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 해설 / 민희식
by 송화은율
적과 흑(스땅달) / 해설 / 민희식
우리는《적과 흑》의 소재를 스땅달이 1827년에 도피네 지방에서 일어난 베르데 청년의 살인미수 사건에서 얻었으며, 이 소설에〈1830년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잇는 것을 보아도 왕정복고시대에 대한 스땅달의 정치적 견해가 여기에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행복에의 탐구라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한 개인으로서 특정한 시대환경을 초월하여, 인간의 본질적인 과제인 에고티슴에 관한 멋진 고찰도 볼 수가 있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앙은 제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난폭한 아버지와 형들에게 학대받으며 자라난다. 그는 나폴레옹을 열렬히 숭배하면서도 노 사제 셸랑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고, 마음에도 없는 성직에 들어가고자 한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빈민도 재능만으로 출세할 수 있었지만, 왕정복고시대에 있어선 성직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쥘리앙은 돈과 명예밖에 모르는 지방의 귀족 티를 내는 부류를 경멸했다. 물질보다 정신세계에 사는 시골청년으로서의 쥘리앙은 레날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돈 많은 귀족청년들이 이기주의나 허영에 비해 〈성실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마띨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두 여성을 대상으로 사랑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쥘리앙은 그가 멸시하는 지배계급에 대하여 복수를 하는 것이다. 레날 부인에 대한 사랑도 따지고 보면 그가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의 주인인 레날 씨에 대한 반발에서였다고도 볼 수 있다.
레날 부인은 이러한 그의 마음속을 헤아리지 못한 채 행복감에 젖는다. 그녀는 신앙심·부덕·모성애 때문에 자책하지만 한편으로는 쥘리앙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쥘리앙은 괴로워하는 여성에게서 영혼의 위대성을 발견했다. 레날 부인은 비록 자기 마음속에선 갈등을 일으키지만 쥘리앙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헌신과 애정으로 대하였다. 쥘리앙은 후에 마띨드 라 몰 양과의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레날 부인에 대한 참된 사랑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우리는 이 작품에 나타난 두 번의 연애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쥘리앙의 행복 탐구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알게 된다.
쥘리앙과 마띨드와의 연애 관계는 호감보다는 반감에서 시작되고, 두 개의 자존심의 상극과 친화력으로서 나타난다. 즉, 마띨드의 오만한 성격에 기분이 상한 쥘리앙의 자존심은 이 여성을 정복하는 데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띨드가 지적 연애, 즉〈머리로써 하는 사랑〉의 여성인데 비해, 레날 부인은 정적인 연애, 즉〈마음으로 하는 사랑〉의 여성으로 나타나 대립하게 된다. 어느 날, 마띨드는 쥘리앙과의 대립관계를 사랑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명료하다, 이 나이에 재능 있는 젊은 아가씨가 사랑이 아니고는 어디에서 자극을 구할 것인가?" 하고 그녀는 외친다.
이 구절은 마띨드의 사랑이〈두뇌의 사랑〉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랑하는 가능성이지 사랑한다는 사실은 아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연인을 모색하고 있었으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물론 쥘리앙은 그녀의 계급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여기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이나 역사적 인물을 상상하여 루이 13세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관념 속에서 영웅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은 극복해야만 할 장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남성인 쥘리앙에게서 이러한 영웅적인 면을 발견했을 때, 그러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그 장애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결정작용이 일어난다.
그녀는 왕정복고시대의 특권계급의 청년과 대비시켜서 쥘리앙의 개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는 나를 사랑하는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쥘리앙은 자기의 지위에 대한 열등감에 마띨드 주위의 젊은 귀족들에게 시기심을 갖게 한다. 또한 마띨드는 자기의 구혼자 앞에서 쥘리앙에게 호의를 보여 그들이 쥘리앙에게 적개심을 품게 만든다. 그 때문에 쥘리앙은 궁지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에 골몰한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위험한 공상 속에 빠지게 되고, 그 자신의 행동이 더욱 소심하게 되자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비상한 용기로 바뀌어서 나타나게 된다.
