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방인 / 해설 / 까뮈

by 송화은율
반응형

 

이방인 / 까뮈  


평범한 월급쟁이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하며, 희곡 영화를 본 뒤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친구와 말다툼을 하고 있던 아라비아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한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지만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재판관에게도, 검사에게도, 변호사에게도, 나아가서는 모든 일상사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판결은 사형이었다. 그는 재판도, 세상도 얼마나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를 느끼고 교화신부(敎化神父)도 거부한 채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사형날을 기다린다. 사형집행의 전날 밤  '과거에도 행복했지만 지금도 역시 행복하다'고 말하며 '증오심을 발하여 자기의 사형 집행을 보기 위하여' 단두대 둘레에 많은 군중이 모여 줄 것을 원한다. 그리고 독방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별빛 찬란한 하늘, 자연,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대한 무관심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방인》은 그리 긴 소설은 아니지만 상당한 기간을 두고 구상되고 집필된 것으로 여겨진다. 카뮈의 '비망록'을 보면 1935년 5월부터 벌써 '여러 해를 비참하게 살고 난 다음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이는 야릇한 감정'이라는 것을 적어 놓았고, 1936년 1월에는 간결하게 적혀 있는 여섯 개의 이야기 속에 사형수의 이야기가 나오며 또 한두 부분이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갖추도록 소설이 구상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39년에 완성되었으나 포기하고, 1971년에야 사후 발표된 습작 《행복한 죽음》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카뮈가 항상 매혹된 우주의 두 가지 위대한 힘, 바다(mer)와 태양(solei)을 합성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되며, 그 후신이 바로 《이방인》의 뫼르소인 것이다. 1936년 3월에는 벌써 '비망록'에 중요한 주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월의 기록에는 《이방인》이라는 제목까지 찾아낸 흔적이 있다.

1938년 5월에는 마랑고의 양로원에 은퇴한 노파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1940년에는 살라마노와 그의 개 이야기가 나오며, 5월에는 '이방인은 끝났다'는 말이 적혀 있다. 카뮈 자신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 책의 의미는 두 부분의 대응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똑같은 살인 이야기를 제1부에서는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제2부에서는 사회가 판단하는 것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사회는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나타내 보이고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근신 기간을 두었다가 여자 친구와 관계를 맺어야 하며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싶어한다는 시늉을 해 보이고 여자 친구에게는 빈 말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시종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아랍인과 시비를 벌이고 있으며 별로 떳떳하지 못한 직업에 종사하는 아파트의 이웃 사람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리쬐이는 태양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을 사살하게 된다. 이 우발사고는 일련의 비합리적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재판에서는 살인이 계획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유죄 또는 무죄의 판결이 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검사가 밝혀 낸,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인 감정적 반응과 장례식 직후의 뫼르소의 행동은 사회가 위험시하고 충분히 적대시할 만하다. 따라서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린다. 뫼르소 자신은 전에 자기가 저지른 행동과 검사가 법정에서 재구성한 자신의 범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찾아낼 수 없어서 마치 방관자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본다. 일단 사형선고가 내리자, 뫼르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해 있는 상황의 부조리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이에 반항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카뮈가 《이방인》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와 같은 부조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이며 가장 신랄한 고발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이방인》은 '건조하고 깨끗한 작품, 외관상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잘 짜인 작품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사회적·정신적으로 혼란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양차대전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관은 급변하였고, 사람의 목숨이란 그렇게 귀중하지 않은 것처럼 수없이 죽어 갔다. 《이방인》이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로써 세계적으로 실존주의 작품의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이방인》이 현대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애독되는 것은 그것이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의 굴욕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의 작가

전후 프랑스 문학에 있어 최대의 존재는 사르트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에게 사르트르보다도 카뮈가 더욱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의 성실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카뮈에게 '신(神)없는 성인(聖人)' 또는 '현대의 증인'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부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타계하기까지 업적을 다시 한 번 살핀다는 것은 곧 우리들 자신의 고민과 희망과 위대성을 재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콩스탕틴 현 몽드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다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머니 카트린 생투아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두 아들  뤼시앵과 알베르를 기르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알제리 시의 서민들이 사는 동네 벨쿠르에 있는 친정 어머니의 아파트로 가서 배우 출신의 오만한 늙은 친정 어머니와 포도주 통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거의 벙어리와 다름없는 남동생과 함께 방 두 개에 다섯 식구가 사는 가난한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품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빈곤을 견뎌 나갔다. 후에 카뮈가 "내가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술회했듯이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카뮈는 고향에 대해서 일평생 변함없는 사랑을 바쳤다.

카뮈는 1918년에서 1923년까지 초등학교 과정에서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어 담임교사 루이 제르맹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담임 교사가 그에게 특별히 개인지도를 해 주기까지 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이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 카뮈는 이 책을 옛 스승에게 바쳐 깊은 감사를 표명했다.

