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 해설 / 찰스 디킨즈
by 송화은율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즈 / 崔玉迎
주인공인 핍은 우선 부모가 없고, 누나의 손으로 길러지며, 매그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번 감옥 장면이 나온다. 지나가 버린 과거는 핍과 미스 해비샴, 매그위치의 경우를 중심으로 수없이 되풀이되어 묘사된다.
핍은 대장장이인 매부 밑에서 대장간 견습공 노릇을 하며, 고독한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그가 다른 사회를 볼 수 없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는 사자의 형태로 그에게 부딪쳐 온다. 그는 탈출한 죄수와 늪지대의 교회 무덤에서 만나게 된다. 이런 최초의 사회와의 접촉을 핍은 잊기를 원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핍은 최초로 누나의 집에서 물건(음식)을 훔치는 경험을 강요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죄수와 핍과의 만남이 후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전개되는가는 핍 자신도 독자도 알지 못한다.
미스 해비샴은 그 동네의 은둔자로 아무도 그녀를 수십 년 동안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 양녀와 놀아 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하여 핍이 그 상대로 선택된다. 그녀는 햇빛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감금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온 방안의 공기는 곰팡내나는 부패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녀는 신부복 차림인데, 사실인즉, 미스 해비샴은 결혼식 날에 신랑으로부터 걷어차인 과거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고 있으며, 이 모든 자기 고행은 자기 자신이나 외부에 대한 복수뿐만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복수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행동을 통하여 미스 해비샴은 핍에게 그의 이전 생활에서 벗어난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스 해비샴의 액센트(억양)는 핍과 다르며, 그녀의 태도도 핍과는 다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양녀 에스텔러는 핍을 멸시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핍의 비천한 혈통을 알게 한다. 그녀의 괴상한 분위기에서는 실제로 모든 자연스러운 현상이 상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낮을 밤으로 만들고, 사랑을 미움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좌절감을 밖으로 나타냄으로써 그녀는 세상을 악한 사회로 변형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 자체의 도덕을 곡해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스 해비샴은 핍으로 하여금, 자기가 핍을 그의 계급으로부터 벗어나 상류계급으로 올라가게 해 줄 후원자라는 추측을 갖게 해 준다. 그런 환경에서 핍은 미스 해비샴의 속임수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핍은 에스텔러가 그를 매혹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스 해비샴이 에스텔러 안에 파괴의 도구를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핍은 에스텔러와의 처음 대면에서 자기가 <비천한 노동자>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손이 거칠고, 자기 장화가 두껍고, 트럼프의 네이브를 잭이라고 부르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이때가 핍이 에스텔러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시작하는 때이다.) 그는 자기 집에 대하여만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직업에 대하여도, 자기 친절한 주인인 매부에게 대해서도 혐오를 느낄 뿐이었다. 미스 해비샴과 그녀의 양녀와의 해후는 또 하나의 사회의 사자를 핍으로 하여금 만나게 해 준다. 그는 다름 아닌, 런던에서 온 변호사 제이거스인 것이다. 제이거스를 핍은 미스 해비샴 집에서 잠깐 본 적이 있으나, 핍은 그를 다시 동네의 술집에서 만나게 된다.
