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인권의 혁명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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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혁명

 

역사적 의미란 언제나 혼란스럽고 다의적이며 이중적일 때가 많다. 하지만 20세기에 인간에게 '혁명'이란 단어만큼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없을 것이다. 1989, 프랑스 혁명 2백돌을 맞이했을 때 또한 그랬다. 그 해,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적어도 프랑스에선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언제나 좌, 우로 분열되어 주기적으로 혁명의 물결에 휩쓸리곤 했던 프랑스가 2세기에 걸친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중도적인 공화정'에 안착하였다는 것이다.

 

그 즈음 우리 사회의 운동권에서도 군사 독재의 청산 및 민주화와 관련하여 혁명과 계급 정치의 담론에 미묘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것도 '혁명의 종언'을 축성하던 바로 그 여름부터 공구의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혁명이냐에 관해서 아직도 논의의 소지가 남아 있지만, 정치 계급의 교체라는 면에서 혁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20세기를 마감하는 지금, 과연 일부의 인사들이 주장하듯이 혁명의 시대가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을 '이상적인 혁명상'으로 생각했다. 두 혁명 모두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대규모 사회 혁명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는 혁명가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고,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혁명의 동력 앞에서 '혁명을 끝낸다'라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반면에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기존 국가 권력의 붕괴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일단의 직업 혁명가들이 준비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그 과정을 통제하려고 했던 최초의 '의도적인' 혁명이었다.

 

우리가 보통 20세기를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혁명 일반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징후를 판별케 해주는 혁명에 관한 특정한 담론을 말한다. 즉 혁명의 신화를 말하는 것이다. 기존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불편부당함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혁명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던 혁명의 거대 신화는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계몽 사상의 기획'의 종말론적인 구현으로서의 의지주의, 생산 양식의 교체까지 겨냥하는 사회 혁명, 국가 권력의 탈취를 통한 전면적인 폭력 행사, 강력한 혁명 전위와 광범위한 계급 기반을 묶는 혁명 전선의 구축,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 혁명은 단순히 구체제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와 인간을 빚어내는 진보의 담지자이며, '자유의 왕국'을 꿈꾸는 일종의 역사 신학이 되는 것이다.

 

혁명을 일종의 신화로 보았다는 점에서 지금 현재는 이미 혁명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20세기를 풍미했던 혁명의 신화는 1968년의 5월 혁명과 19891992년의 '동구 혁명'을 통해 여지없이 추락했다. 물론 그러한 혁명들이 얼마간 역사 속의 인간에 대한 좀더 면밀하고, 잠재된 면을 표출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또한 동구권이라는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를 사회주의 이념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자체의 몰락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역사적 전망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현상황에서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이데올로기로서 그 호소력을 상실했음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그에 따라 적어도 지금은 현재의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이며, 몇몇 논자의 말대로 자유 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종착점"이자 "인간 정부의 최종적 형태"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혁명 신화는 분명 역사에서 종언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 또 한편으로는 역시 다른 종류의 역사 신학에 입각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혁명의 신화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 혁명적 동력의 소진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혁명은 종종 구조적인 요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움을 이룩해왔다.

 

역사는 언제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며, 문제의 해결은 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있었던 주요 혁명들, 예컨대 위의 두 혁명을 포함하여 영국 혁명, 미국 혁명, 중국 혁명, 쿠바 혁명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국민 국가의 형성 과정 중에 전통 사회에서 벗어나 중간 수준의 근대화에 처해 있던 시점과 나라에서 일어났으며 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수공업 노동자와 농민층이 주된 혁명 세력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의 성격, 사회 세력의 역학 관계, 국가 형성 과정의 차이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가 국민 국가와 근대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적인 길'을 밟지 않았다고 해서 근대화의 충격을 약하게 받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길이 일시적으로는 더 큰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그 규모를 축소했던 것이다.

 

이렇게 다소나마 거칠게 일반화해 볼 때,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의 기반 위에서 안정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 일부의 나라를 제외하고 한때 '3세계'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고, 그 정확한 시점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혁명의 예방을 위해 미국의 사회과학계가 구축해왔던 '혁명의 예언학' 1978년에 일어난 이란 혁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세계' '2세계' 역시 '동구 혁명'이 보여주듯 혁명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 형성 과정이 유난히 늦은 발칸 반도나 유럽의 주변부에서 '국민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농후하며, 유럽의 중심부조차 그 충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구 혁명이 '인권'을 구호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인권의 혁명'을 주창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을 넘어 시민 혁명의 원점으로 돌아가겠다는 보수적인 회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권이란 자유권, 사회권, 환경권, 심지어는 생물학적 실험에 대한 통제나 유전자 조작에 대한 항의 등 삶의 존재 양식에 따라 크게 확정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불안정성과 반인간성이 인권의 구호와 결합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의 황혼에 서서 혁명의 신화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예측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혁명의 흐름을 풍요한 인간적 삶을 돋우는 방향으로 길들이는 일은 차라리 새로운 세기에 주어진 당위이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공통적으로 혁명에서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해방이었고, 그런 점에서 인권의 보장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갈망은 그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까지 이르는 '인권의 혁명,' 이것이 하나의 대안으로서의 방책이 될 수 있다. 인권의 확장과 발전은 잔혹한 전쟁검은 무기 거래, 환경 오염, 기아, 보편적 패배주의로 찌든 세기말의 어두움을 가르는 진보의 역사적 징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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