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by 송화은율정천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늘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랴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시집 님의 침묵, 1926)
작가 : 한용운(1879-1944) 본명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아명 유천(裕天). 호는 만해(卍海). 용운(龍雲)은 법호(法號). 충남 홍성 출생.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며 등단. 한말에 의병운동을 했으며, 3․1 운동 당시 33인 중의 주동자로 피검되어 3년간 투옥. 승려, 급진적 불교개혁론자, 독립 지사.
그는 당시의 퇴폐적인 사조에 초연하면서, 단 한 권의 시집으로 우뚝한 시사(詩史)의 봉우리를 점했다. 그는 종교적 민족적 전통시인인 동시에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며, 그의 시는 깊은 사색과 신비적인 특성을 드러냈다. 특히 동인 활동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이고도 전통적인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특기할 만하다.
그의 전작(全作)은 『한용운 전집』(신구문화사, 1973)에 수록되어 있다. 장편소설로 「흑풍(黑風)」(조선일보, 1935), 「후회(後悔)」(조선중앙일보, 1936) 등이 있고, 이외에도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의 저서가 있다.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대립되는 두 개념, 곧 정(情)과 한(恨)이 하나가 되어 ‘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대립적 관계에서 합일적(合一的) 경지로의 이행(移行)이다. 그리고 정한(情恨)이 단순하고 어설픈 감정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로의 정신적 승화를 시도하고 있다.
▶성격 : 서정적, 관념적, 불교적
▶표현 : ① 대립적 두 개념의 대구형 배열, ② 역설법의 효과적 사용
▶구성 : ① 기 : 현실 극복 의지, 인간의 유한성의 극복 가능성 제시(제1-2연)
② 서 : 정신적 승화 시도(제3-4연)
③ 결 : 초월적, 절대적 님에게로 귀의(제5-7연)
▶제재 : 정(情) 하늘, 한(恨) 바다
▶주제 : 정한의 극복을 통해 님에게 귀의함.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정한은 한 인간의 감정의 차원을 넘어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로도 볼 수 있다. 시인이 부정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현실의 상황을 25자 내외로 쓰라.
☞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참담한 현실
2. 다음 글을 바탕으로 이 시에서의 부정의 궁극적 의미를 간략히 서술하라.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을 온 인류가 말하지만, 파괴가 없이 유신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조선 불교 유신론』중에서
☞ 정한을 극복함으로써 정신적인 승화로 이끈다.
3. (1)‘정(情) 하늘, 한(恨) 바다’와 다음 시의 밑줄 그은 시어에 쓰인 표현법을 지적하고, (2)그 효과를 50자 내외로 쓰라.
님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워서 근심 산(山)을 태우고 한(恨) 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중에서
☞ (1) 은유법
(2) 추상어와 구체어를 결합함으로써 구체어의 특징을 살려 추상어의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 감상의 길잡이 1 >
가을 하늘이 높다고 해도 그리움으로 가득찬 마음만 못하고, 깊을 대로 깊어진 봄 바다보다 가슴 속에 사무친 한(恨)이 더 절실하다. 그리는 정이 두터워지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마는 얄팍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진실하기가 힘들고, 정 때문에 깊어진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어버리기란 힘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국, 시적 화자를 포함한 인간 모두의 유한성을 지적한 것으로, 억압받는 민족 현실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사랑이 진정 이루어진다면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정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원한을 극복하여 오히려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한은 깊을수록 신비로운 것이리라.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대상이 사라지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정한이 없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상이나 마음이 없다면 존재 가치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 제기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정이 세상 어느 것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님의 초월적이고 드높은 세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리워하다 사무쳐 버린 한의 세계가 가장 깊고 절실한 줄 알았는데, 님의 심오하고 은근한 세계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대상에 대한 사모의 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원한을 모두 지워 버리고 더 나은 세상으로 승화시키려면 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님에게로의 귀의는 필연적 귀결이다.
< 감상의 길잡이 2 >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는 ‘정(情)의 하늘’과 ‘한(恨)의 바다’이지만, 그 곳은 가을 하늘보다 높고 봄 바다보다 깊어 시적 화자는 결코 갈 수가 없다. 이렇게 제 자신을 미약한 존재로 드러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숨은 의도는 ‘정천 한해’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이나 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님’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찬 마음은 가을 하늘보다도 높고, 가슴에 사무친 한은 봄 바다보다도 깊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아름답고 오묘한 것이라 하지만, 사바 세계를 헤매는 인간들로서는 그것을 실천하기 어렵고, 연모의 정으로 깊어진 원한 또한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지혜의 높이인 ‘손’이 낮고, 지혜의 깊이인 ‘다리’가 짧은 모든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가슴에 사무친 한이 사랑으로 승화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깊을수록 묘한’ 것임을 아는 시적 화자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지고, 사무친 한이 사라진다면, 차라리 ‘정천에 떨어지고 한해에 빠지는’ 절망의 질곡에서 고통받겠다고 외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제시한 것으로, 그리움의 대상이나 원한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사랑의 감정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그리움에 사무친 한이 세상 어느 것보다 깊고 절실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님’의 초월적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님’의 절대성을 인식하게 된 시적 화자는 마침내 ‘님에게만 안기는’ 완전한 귀의의 방법을 통해 정한(情恨)을 극복하고 ‘님’의 초월적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 시는 대립적 개념인 ‘정(情)’과 ‘한(恨)’이 하나로 통합되어 ‘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로 귀결되는 과정 즉, 대립적 관계에서 합일적(合一的) 경지로의 이행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유한적 정한의 세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초월적 세계로의 승화를 꿈꾸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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