핍의 세계는 제이거스와 술집에서 만난 후로 갑자기 변하게 된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될 것이며, 런던에서 신사로 교육받고 신사의 생활을 누리게 된다. 이제는 조우 매부가 후원자가 아니고 제이거스가 핍의 후원자로 등장하게 된다. 핍이 처음으로 대하는 런던은 더럽고, 좁고, 흉하다. 이러한 런던은 실제로 디킨즈 자신이 소년기를 보낸 런던의 하류사회와 동일하다. 디킨즈 자신이 일했던 변호사 사무실처럼, 제이거스의 사무실도 가난한 손님들과 그늘진 죄수들로 꽉 차 있는 것을 핍은 발견했다. 제이거스는 핍이 발을 디뎌 놓은 사회의 방사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처럼, 마치 외과 의사나 치과 의사처럼 사무가 끝나면, 솔로 손을 문지르고 비누를 써서 손을 씻는다. 특별히 악한 사건을 처리한 뒤에는 양치질까지 하고 손톱에서 때를 파내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죄를 자기에게서 씻어버린다는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조우의 대장간의 석탄재와 땡그랑 소리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제이거스는 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떤 비평가들은 제이거스를 친절하다고 했고, 또 어떤 비평가들은 악한이라고 불렀다. 사실은 그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돈을 받고 일해 주는 대리인이라고 연거푸 되풀이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은 없고, 그저 집에서 기거하며, 일에 파묻힌 사람으로서,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중성적인 인물이며, 여러 가지 파벌을 연결하는 중개인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핍의 새로운 사회생활은 런던의 폐허에서 시작되며, 제이거스의 사무실만큼이나 먼지투성이의 고통스러운 장소이다. 그곳에서 나온 후에도, 도둑질을 하는 세탁부와 아벤저라고 불리는 심부름꾼 사이에서, 핍은 고통을 겪는다. 그의 생활은 게을러지고 빚은 늘어난다. 어리석은 신사의 모임 <작은 숲속의 방울새>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마침 런던에 와 있게 된 에스텔러와 춤을 추는 것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사회에서 핍은 한번도 행복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핍의 마음은 에스텔러의 주위를 24시간 내내 돌며, 그녀와 죽을 때까지 같이 지내리라는 환상적 행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에스텔러는 이 소설에서만 원소의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디킨즈의 작품전반에서도 원소의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어느 면에서는 디킨즈의 모든 소설이 기다리고 있는 여자 주인공이기도 하다. 에스텔러 안에서 독자는 처음으로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자의 효과적인 묘사를 보게 되는데, 에스텔러는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의 매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텔러가 어린 소녀였을 때 말하는 것은, 거칠고 냉정하다.―물론 그녀도 핍에게 핀잔을 주었던 점을 그녀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핍이 특권 계급이 아니라고 그녀가 말한 사실은 쓰디쓴 아이러니가 된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의 조상도 ― 그녀 자신은 모르지만 ― 형편없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핍이 늪지대에서 만났던 죄수이며, 그녀의 어머니는 제이거스 집의 가정부이며, 살인자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에스텔러는 신경쇠약에 걸린 여인에 의하여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이러한 유전과 환경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에스텔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제를 할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자제 행위는 인간성을 버리는 형태를 취해 나타난다. 그녀는 자기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매혹하게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핍이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말한다. "너와 나는 선택의 자유가 없는 거야. 우리는 지시를 따라야만 해. 우린 우리 자신의 계획을 따를 수가 없단다." 이러한 에스텔러의 성적인 희롱은, 마치 자기가 주기 싫은 상품을 나열해 놓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은, 즉 디킨즈가 고전적 불감증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운명은 에스텔러를 벤틀리 드러믈의 아내로 만들고 만다. 드러믈은 <숲속의 방울새> 중에서도 가장 둔한 작자이며, 준남작의 상속자이다. 그는 핍의 잘못된 개념으로는 아주 논리적인 신사인 것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서 <신사>라는 단어는 주된 음조처럼 울려퍼진다. 실제로 몇 수십 번 이 단어가 등장한다. 처음, 핍이 소년일 때, 에스텔러를 위하여 자기가 <신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 다음엔 제이거스가 핍에게 위대한 유산의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 <신사>가 되기 위하여는 이곳을 빨리 떠날수록 좋겠다고 말한다. 