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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 풀잎처럼 눕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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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풀잎처럼 눕다

박범신의 작품 세계 - 「풀잎처럼 눕다」의 호소구조(構呼訴造)

白承喆

 

 

 

1.

박범신의 장편소설 「풀입처럼 눕다」는 79년 3월 12일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어 일 년 동안 대중적 관심과 주목을 받아 온 작품이다.

 

간단히 이 작품의 등장 내력을 내세운 것은 「풀잎처럼 눕다」를 보다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작품적 특질을 밝히는 데 있어 발표 연대가 지닌 특수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979년이라는 시절은 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 다 알다시피 특수한 정치 체제의 붕괴를 그 해에 경험했고 그러한 경험은 단순히 제도의 변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붕괴를 가져오게 된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복합적 요인들이 누적되거나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가 역사적 파국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79년의 민족사적 경험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이른바 70년대적 의식, 70년대적 사회 제 모순들이 초래한 역사 현실의 극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근대화>라고 불리는 경제적 가치의 가속적인 창출은 70년대 초 사회 표면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가 <도시화(都市化)>다. 서구에서는 산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달로 19세기 이래 도시들이 더욱 급격하게 성장하였으며, 산업화 및 도시화는 인구의 변화와 사회 경제적 변화에 특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화의 균형적인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막스 베버의 이론에 따르면 청교도주의의 숨은 힘이다. 노동에 대한 신성한 의무, 강한 윤리적 생활 태도, 절제와 극기가 중심이 된 도덕 감정 등은 19세기 유럽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구 사회의 이와 같은 경제 발달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여 경제적 후진성을 탈피하려는 제3세계의 국가들은 도시란 근대화의 전위지역으로서 경제성장의 촉매 작용을 하며, 근대화의 효과를 점차적으로 파급시켜 농촌지역까지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70년대 우리가 경험했던 도시화의 현상을,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개인의 인성과 동기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심리학적 방법, 또는 사회 변동을 선진 지역의 문화가 후진 지역으로 전파되는 데서 일어난다고 보는 문화 확산론의 방법, 또는 사회 발전을 사회의 기능적 분화로 인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라고 믿는 구조 기능론적 방법들 중 어느 것으로 파악해야 할까 등 여러 가지 문제는 사회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야겠지만, 문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도시화가 빚어내는 인성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인구가 집거해서 사는 일정한 도시의 환경, 즉 높은 인구 밀도와 이질적인 개인들의 집합 등은 도시에 거주하는 개인들의 인간적 성향과 심리 상태, 그리고 사회 생활에 많은 변화를 촉구한다. 사회의 제도, 가치 및 욕구를 변화시켜 낡고 전통적인 것을 대체하며, 새로운 사회생활의 유형과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광범위한 변화를 초래한다.

 

충분한 산업화가 병행되지 않은 이농민(離農民)의 도시 집중에서 오는 불균형이 수많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키며, 빈부 차이의 심화, 빈민의 폭력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도시화가 가져다 주는 심미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얼른 보기에 그것은 감각 생활의 다양화를 가져왔고 심미적인 환상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더 많은 물건이 팔리도록 하기 위해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현란하게 만들어진다. 아름답고 현란한 것은 물건을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팔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고 상업주의적인 방법으로 수단화될 따름이다.

 

여기에 이르러 산업화시대 또는 도시화의 시대가 구조적으로 지니고 있는 왜곡된 심미 기준을 접하게 된다.

가속적인 도시화의 추구는 농촌 사회의 붕괴를 촉진한다. 그 형태는 농촌의 도시화가 아니라 도시를 꿈과 행복이 있는 낙원으로 생각케 하므로 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밀물처럼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도시 문화의 확산이 아니라 농촌 사회의 일방적인 유입 또는 탈출로 도시의 비대화에 비례하여 급속한 전통 사회의 몰락이 진행된다.

 

도시로 새로이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대적인 빈곤층들이다. 이들 빈민들은 인간적 야망, 개척자적인 불굴의 노력, 그리고 애국자의 가치관을 지니긴 했으나 그들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이다. 좋은 조건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 및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소외된 것은 개인적 자질이나 적성 때문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 성격으로서 조성된 주변화(marginalization)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면서 항상 고향시절을 그리워하며 도시의 변두리에서 천대와 멸시를 온 몸으로 버텨 서야 하는 특이한 인간 무리를 이룬다.

 

2.

「풀잎처럼 눕다」는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과 특수성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골 읍내에서 살던 두 젊은이가 도시로 올라와 야망과 꿈을 실현하려 하지만 끝내는 허망한 패배로 끝난다는 줄거리다.