쥘리앙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에스파뇰리슴〉의 전형으로, 마띨드는 그의 내부에 도사린 공포병이나 소심함보다는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 즉 영웅적인 행위만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은 쥘리앙으로 하여금 "이것은 레날 부인 곁에서 발견한 영혼의 기쁨은 아니다. 여기에서 애정이 깃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말하게시리 한다. 왜냐하면 마띨드가 쥘리앙을 사랑하는 것은 귀족이 평민을 사랑하는 행위로, 거기서 그녀 자신의 영웅심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자존심에 만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영웅적인 행위를 감행하는데 있어서 마띨드가 세상 일반의 사고방식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데 그처럼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전통과 인습으로 굳어진 상류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문제는 그녀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난다. 또한 쥘리앙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신의 결정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이 청년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쥘리앙 자신이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를 위장하는 것은 자기의 낮은 신분과 가난함에 대한 열등감에서인 동시에 자기도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결국 쥘리앙에 대한 레날 부인의 사랑이 자연스럽고, 헌신적인 기분에서 나온 것과는 정반대로 마띨드의 사랑은 정복된 노예가 할 수 없이 정복자에게 끌려가는, 반발로 가득 찬 사랑이다.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열렬히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경멸하는, 소유와 욕망의 갈등 속에서 자존심을 괴롭혀 대는 것이 바로 쥘리앙과 마띨드의 사랑이다. 이전에는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도 없지만, 재능이 특출한 쥘리앙의 존재가 마띨드의 자존심을 만족시켰으나, 결국은 이 두 요소가 분리되면, 거기엔 그저 야심 많은 천한 계급의 청년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마띨드는 그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선 쥘리앙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러나 때로는 하잘것없는 쥘리앙의 모습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 후 다시 냉담해져 버린 마띨드로부터 자존심을 상한 쥘리앙은 스트라스부르로 떠난다.
그때에 그는 그곳에서 코라소프 공작을 마나 마띨드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도를 받는다. 코라소프 공작은 그에게 자존심을 바탕으로 한 결정작용을 잘 구사하라고 가르쳐 준다. 마띨드라는 여성이 그를 이미 자기의 것이 되어 버린 것으로 경멸하고 있다면 그 역으로 그의 애정을 불분명한 상태에 두어 그녀를 불안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가 불안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 페르바끄 원수 부인에게 접근하는 시늉까지 한다.
마침내 마띨드는 자존심에 얽힌 결정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쥘리앙 스스로가 원수 부인과의 사랑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더욱 질투심이 솟은 마띨드는, 그의 멸시를 받았다는 패배감에서 그의 위대성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쥘리앙이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은 역시 오랜 내면적 갈등을 그가 용케 견디어 낸 데에 있었던 셈이다. 이리하여 쥘리앙은 여인의 마음을 조정하는 데 성공하고, 마띨드에게서 사랑의 보증을 얻는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마띨드는 그를 미칠 듯 사랑하고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그에게 높은 신분과 부를 주려고 한다. 하나 마띨드를 완전히 소유한 쥘리앙은 명예심에 사로잡혀 사랑을 잃어버린다.
이 두 사람의 모험적인 결혼이 이루어지려는 때, 쥘리앙을 비방하는 편지가 레날 부인으로부터 도착한다. 이에 화가 난 쥘리앙을 교회로 달려가 기도를 드리는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타인(사회)과 자기를 대립시켜 살아 왔던 쥘리앙은 감옥에 갇힌 뒤,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된다. 즉, 세속인의 눈, 타인의 눈, 적의 눈, 신부의 눈을 피해 자기 자신과의 대결 속에서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죽음 직전에 있는데도 아직도 위선가이다. 위선을 저주하면서 왜 위선을 가장하는가?"
여기서 쥘리앙이 자기의 위선을 지적한 것은 자기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과 <두되>의 대립이다. 쥘리앙은 사회적 존재로서 외부세계와의 연관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이고 유물론자이며 반항자이지만, 자기 자신과 대결할 때는 자기가 진실하게 살지 못하고 참된 사랑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는 <심정>의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울부짖으며 레날 부인을 찾았던 것이다.
쥘리앙의 생애는 이처럼 외면적·물질적 행복, 파리·미녀·지위·명성·돈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어, 외부세계와 격리됨으로써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에 도달했던 것이다.