핍은 장년이 되어서도 에스텔러와 자기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에스텔러를 <상류계급>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사>와 <상류사회>가 자주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핍의 재산의 장본인이 알려지는 장면의 불길한 징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빛나는 사회의 잊어버린 유물인 미스 해비샴이 아니고, 핍이 늪지대에서 도와주었던 죄수가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이 핍의 행운을 건설한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 핍으로 하여금 매부의 대장간에서 등을 돌려, 허망한 희망의 사회에서 살도록 해 놓은 장본인인 것이다. 그도 핍에게, 내가 너를 <신사>로 만들어 놓았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핍의 친구인 허버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무엇이 진짜 <신사>인가를 배웠다. 마음이 진짜 신사가 아닌 사람은 태도에서도 진짜 신사가 될 수 없다고 허버트는 믿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무에다 아무리 왁스를 발라도 그 무늬를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왁스를 칠하면 칠할수록 나무의 무늬는 더욱더 잘 나타나는 법이라고.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마음씨 흉한 에스텔러의 남편이 그의 <무늬>를 학대와 잔인으로 표현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핍 자신의 생애에서도 이 점은 볼 수 있다. 몇 개의 흉한 <무늬>는 고생스런 생활의 마찰로 없어질 때까지 내내 보이는 것이다. 만일 핍이 신사가 된다 해도 그것은 그의 후원자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핍이 신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죄수를 돌보아 주는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죄수가 싫게만 느껴졌으나, 그가 무서운 애정 ― 자기가 만든 신사를 보고 싶은 갈망 ― 때문에 갖은 고생 끝에 핍에게 찾아온 것을 알았을 때, 핍은 그 죄수에게 동정을 느낀다. 이것이 고통받는 사람에게 향한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죄수 <매그위치>를 몰래 도피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죄수는 심한 상처를 입고 다시 체포된다. 이 때 핍은 그의 침대 옆에 앉아서 <신사>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우에게 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이간을 그에게서 발견하고 자신을 자책한다. 유죄를 판결 받았으나, 그는 사형 집행을 받기 전에 죽는다. 중죄를 인하여 그의 전재산은 국가에 몰수당한다. 이제 핍은 유산은커녕 큰 빚을 지고 있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아무 기술도 없는 형편이다.
한편 허버트야말로 천성이 귀족 태생이다. 핍이 에스텔러를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쫓아다니는 반면에, 허버트는 일부러 돈 한 푼 없는 클라라와 약혼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위선적인 계급에 도전한다.
처음에는 핍과 허버트의 우정이 일방적으로만 나왔었다. 그러나 핍이 신사가 되어 가면서부터 죄수에게 친절해 갔듯이, 핍의 온화한 성격이, 일찍이 허버트를 동업자로 만드는 데 성공을 시켜 주었다. 적어도 핍의 유산이 허버트에게는 좋은 일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핍의 재산이 모두 없어졌을 때, 그는 자기가 도왔던 허버트의 회사로 갈 수 있게 된다.
핍의 또 하나의 친구는 제이거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웨믹이다. 웨믹은 사무실에서와 자기집에서 아주 딴판이다. 사무실에서는 그토록 기계적이고 무감동한 웨믹이, 집에 와서는 노부에게 친절하고 애인에게 상냥하며, 핍에게도 유쾌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웨믹은, 바로 디킨즈가 어렸을 때 변호사의 사환으로 있었던 경험을 살려서 쓴 인물일 것이다.
핍의 성숙의 표시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애정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정말 신사로 만드는 것이다.
<상류계급>의 표준은 이 작품 중에서 가장 기대하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소년기에 핍은 누나 때문에 불행하였고, 미스 해비샴 때문에 야망에 차 있었고, 또 에스텔러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제이거스 때문에 그리고 그의 위대한 유산의 소식 때문에 유혹을 당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신사의 됨됨이를 알아차리는 것에 유혹당하는 것이며, 그것은 대장장이 조우의 생활에서 볼 수 있다.
진실한 신사는 왁스칠된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우는 왁스로 칠해진 예의 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남을 깊이 생각해줄 줄 안다. 그는 배우는 데는 느렸으나 배움의 부족에 대하여 수치를 느끼는 것은 조우가 아니라 핍인 것이다. 왜냐하면 핍은 정직한 직업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희망이었는지, 또 그런 희망을 사허ㅣ에서 달성하려 했던 것이 모래성을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비참한 사실로서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게 된 것이다. 한 직업에 능숙한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사는 드러믈도 핍도 아닌 바로 조우인 것이다. 핍을 키워준 데 대한 대가를 제이거스가 지불하려 할 때, 그는 당당히 거절했다. 그는 꼭 두 번 화를 냈는데, 한번은 자기 부인을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어린 핍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비난을 받았을 때이다.
