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원효의 사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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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의 사상

 

원효의 심원한 사상 세계는 그 높이와 깊이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방대한 저술의 양과 그 분야가 말해주듯이, 그의 불교 사상 연구는 대·소승, ··어느 것에도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교사상의 연구에 있어서 원효는 어느 종파에 얽매이지 않았음은 물론 그것을 보다 높은 포괄적 체계 속에 총섭 시키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금강삼매경론>에서 그는 만법(萬法)이 일불승(一佛乘)에 총습(總濕)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대해(大海)중에 일체 중류(衆流)가 돌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곧 상호 대립적인 사상과 교외를 모두 융회하여 일불승(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함이다. 또 그의 <열반정종요>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지극히 공평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이회(利會)시킨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가장 독창적 저술인 <십문화쟁론>에 이르면 그의 이같은 사상적 면모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불교 교의와 인간의 온갖 다양한 주장들을 없음()과 있음(), ()와 세계() 열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묶고 화쟁의 논리에 입각하여 그것을 하나 하나 회통(會通)시키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어느 주장을 일방적으로 묵살하지 않는다. 열린 자세로 수용하면서 하나하나 그들을 논리적으로 교통정리 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밝혀나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의 중심 사상은 화쟁(和諍)사상 또는 화회(和會)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화쟁이란 그의 중심 사상이라기보다는 중심 논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효의 화쟁은 반드시 회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쟁회통(和諍會通), 즉 화쟁에서 그치지 않고 회통에 이르고 있음이다. 따라서 화쟁보다는 화쟁회통의 준말인 화회(和會)가 더욱 정확히 그의 중심 논법인 셈이다.

 

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이란 말은 논쟁을 화해시킨다는 정도의 상식적인 용어가 아니다. 여기서의 ()’이란 다툼의 뜻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쟁(異諍)은 곧 각자의 주장이나 견해 또는 각기 다른 학설을 말함이다. 원효는 인간의 각기 다른 대립적인 이설(異說)들을 유통(琉通회통(會通)시켜 하나의 큰 진리를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화회(和會)의 방법에 있어서, 원효는 모든 이쟁(異諍)에 대해 옳고 그른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개입시키지는 않는다. 오직 최고의 진리, 즉 불설(佛說)의 진의(眞義)에 맞추어 하나의 뜻으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그래서 화쟁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화회(和會)를 그대로 원효의 중심 사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그러한 화쟁회통의 논법을 통하여 밝혀진 심성(心性)의 세계를 그의 중심 사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가 여러 저술들을 통해서 밝혀낸 심성의 세계는 바로 불심(佛心)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일심(一心)이다. 일심이란 다름 아닌 모든 가능성을 감싸고 있는 중생심(衆生心) 그것이다. 중생심 그대로가 곧 진리를 머금고 있는 일심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뜻에 계합(契合)하는 일심사상, 그것이 곧 원효의 중심 사상인 것이다.

 

원효는 이 일심사상을 화쟁의 논리를 통해 더욱더 심화시켜 간다. 모든 강물들이 바다에 이르러 한 맛이 되듯이 그는 온갖 다양한 주장들을 화회시켜 불심(佛心)이며 중생심(衆生心)이니 일심(一心)으로 회통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의 방법이 무애(無碍)의 행위였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고 진()과 속()이 둘이 아닌 경지의 삶, 그것은 곧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 자의 무애한 삶의 모습이다. 어떤 사상이나 관습에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하고 행동했던 원효의 걸림 없는 삶 또한 바로 이 같은 일심사상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http://www.wonhyo.org/wonhyo/w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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