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by 송화은율무제(無題)
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天光雲影共排徊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吾愛靑山倒水來 오애청산도수래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삿갓(김병연)
형식 : 칠언 절구(고시)
연대 : 조선 후기
성격 : 해학적[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 긍정적, 은유적,
구성 : 기승전결의 4단 구성 : 농민의 따스한 인정과 가난/방랑하는 시적 화자의 처지/ 가난한 농민에 대한 연민/ 안빈낙도하는 유유자적한 삶
표현 : 은유적 표현으로 이 작품에서 작자는 방랑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로 비유하는 한편,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벗삼아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고 있다. 작자는 그러한 인생관에 대해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어조 :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는 연민의 목소리
제재 : 가난한 농민의 삶, 방랑 생활
주제 : 가난한 농민에 대한 연민과 속세를 초탈한 인생관과 안빈낙도의 삶, 청빈한 삶에 대한 의지
내용 연구
네 다리 소반[음식을 놓고 먹는 작은 상] 위에 멀건 죽 한 그릇[가난한 농민의 삶과 따뜻한 인정을 상징].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지은이의 처지와 같은 감정이입물]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방랑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농민의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와 배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청빈한 삶을 표현]을 내 좋아한다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 손님 접대로 내놓은 초라한 멀건 죽 위에 산 그림자가 비친 모습을 보고 자신의 방랑하는 삶과 가난한 처지를 자연 속에서 즐기려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안빈낙도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
작자가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 무제란 주제로 부각시킬 만한 특별한 내용을 의식하지 않고 작자 개인의 상념을 표출하려는 경 우 제목으로 제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작자는 방랑 생활 속에서 들른 어느 시골 농가에서 죽 한 그릇을 대접받고는,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오히려 자신도 청빈하고 초탈한 삶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일상생활 속에서 만난 한 사람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듯한 어조로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무제'라는 제목을 통해 작자는 특별한 창작 의도 없이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시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삶의 문제 의식은 어떤 것인지 말해 보자
일단 시의 화자로서의 작가가 방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과, 그러한 삶의 현실에서 자기 나름의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와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한다. 청빈한 삶이나 속세를 초월한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런 생각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청빈한 삶과 속세를 초월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자가 삶의 여유를 통해 긍정적인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시의 어조는 왠지 모를 고독감이 느껴지며,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하는 고뇌에 찬 지식인의 존재가 느껴진다.
이 작품과 유사한 작품은?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백의 산중문답 :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해와 감상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는데 가진 것 없는 주인이 손님 접대로 내놓은 저녁 끼니는 멀건 죽이고,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면서 농민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자신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읊은 작품이다. 이 시는 비록 해학적인 느낌을 주지만 당시의 비극적 사회상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 작품으로 하층민인 농민들의 힘겨운 생활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기도 한다. 방랑 생활로 지친 그에게 멀건 죽밖에 대접을 하지 못해 미안해 하는 어려운 처지의 농민을 도리어 위로하는 글로 오히려 멀건 죽 안에 비친 청산(靑山)을 감상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로 농민의 심정을 위로하고 있는 데에서 시인의 기발한 해학을 엿볼 수 있고, 이러한 해학적 표현은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글을 모르는 그에게 이 한편의 시는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해학이 사회의 비극적 현상들에 대한 묘사, 특히 하층민들의 눈물 겨운 생활 처지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로에 지친 나그네 시인에게 멀건 죽한 그릇밖에 대접 못하는 농민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하였을 때, 오히려 그 죽그릇 안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데에서 시인의 기발한 해학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의 웃음은 주로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와 운명에 대한 동정, 뜨거운 연민의 정과도 연결된다.
이해와 감상2
김삿갓의 한시 작품은 다른 한시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파격적인 형식과 주제를 드러낸다. 이는 그의 작가 의식이 기존의 조선조 사대부의 이념적 세계관과는 달리, 보다 현실적인 생활 의식에서 바탕을 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서정 갈래의 본질적인 특징인 대상과 세계에 대한 주체의 주관적 인식과 반응이 잘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이 작품 '무제'에서도 작가의 해학이 사회의 비극적 현상들에 대한 묘사, 특히 하층민들의 눈물 겨운 빈한한 삶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여로에 지친 나그네 시인에게 멀건 죽한 그릇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하였을 때, 오히려 죽 그릇 안에 비친 청산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기발한 해학을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웃음은 주로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와 운명에 대한 동정, 뜨거운 연민의 정을 바탕으로 한 인생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방랑 생활을 하는 자신의 삶을 '하늘에 뜬 그림자'에 비유하면서 속세를 초탈한 인생관과 청빈한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심화 자료
김병연
1807(순조 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경기도 양주 출생.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 (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에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怜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한 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와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김병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 金笠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綠北集(黃五), 海藏集, 大東奇聞, 金笠詩集(李應洙編, 有吉書店, 1939), 金笠의 詩와 諷刺精神(金容浩, 漢陽 3권 7호, 1964), 金笠硏究(尹銀根,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假名)을 김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처 : 김삿갓 풍자시 전집, 실천문학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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