진정한 신사처럼, 조우는 또 온화할 줄 안다. 디킨즈는 증기 해머를 가지고 칠 수 있는 그이 완력과, 핍이 런던에서 죄수와 에스텔러와 빚과 열병으로 고생할 때 천사의 날개와 같은 부드러운 감촉으로 핍을 완쾌시켜 준 그의 온화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조우와 마찬가지로 비디도 숙녀라고 부를 수가 있다. 그녀는 디킨즈 집안의 천사 중 가장 성공적인 등장인물이다. 그녀는 말이 말이 없으나 그녀가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는다. 그녀는 처음에는 학교 선생이었고, 조우의 부인이 상처를 입고 누워 있을 때, 조우네 집안 사람들을 돌보아 준다. 그녀는 핍에게 항상 좋게 충고를 해 주며, 핍이 에스텔러 때문에 신사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에도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무엇이든지 급속도로 배우며, 집안 살림을 잘 꾸려가는 데에서 비디가 현명함을 알 수 있다. 비디가 조우의 부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우의 집으로 핍이 수년 후에 돌아왔을 때, 조우와 비디 사이에 난 아들을 또 핍이라고 이름한 것은 핍에 대한 비디와 조우의 사랑의 표시이며, 자기네 아들이 핍처럼 자라 주기를 바라는 소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윕슬 역시 교회의 서기였다가 나중에 런던에 무대에 나오게 되는 점이 이상스럽게도 핍의 생애를 우습게 흉내낸다. 그의 연극인으로서 소망은 비참하게 무너져 처음에는 햄릿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검둥이로 혹은 희극적인 타타르족으로 타락하고 만다. 또 핍처럼 재산도 없어지고 만다.
또 하나의 풍자적인 인물은 조우의 공장인(工匠人) 올릭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핍의 누나가 치명상을 입게 했으며, 잔인한 점에 있어 드러믈과 잘 비교가 된다. 왁스를 칠했든 안 칠했든간에 <무늬>가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난다. 올릭은 후에 펌블추크를 때려눕히고 도둑질을 하여 감옥에 간다.
펌플추크는 핍의 후원자로 자처하고 다니는 가짜 후원자. 그는 이상하게도 미스 해비샴을 생각하게 한다. 미스 해비샴도 핍의 후원자인 것 같은 인상을 핍에게 준 것이 펌블추크와 비슷한 점이다. 또 하나의 풍자적인 인물은 콤피슨으로 그는 매그위치와 늪지에서 잡혔던 또 하나의 죄수이다. 그는 책을 통해서 도둑질을 하는 지능범이다. 바로 콤피슨이 매그위치로 하여금 최초의 죄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최후에 그를 고발하는 밀고자가 된다.
이런 모든 풍자가 산문의 어조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어조는 매우 융통성이 있고 독자에게 날카로운 디킨즈의 선물을 해설과 함께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된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에 대하여 우선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점은 그의 작품이 대단한 인기를 오랫동안 지속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무려 130년 동안이나 베스트 셀러의 리스트에서 윗자리를 지켜 왔던 것이다. 그의 작품의 인기란 이렇게 대단한 것이어서, <흠정 영역성서(The King James Bible)>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빼놓고 세계문학 가운데서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읽혔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러한 인기를 그가 차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는, 영국문학에서, 그보다 더 훌륭한 창조력을 발휘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디킨즈의 창조적인 손가락이 닿기만 하면, 작품 중 어느 등장인물이든지 생명력을 발휘했다. 디킨즈의 창조물은 특성이 없고 풍자뿐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즉, 특성이 없는 곳에 풍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고. 풍자란 인간 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인기를 얻고 있는 첫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작품에 넘치는 유머이다. 세계의 유머 작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디킨즈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는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창조적 재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디킨즈에게서 창조력과 신선한 유머와 풍부한 변화가 한데 합친 놀라운 결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세계적인 명성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찰스 디킨스는 1812년 포츠머드(영국 남단의 군항)에서 해군성 경리부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디킨즈는 그후 채덤과 런던에서 살게 되었다. 런던에서 아버지는 <서머셋 하우스>(우리 나라의 중앙 등기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결혼, 사망, 출생, 내국세수입, 유서 등을 기록해 둔 곳이다)의 서기 노릇을 했다. 생활은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채로 인하여 <마셜시이>에 투옥되면서 생활은 비참과 굴욕의 모습으로 일변하고 말았다. 그는 구두약 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형편없는 환경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만 했으니,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그가 뒷날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작품화하기에 이른 것은 이 때의 체험의 소산이다.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의 주장으로 보잘 것 업는 학교나마 다닌 뒤,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여 서기노릇을 2년 가량 했다. 여기서 속기를 배운 그는 신문기자가 되어 하원을 드나들기도 했다.
