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소설가
by 송화은율
박범신(朴範信, 1946- )
· 충남 논산 연무읍 생. 황북국민학교 졸.
· 1967년 전주교육대 졸업
(성적이 좋지 않아 오지, 전북 무주 괴목국민학교 교사로 발령)
· 1969년 교직 사직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부랑아로 지냄
· 1971년 원광대학에 편입학, 졸업. 그후 강경여중교에서 교편 생활
· 1973년 결혼 후 단편 <여름의 잔해>로 신춘문예 당선, 상경한 후 문영여중 국어교사로 취직
· 작품 : <토끼와 잠수함>, <식구>, <아버지의 평화>, <청운의 꿈>, <역신의 축제>, <아침 에 날린 풍선>, 첫창작집 <토끼와 잠수함>, <돌아눕는 혼> 등
· 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재직
문단소식
우리 시대의 인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설가 박범신씨가 “당분간 소설을 쓰지 않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고 주변에 밝혀 문단의 화제가 되고 있다.
박씨는 현재 일간지와 월간지 등에 연재 중인 작품을 12월 말로 모두 마무리 짓고 일정 기간 동안 독서와 강의(명지전문대)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것은 절필(絶筆)선언이 아니고 다만 상상력의 고갈로 인해소설 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지쳐 있는 상태다. 그래서 글이 고일 때까지 논리적 학습이 되는 칼럼 등이나 논픽션 등에만 관심을 갖겠다”고 했다.
올해 초부터 용인에 있는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맡고 있는 박씨는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학생들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싶은 것도 내 소망”이라고 말했다.
[나의 신인시절] 소설가 박범신
신춘문예에 당선돼 가슴떨리는 성찬으로서 작가라는 이름이 내게 부여됐을 때, 나는 내 앞날이 광휘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문학을 가리켜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나는 말했다. 신혼이었던 젊은 아내와 더불어 먹고 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상경, 정릉천변에 단칸방 하나 얻어든 것이 데뷔하던 73년 봄이었다. 생활 환경은 남루한데다가 희망 또한 없었지만 신인 작가로서 내 눈빛은 광대한 세상을 향해 곧게 열려있었다.
나는 세상 한가운데에 자신을 힘있게 세울 수 있기를 꿈꿨다. 어린 시절부터 거의 선험적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던 고독감도 그때는 무섭지 않았고, 대를 물려온 가난도 두렵지 않았다. 작가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세상과 맞서 싸우는 하나의 빛나는 무기였으며, 동시에 구원의 [썩지 않은 새 동아줄]과도 같았다.
그러나 실패는 이내 확인됐다. 첫 번째 고통은 밤세워 쓴 원고를 발표할 데가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고통은 가난이었다. 단편소설 원고를 들고 몇몇 문예지 편집자를 찾아가곤 했지만 지면을 얻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도대체 작품을 발표해야 세상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세울 수 있을 게 아닌가. 게다가 가난의 사슬 또한 낭만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문학청년인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했다.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나몰래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양복지를 팔러다녔다. 그 시절엔 쌀을 아끼고자 점심을 굶은 날이 더 많았었노라고 아내는 나중에 술회했다. 내 이상과 포부는 상처받았다.
그래도 나는 썼다.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임산부처럼 나의 내부에 들어차 있었다.
연필을 들면 내 감수성의 통로엔 휘황한 수천의 나비떼들이 생동감있게 날아올랐다. 어쩌다가는 아내 몰래 울면서 쓰는 날도 있었다. 나는 작가야,라고 소리내어 중얼거릴 때, 그 혼잣말에 곧잘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작가야.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세상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그러나 작가라는 이름은 언제나 내게 떨리는 성찬이었고 방부제였다.
죽음같은 고독 속에 산 내 젊은 날. 작가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잔인한 고독에 눌려 끝내 죽었거나, 아니면 차가운 세상 때문에 내 영혼이 썩어 오욕의 땅에 묻혔거나 했을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에게서 신인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도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그 이름에게 광영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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