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우(久雨)
by 송화은율구우(久雨)
窮居罕人事 궁거한인사
恒日廢衣冠 항일폐의관
敗屋香娘墜 패옥향낭추
荒畦腐婢殘 향휴부비잔
睡因多病減 수인다병감
秋賴著書寬 추뢰저서관
久雨何須苦 구우하수고
晴時也自歎 청시야자탄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낡은 집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비 오래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요점 정리
지은이 : 정약용(丁若鏞)/ 김지용(金智勇) 옮김
연대 : 정조 때
갈래 : 오언 율시
성격 : 비판적, 우회적
구성 :
두련 -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의복도 남루한 모습 - 벼슬하지 않은 지은이의 처지
함련 - 집 안에는 노래기가 기어다니고 들판은 황량한 모습 - 가난한 생활 모습
경련 - 가난하고 힘이 없는 괴로움을 글로 달램 - 자신의 삶을 한탄함
미련 - 생활고는 맑은 날에도 계속된다는 한탄 - 지식인으로서의 탄식
제재 : 가난
주제 : 장마철 농촌의 궁핍한 삶,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역설함, 궁벽한 처지에 대한 한탄
특징 : 적절한 소재를 활용하여 궁벽한 처지를 형상화하고, 외부 풍경에 대한 묘사와 주관적 정서의 표현이 적절히 조화를 이룸
출전 : 여유당전서
내용 연구
구우 : 장마비
궁벽하게 사노라니[궁핍한 생활]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벼슬하지 않은 처지, 포의한사(布衣寒士 : 벼슬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 / 포의지사]
낡은 집엔 향랑각시[(香娘) : 노래기, 향랑각시 속거천리(速去千里) 음력 2월 초하룻날에 백지에 먹으로 써서 기둥, 벽, 서까래 따위에 붙이는 말. 이것을 거꾸로 붙이면 집 안에 노래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팥의 꽃. 꽃은 둘 내지 세 쌍이 피는데, 크고 나비 모양이며, 누런색 또는 붉은 자주색으로 약용한다 ]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짓는 일[근심을 달래는 수단 / 시적 화자가 지식인임을 알 수 있음]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비 오래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민중의 생활고는 흐린 날뿐만이 아니다 / 괴로운 이유가 비 때문만은 아니라는 의미]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맑은 날에도 민중의 생활고는 계속되고,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탄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비 오는 상황을 배경으로 궁벽한 처지와 그에 대한 한탄을 노래하고 있다. 비오는 장마철 농촌의 가난한 삶 속에서 벼슬길에서도 멀어져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의복은 남루한데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집 안에는 노래기가 기어다니고 들판은 황량한 모습이니 글짓는 선비의 마음을 짐작할 만하다.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뻔히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힘이 없어 괴로워해야 하는 작자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가져 보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고는 흐린 날 뿐만 아니라 맑은 날에도 계속되어 한스럽다는 것과 화자는 글 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지만 비가 그친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질 바가 없다는 데에서 절망적 탄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을 노래하고 있다.
심화 자료
정약용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으로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襲翁)·태수(苔戒)·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으로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寅)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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