스땅달 자신의 생애도 쥘리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정신, 외면에서 내면을 향한 행로였고, 언제나 외면적 행복은 그에게 내면적인 불행을 가져오는 까닭에 이 갈등을 이겨가면서 끝까지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물론 《적과 흑》은 그 밖에도 많은 연구를 위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아라공은 《적과 흑》이 쥘리앙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며, 뛰어난 정치풍자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1822년에서 1829년까지의 《영국 통신》에 나타난 스탕달의 지적 형성이 《적과 흑》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지면 관계로 《영국 통신》과 《적과 흑》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회변화에 대한 고찰, 사회계급의 분석, 반교권사상 등 정치·사회사상에 대하 스땅달의 탁견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1820년대 이후의 프랑스의 소설, 즉 연애심리소설·공포소설·유머 소설·역사소설 등에 대한 비평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시대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연대기로서의 《적과 흑》의 새로운 가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스땅달은 《적과 흑》을 쓸 당시 정신적으로 국적을 잃은〈망명자〉의 위치에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코자 한 것이다. 그것은 복수욕과 분노에 불타는 패자의 반역 정신, 몰락 의식과 체념주의에 입각한 패자의식이 아니라 총명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겸비한 진보주의의 반항적인 패자의식인 것이다.《적과 흑》의 부제〈1830년 연대기〉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제주이트파와 망명 귀족을 규탄하고 그들의 악에 대한 민중의 노여움을 그려내고자 한 점이 있어 7월 혁명을 일으킨 민중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쥘리앙이 공판에 있어 배심원들을 향해서 퍼붓는 증오의 말에 주의해야 한다.
"배심원 여러분!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이 같은 것은 문제 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경멸을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저는 불행하게도 여러분의 계급에 속한 영예를 갖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바처럼 저는 자기의 신분이 천한 것에 반항한 일개 촌뜨기에 불과 합니다‥‥‥저는 조금도 여러분의 후의를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즉,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저를 처벌함으로써 본인과 같이 하층계급에 태어나 빈곤 속에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다행히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대담하게도 부자들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신분도 깨닫지 못하고 감히 발을 들여놓으려는 청년들의 의기를 완전히 꺾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피압박계급의 무력한 노여움이 반역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말은 왕정복고시대에 훌륭한 교육을 받고도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한 청년의 발언이며, 보수적이고 어리석은 사회풍조와 타협하여 위선이라는 무기를 역이용하여 출세하고자 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한 패자의 발언이다.
한편 자기가 자기를 꾸준히 형성해 나가는 쥘리앙의 사고방식은 실존주의 문학의 하나의 선구자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830년대를 묘파한 걸출한 정치사회소설
스땅달(Stendhal)은 혁명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783년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앙리 베일(Henri Beyle). 부친 셰뤼벵 베일은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변호사로 돈만 아는 저속한 남자였다. 7세 때 어머니 앙리에뜨를 잃은 스땅달은 그의 부친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모 셰라피에게 양육되다시피 했지만 그는 평생 그녀를 미워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앙리 브륄라르의 생애(Henri Brulard)》에서 그는 그녀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발코니에서, 화분 속에 씨앗을 심으려고 흙을 파다가 칼을 떨어뜨려 지나가던 노파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모 셰라피는 그가 노파를 죽이려 했다고 단언했다. 이 일은 그의 마음속에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또한 자기의 어린 시절의 교육을 맡았던 라얀느 신부도 그의 부친, 이모와 함께 스땅달이 매우 싫어했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반면 그는 어머니 쪽 친척인 가뇽 가의 사람들을 좋아했고, 또 그들에게서 많은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스땅달에게 18세기적인 합리주의 사상을 심어 주었고, 외삼촌 로망 가뇽은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외종조모 엘리자베스 가뇽은 고매한 영웅주의적 에스파뇰리슴을 심어 주었다.
그의 생애를 대충 훑어본다면, 17세에 나폴레옹 군대의 소위로 활약, 19세에는 극작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 22세에는 여배우 멜라니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수입 식료품상의 점원생활, 27세에는 나폴레옹 제정의 참사원 서기관생활, 29세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에 종군, 31세에는 나폴레옹과 함께 몰락한 후 문필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휴직 군인, 38세에는 사랑에 열중하나 연인으로부터 당한 실연의 연속, 43세에 작가생활, 48세에 다시 관직으로 들어가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영사를 지낸다. 이와 같이 스땅달은 다채로운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특히 181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실직한 스땅달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이주해서 1821년, 이탈리아 해방운동(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 공명하고, 오스트리아 정부를 비방하는 말을 했던 까닭으로 추방명령을 받는다. 이 시기, 즉 1814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하기 전해인 1821년까지가 스땅달의 생애에서는 가장 특이할 만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국의 여러 잡지에 반정부적인 논문인《프랑스 통신》을 쓰면서《연예론(De l'Amour)》,《적과 흑(Le Rouge et le Noir)》등 걸작을 발표한다. 7월 혁명 후 트리에스테 영사로 임명되나 메테르니히에게 거부당해 법왕령 치비타비키아의 영사로 지낸다. 1836년 파리에 돌아온 1842년 3월 22일, 길가에서 졸도하여 의식을 잃은 채 그 이튿날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탐구했다.
