는 사람마다 이론이 다르다 해도 반드시 서로 웃으며 손을 잡는 날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런 이론은 <원각경>의 내용과 완전 부합된다, 데카르트가 각기 믿는 바 진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견해가 장애 노릇을 한다' 한 것과 같고, 서로 대항 공격한다 한 것은 경에서 '여러 환을 일으켜 환을 제거한다' 한 것에 해당하고, 완전한 진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궁극의 진리를 얻는다' 한 것과 일치하고, 본성은 동일하다 운운한 것은 경에서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다' 한 것과 합치하고, 방법은 다르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한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가 된다'고 한 것과 같은 취지다.

 

(출처 : http://www.manhae.or.kr/)

 


 작자 : 한용운(韓龍雲)
 형식 : 중수필(논설문에 가까움)
 성격 : 개혁적, 논리적, 설득적, 웅변적, 비판적
 문체 : 국한문 혼용체
 주제 : 낡은 습관을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고치는 것이 바로 개혁임을 역설
 특징 : 불교의 교리부터 시작하여 승단의 제도·의식, 사찰의 조직, 승려의 취처(聚妻) 문제에 이르기까지, 서론을 포함해서 모두 17장으로 이루어진 각 항목에서 당시의 한국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줄거리 : 그는 훌륭하게 유신하는 자는 훌륭하게 파괴하는 자라 하여,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는 아주 깨뜨려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낡은 습관을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고치는 것이 바로 개혁임을 역설
 구성 : 17장으로 이루어짐, 주요 내용은 불교성질론·불교주의론·불교유신 의선파괴론(宜先破壞論)·승려교육론·참선론(參 禪論)·염불당 폐지론·포교론·사찰 위치론·불가 숭배의 소회론(塑繪論)·불교의식론·사찰주지 선거론·승려단체론·사찰통할론 등

 

 유신(維新) : 폐습을 개혁하여 새롭게 함.
 접종 : 사람이나 사물이 끊이지 않고 줄을 이음. 남에게 바싹 대서서 나아감.
 등속(等屬) : 붙이의 뜻

 

 1910년 근대 승려 한용운 ( 韓龍雲 )이 불교개혁을 위하여 저술한 책. 한용운은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일대혁신을 단행하여야 한다는 의도 아래 일본의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섭취하고 돌아온 뒤, 1909년 집필을 시작하여 백담사 ( 百潭寺 )에서 탈고하였다.

 

1913년 회동서관( 霙 東書館)에서 간행하였다. 전 17장 중 1 ∼ 4장까지는 저자가 이해하고 있던 불교관을 토대로 뒤에서 전개될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밝힌 부분이다.

 

그는 ‘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 ’ 임을 예견하고, ‘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과 불교의 가르침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입각하여 있음 ’ 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의 강화,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혼인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논지는 한국불교의 모든 분야에 걸친 비종교적 · 비시대적 · 비사회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하여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여야하며, 이렇게 하여 불교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고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발휘하여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유신론은 당시의 정치적 외적 정세와 불교 내부의 완고한 보수성 때문에 무위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이 글은 ① 1930년 당시 조선불교의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관찰과 비판을 가하였다는 점, ② 전체 논문이 이론정연하고 체계가 짜여 있다는 점, ③ 불교의 장래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종교적 정열에서 솟아나온 산 글이라는 점, ④ 당시로서는 개화된 문장체인 국한문병용을 택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가장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불교의 병폐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을 볼 때 이 유신론은 아직 그 생명이 살아 있다. 그러나 유신론의 논조가 ① 극히 외형적 · 피상적으로만 승단의 병폐를 지적하였다는 점, ② 따라서 불교교리 · 사상의 근대적 해석이나 주석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 ③ 급진적 유신에 조급하여 종교교단의 근본원칙이 되는 계율의 해석과 개혁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점, ④ 조선불교의 병폐가 호국을 가장한 승단이 역대왕조와 야합한 사실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⑤ 도리어 승려의 독신생활을 왕권이나 일제통감부의 무력에 의하여 막으려고 하였다는 점 등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 참고문헌 ≫ 佛敎維新論과 佛敎革新論(韓基斗, 創作과 批評 11-1, 1976.3.), 萬海의 새 佛敎運動(金煐泰, 釋林 16, 釋林會, 197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화보로 보는 만해 일대기 (출처 : http://www.manhae.or.kr/remember2.htm)

 

 

 - 만해 관련 사이트 http://www.manhae.or.kr/index.htm

 

 

한용운(韓龍雲)  

 1879(고종 16) ∼ 1944. 승려 · 시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 ( 應俊 )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 나는 왜 중이 되었나. ’ 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 ( 五歲庵 )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 ( 百潭寺 )에서 연곡 ( 連谷 )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 조선불교유신론 ≫ 을 저술하였다.