1923년에서 1930년까지 알지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축구팀에서 골기퍼로 활약하면서 운동에 열중했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에 폐결핵의 첫발작이 일어나서 좋아하던 운동을 단념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에서 1936년까지의 대학생활에도 적지 않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철학자이며 교수인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어 그의 영향을 받고 철학과 문학에 뜻을 둔 사실이다. 이 스승과 제자간의 우정은 평생을 두고 꾸준히 계속되었다.

한편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만에 이혼하고 공산당의 회교도 해방운동에 공면하여 알지에 지구 공산당에 입당한다. 거기서 그는 공산당의 회교도에 대한 선전을 맡게 되지만 곧 당의 정책 변경에 싫증을 느껴 탈당,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알지에 대학교의 학생시절에 그는 장학금을 받았으나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대학의 기상반에 들어 남부 지방의 기압 상태 조사에 참가하기도 하고, 자동차의 부품 판매원 노릇도 하고,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현청의 사무원 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순수한 대학생활에서는 해볼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했다. 이렇게 힘들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지드, 말로, 몽테블랑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로 여행을 했고, 알지에 문화관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특히 연극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극단을 꾸며서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연출도 했으며 말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각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수필집 《표리(表裏)》를 쓰기 시작하면서 정치극 《아스튀리의 반란》을 공동집필했다.

1936년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통해 본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쓴 졸업논문 <그리스도교와 신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이 통과되었다. 이 시기의 카뮈는 앙드레 말로에 관한 평론을 쓰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다. 당시의 대학교수 자격시험 응시는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17세 때 앓던 폐결핵 재발에 시달려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단념했다. 졸업 후에는 파스칼 피아의 추천으로 극좌파의 기관지인 일간지 「알지에 레퓌블리캥」 신문사에 입사하여 잡보기사에서 논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기사를 쓰면서 여론의 옹호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해 나갔다.

1938년에는 인생과 자연의 결합을 주제로 한 서정적 에세이 《결혼》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알제리 풍경의 강한 인상을 정열적으로 그리고, 반짝이는 대낮의 태양을 쬐며 미지근한 바닷물에 잠겨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는 인간의 희열(喜悅)을 그렸다. 이 싱싱한 청춘의 노래는 그보다 한 해 전인 1937년에 나온 최초의 수필집 《표리》와 죽은 후에 출판된 수첩 1 <태양의 찬가>와 함께 그의 지중해적인 사상과 감정의 형성을 보이는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카뮈는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했으나 건강 상태가 나빠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0년에는 오랑 출신의 처녀 프랑신 포르와 재혼한다. 그들 사이에는 나중에야 아들 딸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 해 「알지에 레퓌블리캥」에 카뮈가 집필한 북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기사가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서 카뮈는 알지에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파스칼 피아가 추천하여 「파리 수아르」신문사의 기자로 입사하여 1941년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이 때 《이방인》을 탈고하여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 있었다.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가 탈고되었으며 1942년 갈리마르 출판사를 통해 《이방인》을 출간하는 한편, 말로, 지드, 사르트르 등과도 사귀었다. 당시에 그는 「콩바」지에 관여하며 독일군 점령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때 비밀리에 출간된 《이방인》은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발표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보다도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방인》은 현대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처져 있는 모순과 현대인의 생활감정 가운데에 잠긴 부조리(不條理)의 의식을 명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며. 고독감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 형식으로 해설한 《시지프스의 신화》와 함께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하여 일약 카뮈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카뮈는 빈곤과 병고를 철저히 체험한 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관념에 위협당하며 생과 사, 자신의 세계와의 모순, 대립에 괴로워했다. 자연 속에 묻혀 있을 때에도 도취와 불안을 깨닫고, 사회에 있어서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숙명적인 부조리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의 사색과정으로부터 인간은 생과 사의 모순사이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여 죽음이  있음으로써 삶에 가치가 있고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논했다. 삶에의 절망이 없이는 삶에의 희망도 없다. '부조리의 철학'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인간은 싸우고 반항하면서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사상이다. 커다란 바위를 이를 향해 끝없이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사형대에 오르는 《이방인》의 뫼르소는 카뮈가 창조한 이 부조리의 인간 전형,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카뮈의 부조리의 사색은 전쟁, 점령, 수용소, 저항 운동 등 극한상황 속에서 보고 들은 것과 체험에 의해서 더욱 다듬어진다. 그 이후 그는 폭력과 부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비참한 경지에 빠뜨리며, 인간성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더럽히는 등의 사태에 의연히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콩바」지의 파리 주재 기자로 있으면서 갈리마르 출판사의 교정위원으로 입사하고 「콩바」지의 지하 발행을 꾀하는 한편 《독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밀 간행한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그 동안에도 작품은 쉬지 않고 발표했다. 1944년에 발표된 희곡 《오해》는 고향의 암담한 잿빛 생활을 피하여 남쪽의 밝은 빛을 미치도록 동경하는 여인 마르타의 범죄를 그린 것으로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945년에 제라드 필라프가 주연을 맡아서 공연한 《칼리귤라》가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희곡작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게 되었다. 《칼리귤라》는 숙명에 반항하여, 사회의 관례와 도덕에 역행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다 자멸하는 폭군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장편 《페스트》가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이방인》 이상으로 카뮈의 명성을 높였다. 이 작품이 간행된 며칠 후에 '비평가 상'이 수여되었을 때 이 때문에 이 상도 유명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정도로 《페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는 사회악에 도전하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부조리의 체험과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을 절멸시키는 악과의 투쟁을 우의(寓意)적으로 다루었다. 카뮈는 전쟁 반대, 사형 반대의 입장에 섰으며, 특히 전쟁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이나 사상범의 극형에 반대했다. 이 소설에서는 이제까지와 같은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개인적인 저항이 아니라 집단적인 반항이 그려져 있다. 페스트 균에 의해 한 도시가 봉쇄되어 유언비어가 나돌고 암시장이 번창하는 상태는 바로 전시의 파리이고, 선의의 사람들이 괴질과 싸우다 쓰러져가는 광경은 전시의 저항운동이나 혁명기의 내란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 소설의 우의(寓意)는 장소나 시간을 초월하여 각국의 유사한 사건에 적용되고, 여기에 그려진 동지적 연대감과 희생적 정신에 의한 행동은 숱한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카뮈는 이 작품의 성공으로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부각되었다.