친척인 나폴레옹 정부의 고관 삐에르 다뤼의 권유로 입대한 용기병 장교의 직업을 버리고 스땅달은 문학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몰리에르와 같은 희곡을 쓰면서 파리에서 사는 것이 소년시대의 꿈이었던 그는 훌륭한 희곡을 쓰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잘 알려고 노력했다. 정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인간을 잘 모르고는 숭고한 경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프랑스의 감각론적 유물론자인 꽁디약과 에르베쉬스, 카바니스 등 관념학파(감각을 인식의 기초로 하는 학파)의 저서에 대한 탐독에 열중했다. 특히 에르베쉬스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이때에 스땅달의 기본적인 사상형성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희곡작품을 쓰기 위해서 철학 연구나 연극의 이론을 공부하였는데, 비록 이 방법은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연구는 인생의 다른 면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왜냐하면 후에 나타난 스땅달의 모든 작품 속에는 더 완성된 형태로 더 멋지게 그 사상이 개화되었기 때문이다. 또 스땅달이 인생에 있어서, 행복 추구의 기본 개념을 거의 완성시킨 것도 그 연구 덕분인 것이다.
그후에 스땅달의 사상은 평생토록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나의 정신생활은 몇 개의 중요한 관념을 주의 깊게 고찰하고, 그 관념에 입각하여 진리를 보기 위해서 일생을 보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사상의 경력엔 어떠한 위기나 비약적인 발전은 없지만, 그 대신 자기가 그려낸 사상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충실성이 깃들여져 있다. "나는 어제 찬양한 것을 오늘도 찬양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처럼 자기가 걷는 길을 절대로 바르다는 강렬한 신념이 스땅달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변화가 아니고 깊이 파고드는 일이었다.
그럼 스땅달이 깊이 파고들고, 끝까지 추구했던 행복이란 무엇인가.
"물체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한 것은 느껴지는 것뿐이다." 이 말이 증명해 주듯 스땅달에 있어서, 행복이란 감각의 세계와는 유리된 형이상학이나, 신비적인 추상관념이 아니라 감각의 기쁨, 말하자면 쾌락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사실 쾌락은 여러 가지 사회적·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스땅달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사회에 종속적 존재(아부하는 인간)가 되지 않고, 사회나 타인을 태연히 무시하고 자기의 내부세계에서 이 감각의 기쁨을 찾아내려 하였다. 향락주의자로서 그의 위대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겠다. 감각의 기쁨을 자기의 내부에서 극도로 승화시켜 마침내는 영혼의 전율의 경지까지 자신을 높여 간 것이다. 그리고 사회나 타인의 구속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주체적인 행복을 그는 연애의 세계에서 발견했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행복의 추구는 논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몰두한 것도 수학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위선과 애매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이 수학에 대한 열정이 그를 명확한 논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인생의 거의 모든 불행은 우리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인간을 철저하게 알고,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행복을 향한 가장 튼 진보이다."라는 그의 말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론으로는, 첫째로 인간의 마음을 아는 것, 둘째로 올바른 진리, 또는 논리가 불가결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위대한 극작가가 된다는 예술적인 필요에 의해서, 또 행복해져야겠다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서도 인간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스땅달에 있어서는 절대의 전제조건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마음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는《에고티슴의 회상(Souvenirs d'egotisme)》속에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알 수 있다"고 탄식을 하고 있다. 인간을 알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해야만 했던 스땅달의 생애는 이러한 객관적인 자기 분석에 의한 끊임없는 자기 연마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지성의 냉정한 거울에다 자기의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비춰 보고, 그 감정이 비록 제아무리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두려움이 없이 면밀히 그것을 기록하는 훈련을 되풀이하는 인간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숨은 진실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스땅달 작품의 생생함 심리 묘사도, 작가 자신의 철두철미한 자기 의식의 노력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는 한 방법으로 그는 에코티즘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에고티즘이란 과잉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에 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스땅달 자신도 일종의 에코티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일기》《서간집》《에고티슴의 회상》《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그 밖의 수많은 노트 등, 자기에 대해서 쓴 많은 작품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자기 탐구를 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스땅달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작품이 읽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가 1880년이나 1935년에는 많이 읽힐 것이라고 예언한 것도 그의 작품이 선구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외할아버지의 동생이었던 외종조모에게서 물려받은 에스파뇰리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835년 9월, 그의 나이 52세 때 스땅달은 알바노 호숫가를 거닐면서 모래 위에 12명의 여인의 첫 글자를 썼다.