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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성을 지나며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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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성을 지나며 - 過安樂見오(과안락견오 : 거스를 오)

安樂城中欲暮天 안락성중욕모천

關西孺子聳詩肩 관서유자용시견

村風厭客遲炊飯 촌풍염객지취반

店俗慣人但索錢 점속관인단색전

虛腹曳雷頻有響 허복예뢰빈유향

破窓透冷更無穿 파창투냉갱무천

朝來一吸江山氣 조래일흡강산기

試向人間벽穀仙 시향인간벽곡선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요점 정리

 

지은이 : 김병연(김삿갓)

갈래 : 칠언 율시

압운 : 천, 견, 전, 천, 선

성격 : 풍자적(이 작품에서는안락성에서 안락하지 않게 밤을 지냈음을 풍자한 것으로 허세와 위선으로 가득찬 기존의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과 야박한 인심과 세태에 대한 풍자적 고발의 목소리가 은근하면서도 날카롭게 표출되어 있다.), 비판적, 고발적, 해학적

어조 : 은근한 풍자와 비난의 목소리

구성 : 수함경미의 4단 구성 : 양반의 허세와 위선/ 야박한 인심 세태/ 추위와 굶주림으로 하룻밤을 보냄(나그네의 서글픔)/ 가난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자세

제재 : 평안 지방에서의 하루

주제 : 현실 세태의 비판과 고발, 사대부의 허세와 관서 지방의 야박한 인심에 대한 풍자

특징 : 양반 계급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드러나고, 해학적 표현과 과장법을 활용하여 내용을 전개함

내용 연구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 양반의 허세 비판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 야박한 마을 인심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 나그네의 서글픔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 선비의 자부심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묵어가야 하는 필연성과 시간적 배경]

관서지방[평안도 지방] 못난 것들[양반의 허세를 비판한 것으로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지은이의 가문이 몰락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지은이가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상적 배경이 담겨 있음 ]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 평안도 사람들의 거부감에 대한 표현(역사적 배경이 있다. 홍경래 난으로 인한 집안의 몰락이라는 배경이 담겨 있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손님을 믿지 못하는 풍속, 상업주의적 태도, 가난한 나그네를 박대함].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과장적으로 표현이다. 이태백의 망여산폭포에도 이와 같은 과장적 표현이 있다.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어리고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멀리에 폭포는 강을 매단 듯,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숙소의 열악한 상황으로 화자의 어려운 처지를 보여줌]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저녁을 굶었음을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가난 한 삶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지은이의 풍모가 엿보임과 동시에 대상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야유가 담겨 있고, 절망적 상황을 해학적으로 극복려는 태도임. 한밤중에 주막에 들어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나타낸 부분 / 벽곡 : 신선이 되기 위해 곡식을 먹지 않고 수련하는 방법]

 

작자의 생애를 조사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안락성을 지나며'에서 화자가 관서 지방의 인심과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 (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생애를 볼 때, 그가 관서 지방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기는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단하고 배고픈 나그네의 어려움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겠지만, 이러한 사정이 그로 하여금 관서 지방 인심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게 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이처럼 개인적인 가족사로 인한 감정의 반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처음에는 계급적 몰락과 관련한 개인적인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폭넓은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관과 변화가 일어나 나중에는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평안도 안락성에서 지은이가 하룻밤을 묵으면서 느끼는 세태의 각박한 인심과 양반의 허세를 비판한 작품이다.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지은이의 가문이 몰락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지은이가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상적 배경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양반들의 허위 의식에 대한 비판과 계급 차별적인 봉건 사회 질서에 대한 김삿갓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는 시이다.

심화 자료

김병연

 

1807(순조 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경기도 양주 출생.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 (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에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怜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한 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와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김병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 金笠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綠北集(黃五), 海藏集, 大東奇聞, 金笠詩集(李應洙編, 有吉書店, 1939), 金笠의 詩와 諷刺精神(金容浩, 漢陽 3권 7호, 1964), 金笠硏究(尹銀根,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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