 

1914년 ≪ 불교대전 佛敎大典 ≫ 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 채근담 菜根譚 ≫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 · 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 崔麟 )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 유심 惟心 ≫ 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 불교 ≫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 · 1독립운동 때 백용성 ( 白龍城 )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 ( 崔南善 )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 ≫ 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 님의 침묵 ≫ 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 ( 新幹會 )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 ≪ 불교 ≫ 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 ( 權相老 )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 · 기강확립 ·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 ≪ 조선일보 ≫ 에 장편소설 〈 흑풍 黑風 〉 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 조선중앙일보 ≫ 에 장편 〈 후회 後悔 〉 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 조선일보 ≫ 에 〈 박명 薄命 〉 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 ( 多率寺 )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 ( 尋牛莊 )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 ( 李始榮 ) · 김동삼 ( 金東三 ) · 신채호 ( 申采浩 ) · 정인보 ( 鄭寅普 ) · 박광(朴珖) · 홍명희 ( 洪命熹 ) · 송월면(宋月面) · 최범술 ( 崔凡述 )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불교사상〕

그의 혁신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 ( 圓宗 )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전교(傳敎)와 행정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사적 원류로 보아 일본 불교는 종파적 특색을 가진 데 비해 한국 불교는 선교 융합적 특색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 조선사찰령 〉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에 넘어갈 추세였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 규약 ·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일제의 야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 김법린 ( 金法麟 )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결실된 것이다. 비록, 대다수 승려들의 개혁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실효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탁견(卓見)이었다.

 

오늘날에는 조계종 · 태고종 · 천태종 · 진각종 등 한국 불교의 대부분 종단은 이 총무원제도와 본사제도를 병행하는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첫째로 염불당 ( 念佛堂 )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근본 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변재(遍在)한 법신불 ( 法身佛 )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둘째로 불교의식의 개혁이다. 많은 다라니 ( 陀羅尼 )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그의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취처(娶妻)이다. 생활 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 · 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 엄밀한 의미로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서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 강령을 보면,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 승려에서 대중에로 ’ , ‘ 산간에서 길가로 ’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 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그 동안 오교구산 ( 五敎九山 )이니 선교 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듯이 오도(誤導)하여왔다.

 

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 ( 禪院 )이나 강원 ( 講院 )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쓴 ≪ 불교대전 ≫ 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이 책은 요즈음에 간행되는 ≪ 불교성전 ≫ 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 결실을 보아 한글대장경 사업을 촉진시켰으며, 불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불교학 진흥을 위하여서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상적 의의〕

한용운의 대표작인 ≪ 조선불교유신론 ≫ 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9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탁월한 불교개혁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었는데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 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첫째, 사원 운영의 조직에서 염불당 및 불필요한 법당을 타파하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이상론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로도 무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오히려, 그 사상성을 고양(高揚)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단순히 지난 과오를 매도하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승려의 대처(帶妻)에 관한 주장인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청정한 교단은 독신 수행승에 의하여 주도하여온 것이 우리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취처(娶妻)를 합법화시키는 일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이른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승려의 자격 기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적절한 개혁책이었지만, 보편타당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 불교유신 ’ 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소간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었고 위대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혁신론자로서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 님의 침묵 ≫ 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 님의 침묵 ≫ 은 시 전편이 ‘ 이별-갈등-희망-만남 ’ 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 〔 正 〕 -갈등 〔 反 〕 -생성 〔 合 〕 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 못한다 · 아니한다 · 없다 · 말라 ’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 님의 침묵 ≫ 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 님의 침묵 ≫ 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 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 님의 침묵 ≫ 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 님의 침묵 ≫ 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 님의 침묵 ≫ 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 · 한시 · 가사 · 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철 ( 鄭澈 )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 사미인곡 〉 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의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 님의 침묵 〉 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 죽음 〉 · 〈 흑풍 〉 · 〈 박명 〉 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 참고문헌 ≫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해 스님 ‘조선불교 유신론’사회진화론 영향 받았다” - 김춘식 씨 만해·의상硏 발표회서 주장

1913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발표한 <조선불교유신론>은 19∼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달 22일 열린 만해·의상 연구원 월례발표회에서 김춘식(동국대 강사) 씨는 “<조선불교유신론> 곳곳에 보이는 ‘제도’의 개선과 ‘진보’ ‘진화’에 대한 피력 등에서 근대 초기 지식인 사회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씨에 따르면, 구한말 지식인들은 서구 열강이 부강한 이유를 사회진화론에서 찾았고, 그 결과 약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인 사회진화론을 근대화의 지름길을 가리키는 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스스로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강론’으로 변형돼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포교’ 항목을 보면 종교의 포교와 국제사회의 세력관계를 동일시한 만해는 서구 종교의 포교를 ‘세력’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다른 종교의 세력이 커서 불교를 압도하는 것이 어디 타종교의 죄이겠는가?’는 만해의 질문은 결국 전형적인 ‘진화론’의 생존경쟁과 우승열패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한·중·일 3국의 근대화 정책은 제도와 문물의 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조선불교유신론> 또한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제도적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김 씨는 “서구사상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변화된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불교를 건설한다는 취지는 ‘사회진화론’의 맥락에 그대로 합치되는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씨는 “진화, 진보의 합법칙성에 대한 인식이 곳곳에 보이는 반면 평등주의, 구세주의, 세계주의, 평화주의가 강하게 피력되는 점에 비춰 보면, 진화론의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를 대세로 받아들이면서도 불교정신에 기반해 그 모순점을 극복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출처 :http://www.buddhapia.co.kr/mem/hyundae/auto/newspaper/351/c-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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