디킨즈는 소년시절부터 고전을 탐독하면서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떴고, 여기에 기자 생활은 많은 여행과 만남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풍부한 관찰과 경험과 식견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첫사랑의 실패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가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21세 때, 몇몇 잡지에 단편 및 소품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그 뒤 2∼3년 동안 보즈라는 익명으로 발표한 작품들을 모아 《보즈의 스케치집(Sketches by Boz)》(1836)을 내놓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그는, 다음해에 《픽윅 페이퍼즈(Pickwick Papers)》로 명성을 굳히고,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만 전념하면서 작품 제작에 정열을 바치게 되었다.
디킨즈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은 디킨즈의 소설의 구조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한다. 소설의 구조(structure 혹은 fabric) 라는 술어는 소설을 형성하는 줄거리(plot)의 복합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 줄거리라 함은 행동의 주요 부분을 말하는 것이고, 만일 그 이야기 줄거리가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이야기의 전개와 관계가 있을 때에는 스트랜드(strand)라는 용어를 쓴다.
성공적인 작품에서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서 모든 이야기 줄거리가 함께 엮어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모든 이야기 줄거리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 공헌할 때, 이 목표를 주제(thema)라 한다.
그러나 디킨즈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런 테마나 총체적인 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후기 작품에 이르러서야, 작품의 주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주제는 개인이 어떤 조직이나 체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을 보여 준다.
디킨즈의 소설의 주제는 흔히 사회를 <오우거(Ogre:동화에 나오는 거인으로 사람 잡아먹는 귀신)>로서 취급하고, 거기에 대항하여 싸우는 한 개인의 투쟁을 그린 것이다. 디킨즈의 부모는 실제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세상을 살기에는 무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디킨즈를 교육시키지 않고 공장에 집어넣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그 부모들이 악의에서 행한 행동은 물론 아니며, 앞을 내다보는 준비가 없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디킨즈로 하여금, 직접 자기 부모에게 대한 반항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게 하였다. 불행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고, 사회를 분노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주제가 그의 중요한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디킨즈가 실제 그런 경험을 겪었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디킨즈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황량한 집(Bleak House)》《고된 시기(Hard Times)》《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우리들의 맹우(Our Mutual Friend)》, 그리고 《꼬마 도릿(Little Dirit)》에서 사회를 일종의 감옥으로 취급하였다.《위대한 유산》을 포함하는 이들 장편 속에서 사건들, 등장인물들, 이야기 줄거리, 행동의 방침, 상징의 형태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산문이 모두 거대한 디킨즈의 주제 ―즉, 사회체제에 대항하는 개인 ― 에 이바지한다. 우리가 이 소설들을 디킨즈의 걸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이 걸작들이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들보다 우수한 점은 사회 비평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문학적 성취에 있어서도 우수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걸작의 세계는 스크루지나 춉스의 세계보다 견고하고 어른의 환경에 더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디킨즈 작품의 어떤 이야깃거리(topic)는 가끔 강박관념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의 대리인 혹은 부적당한 아버지, 채무자의 감옥, <권리·물건>을 박탈당한 어린이, 지나가 버린 과거, 캘빈파의 세습 등은 그의 전 작품을 통해서 자주 나오는 특성인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작품에서 정치에 깊이 파고들어 가지 않는다. 또 작품세계나 예술세계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결코 사상적 소설가는 아니다. 그는 성에 대하여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중요한 불평은 개인을 보호해야 할 사회가 실제로는 그 개인을 무시하고 돌보아 주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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