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들은 나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스땅달에게 있어서 연애란 인생 최대의 관심사였다. 사랑을 통한 행복 없이는 입신 출세도, 재산도, 쾌락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사랑을 가르친 교사는 그의 외삼촌 로망 가뇽이다. 그는 그르노블의 유명한 멋쟁이로 수많은 미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외삼촌의 품행은 스땅달의 연애행각에 있어서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 스땅달의 성격은 겁이 많고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심증 체질로, 그가 배웠던 사람의 패턴과 그의 소심증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연애 사건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818년 밀라노 사교계에서 알게 된 마띨드 뎀보스키와의 열애 사건이다. 1821년, 밀라노를 퇴거할 때까지 그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의 가슴속에서 점점 더 이상화되어, 결국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 불행한 사랑의 경험을 토대로 그가 쓴 작품이《연애론》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결정 작용(cristallisation)〉이라는 말은 모든 현상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새로운 완성을 발견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을 미화시켜 생각하는 심리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작용의 이론은 연애의 출발과 그 형성의 이론인 동시에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예상하는 이론이다. 물론 스땅달 자신도 불멸의 연애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 관심을 두었던 것은 멸하는 연애, 즉〈정열적 연애〉만을 가리킬 뿐이고 취미적 연애, 육체적 연애, 허영의 연애는 여기서 제외되고 있다. 또한〈정열적 사랑〉은 세속적인 것과 육체를 초월한 것으로 스땅달 자신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지만 세속의 모든 사랑이 필연적으로 시간과 더불어 멸해 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스땅달이 그의 저서의 서두에서 흔히 썼던〈행복한 소수의 사람들〉이란 허영심이나 자만심·감정의 과장이 없는 애정이 깊고 소박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는 이런 사람에게만 정열적인 연애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사랑한 것도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인이 이른바 정열적인 연애가 어울리는 기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라노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였다.
명석한 논리를 사랑하는 스땅달은 남에게 속지 않으려는 조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억제의 습관을 지니게 되었고, 자기의 본심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지성의 힘으로 자기를 방어하면서 냉소와 풍자로써 남을 두렵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속에는 타는 듯한 정열과 섬세한 영혼이 깃들여 있었다. 몽상을 무엇보다도 즐긴 스땅달은 음악의 멜로디를 타고 자기의 감정이 방황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하이든, 모차르트, 메따스타지오, 로시니 등 저명한 음악가의 전기를 썼지만 음악교육을 받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기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감정과 영혼의 문제였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는 기분이 든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불행한 연인이던 스땅달은 마음의 위로를 음악 속에서 찾았다. 음악은 부재의 연인이 그에게 달콤하게 속삭여 주는 관능적인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의 기쁨은 애인과 함께 있을 때를 상상하고 느끼는 쾌락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기초는 바로 이 육체적 쾌락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음악에 의해서 강력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우울한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우울은 마음의 위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복을 예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 때문에 더욱더 그는 이탈리아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울함이 없이는 정열적인 음악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허영심이 강하고 경솔하고 우울을 모르는 프랑스인 에게는 음악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이탈리아 회화사(Histoire de la peinture en Italie)》속에서 예술은 시대·풍토·인종·정치체제의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는 미의 상대성원리를 전개했다. 음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 있어서도 채색·데생·원근법 등의 기술보다는 표현을 그는 훨씬 더 중히 여겼다. 표현은 예술의 모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남의 비판보다는 그림을 감상할 경우에 자기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강렬한 정열이 없는 사람은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는 본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독자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한 예술가가 자기의 독특한 행복추구의 방법을 표현한 것이므로 예술가와 감상가의 행복추구의 방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그 작품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 이것이《이탈리아 회화사》속에서 스땅달이 주장한 교훈이다.