계속해서 발표한 《계엄령》은 같은 주제를 극화한 희곡이며, 평론 《반항적 인간》은 근대의 니힐리즘의 비판이며, 그것에 대한 반항을 논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반항은 결코 혁명적인 행동이 아니라 차라리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여, 극좌(極左)와 극우(極右)의 절대주의에 굴하지 않고 항시 폭력을 부정하며 중용을 터득한 수단을 사용하는 끈질긴 저항이다. 무신론자인 그는, 신을 절대시함으로써 인간다운 자유와 희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마찬가지로 역사를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스스로를 절대시하는 사상적, 예술적 니힐리즘에도 반대한다. 혁명가는 결국 권력을 동경하여 압제자가 되지만, 반항적 인간은 정의를 바라고 인간성을 존중하며 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즉 그에 있어서는 내일의 정의를 위해서 오늘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희곡 《정의의 사람들》 가운데의 테러리스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명가들과는 달리 폭군을 암살하는 경우에도 죄없는 사람이 말려들 위험이 있으면 그 행동을 단념한다. 여기서 그와 같은 반항적 태도는 자기기만이며 소극적인 것이라는 장송의 비난을 계기로 사르트르와의 사이에 사상적,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져 10년 가까이 계속된 두 사람의 우정은 깨어지고 말았다.

격렬한 논쟁을 치르고 나서 카뮈는 몇 편의 번안극을 발표했을 뿐 문학, 정치면에서 몇 해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인간의 비참에 대항하는 운동에는 적극 참여하여 1954년에는 7명의 튀니지아 인 사형수 구호운동에 서명하고, 1953년의 동베를린 폭동, 1956년 10월의 부다페스트 봉기 때에도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그러나 카뮈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시련은 그 후에 일어난 알제리 전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의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알제리 전쟁 때는 가능한 한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모두가 그의 '반항적 인간'으로서의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알제리 문제에 대한 1939년에서 1958년까지의 카뮈의 태도는 《시사론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4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1956년에는 '반항적 인간'의 논리를 거꾸로 써서 그린 풍자소설 《전락》을 발표했다. 이어서 1957년에는 단편집 《추방과 왕국》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카뮈는 많은 소설, 희곡, 수필집을 발표하고 사르트르와 더불어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57년 10월 17일 카뮈의 전작품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이 때 카뮈의 나이는 44세였고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최연소자였다. 같은 해 12월 10일 수상식 석상에서 행한 연설에서 카뮈는 '나로서는 내 예술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나를 어느 누구와도 갈라 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내가 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태도를 밝혔다.

카뮈는 새로운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의 구상을 마치고 집필을 시작했을 때, 프로방스 지방의 루르마랭에 있는 소유지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1960년 1월 4일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친구 미셀 갈리마르가 운전하던 차가 파리 동남방 몽트로의 빌르블레뱅 근처 르 그랑 프로사르에서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다. 이 때 카뮈의 웃옷주머니에는 파리 행 비행기표가 들어 있었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