그의 정치관에 대해 말한다면, 스땅달은 평생 변함없는 반 권력주의자였다. "폭군적인 모든 것은 나에게 반항심을 일으킨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권력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그는 가정의 왕당파적인 공기에 반발하여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였고, 또 나폴레옹에게 봉사하면서도 그의 독재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왕정복고 기에는 망명귀족의 반동정책과 제주이트파 성직자들의 활동을 비판하였다. 1813년에서 1825년에 걸쳐 그는 영국 계통의 잡지에 파리 문단의 소식이나 서평을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당시의 정치기구나 사회구조, 자유주의 탄압정책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 논문은《영국 통신》속에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서 나타난 시대 비평은《적과 흑》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는 또 1825년에《산업가에 대한 새로운 음모》라는 팜플렛을 발표하여 신흥 부르주아 산업가의 실리주의를 공격했다. 이 태도는 그의 미완의 소설《뤼시앙 루벵(Lucien Leuwen)》속에 나타난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그는 다시 관직에 앉아 이탈리아의 치비타비키아의 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루이 필립의 금권정치와 금융 부르즈와의 정권 탈취의 내막을《뤼시앙 루벵》속에서 폭로하고 있다.
스땅달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주의자이다. 그의 자유주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계급의 이익도 대변하지 않는 순수자유주의의 입장이고 따라서 그는 어느 정권도 비판할 수 있었던 점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는 진보를 믿는 자유주의 사상가인 동시에 시대의식을 정확하게 포착할 줄 아는 역사감각을 갖추고 있다. 그는 어떠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고 그 원인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의 진보사상과 통찰력에 의해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점점 새로운 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스땅달에 있어서 나폴레옹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부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 통령이 되고 황제가 되어 프랑스의 자유를 짓밟는 군주가 되자 스땅달은 그를 몹시 비난했다. "요컨대 위인으로서의 그를 찬양하라, 군주로서의 그를 증오하라"라는 말이 스땅달의 나폴레옹 관을 지탱하는 기본 태도였다. 스땅달은 나폴레옹을 뛰어난 에네르기의 교사로 보았다. 즉, 나폴레옹은 그에게 있어 예술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스땅달 소설의 주인공은 다소 나폴레옹을 반영하게 된다. 《적과 흑》의 쥘리앙, 《뤼시앙 루벵》의 뤼시앙, 《빠르므의 수도원(La Chartreuse de Parme)》의 파브리스가 그러하다.
특히《빠르므의 수도원》에서 프랑스군의 밀라노 입성 광경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스땅달이 나폴레옹 법전을 유난히 사랑한 것은 그가 간결하고 명확하고 스피디하고 에네르기에 넘치는 문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스땅달의 무신론, 특히 반승려적인 태도는 소년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카톨릭 신자면서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와, 가정교사가 된 제주이트파의 성직자 라얀느,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후 그를 기른 아주머니 셰라피, 이 세 사람에 대한 반발에서 종교에 반감을 갖게 된 때문이었다. "나는 사제를 미워하고, 사제의 권력의 근원인 나의 아버지를 미워하고 또 사제가 그 이름 아래서 나를 압박한 종교를 미워한다."고 그는《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종교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종교가 지니는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무감각했던 것도 아니다. 종교미술이나 카톨릭교의 의식의 장엄함에 대해서는 그는 감동을 표명하고 있다.《적과 흑》속에서 국왕이 부레이 르 오의 쌩 클레망의 유골에 참배하는 장면에 대한 쥘리앙의 감동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 그가 모든 성직자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적과 흑》에 나오는 셸랑 사제, 쟝세니스트인 삐라르 사제, 《빠르므의 수도원》에서는 프라데스 사제가 선량하거나 감동적인 성직자로서 그려져 있다. 그가 종교나 성직자들 비난한 것은 허위와 위선, 즉 승려들의 위선이 도덕적 내지 사회적인 진보를 막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것 때문이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았으나 그것을 믿는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세에 대한 신념이 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 그는"나의 신이 존재하는 것을 기뻐했다. 나처럼 성실하게 산 사람에 대해서는 신도 나를 천국으로 맞이해 줄 것이다."하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인생에 대해서 충실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파리의 몽마르뜨르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유언에 의해서〈앙리 베일, 밀라노인, 쓰고, 사랑하고, 살았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스땅달 자신의 이 묘비명이야말로 1783년에 태어나서 1842년까지 59년이라는 스땅달의 전 생애를 가장 짧게,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문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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