 

삶에 실패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아무데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도시의 골목에 내팽겨쳐진 문도엽이나 뒷골목 사회에서 길들여진 칼잡이 정동오, 맑고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된 조그마한 여자 유은지 등은 모두 도시에서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도시의 힘에 눌려 꿈은 깨지고 희망은 꺾인다.

 

「풀입처럼 눕다」에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농촌을 떠나 그들의 꿈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던 도시에서의 삶이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변모하는가 하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철없는 젊은이들의 주먹 세계와 유아기적 사랑의 풍속도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회적 연관에서 보았을 때 이 작품의 의미와 예술적 가치는 전연 다른 각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한국적 도시화의 비극적 인식을 이 작품은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애당초 우리의 땀과 슬기로 건설되어 온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도시가 어느만큼 비대해지자 이놈은 마침내 우리들을 배반하고 저 혼자 불가사리처럼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도시는 지금 황야나 다름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외피를 벗겨 보면 거기에 드러나는 하이드 같은 얼굴, 황량한 황야의 모습이 도시의 진정한 내경(內景)이다.

 

작품을 끝내고 쓴 작가의 이 말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인공들의 도시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작품을 이끌어가는 기본 정서로 되어 있다.

 

도엽은 형의 가게에서 일을 돌보면서 <난 가야 된단 말야>를 잊지 않는다. 형과 함께 고향에 눌러 산다는 것은 곧 <나를 조금씩 죽이기 위한> 현실이기 때문에 <아무도 내 감옥을 쌓을 수 없어> 칼을 잘 쓰는 정동오와 함께 가겟돈을 훔쳐 밤중에 서울로 도망을 한다. 서울로 오는 트럭에서 <당돌하고 예리하고, 그러면서도 물컵에 담긴 양파의 뿌리처럼 투명해 보이는 은지>와 만나 고향을 등진 세 사람의 서울살이가 시작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처음부터 사회에 눌려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려는 이단적인 세 사람의 인물 조명을 통해 한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를 강기있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은, 괴물 같은 도시는, 강 건너에서 막 밤화장을 끝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도엽은 알고 있었다. 그 치장 뒤의 완강한 배타성을, 뭐든지 먹어치우고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는 탐욕스런 식욕과 피투성이 되지 않으면 시멘트 콘크리트 숲에서 이끼처럼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비리, 그리고 사철 소음과 매연을 묻히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는 피 냄새를……

 

자, 저 괴물 속에 난 뛰어들어야 한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도엽이가 서울로 올라와 겪는 여러 가지 일들, 가령 오주호 사장의 일을 돌봐 주는 깡패로서의 일이라든지, 칼잡이 동오와의 대결, 은지와의 싹트는 사랑 이야기 등은 이 작품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한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도엽의 서울 생활 장면은 작품의 구조상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예술적 의미는 도엽이 고향을 떠나 서울 변두리의 떠돌이 소시민이라는 낮은 지위의 인물형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여 도엽의 삶을 통해 도시화의 여러 모순과 갈등이 제시된다. 오주호와 최장군의 싸움도 개인적 차원의 이해 다툼이라기보다는 사회 변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헤게모니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지배적 자본 세력이 그들의 권력 통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충분한 정당성을 얻기 위한 제도적 기구라고 본다면 급격하게 이루어진 70년대 물량 위주의 도시화가 주민들의 사회적·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들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폭력 수단을 채택하게 되었고 삶의 기회가 좁아진 이농민들은 그 수단에 쉽게 고용되었다.

 

도엽이나 동오의 범죄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간과 지지를 받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아울러 범죄자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피해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도엽이 살아 있던 70년대의 모든 동시대인들은 이 젊은이를 범죄인으로 만든 장본인이요 도엽의 삶의 조건에 올가미를 씌운 다 같은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도엽과 동오을 이렇게 변호해 주고 있다.

도엽과 동오는 풀입처럼 순결한 인간성을 지녔으되 결과적으로 바보고 머저리다.

 

도시화의 환상에 사로잡혔던 이들은 도시로부터 밀려나 도시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품는다. 도시 폭력의 하수인이기도 한 이들은 물리적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와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도시 문화는 그들로부터 등을 돌린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좀더 편해지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로부터 일터를 빼앗기는 모순과도 같다.

<아무리 늦게 출발해도 편히 앞서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있었다. 아무리 땀흘리지 않더라도 더 안락한 의자, 재빠른 직진 코스를 가고 있는 사람들도 세상에 있었다.>--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도엽은 어릴 적에 선물 받았던 하모니카를 지니고 다니며 레오 리오니의 동화책에 심취하기도 하는 여리고 감성적인 내면의 소유자다.

 

작품 속에 나타난 도시의 이미지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시멘트의 정글로서의 이미지와 풀잎으로서의 이미지. 오주호나 최장군과 같은 폭력적이며 권위주의적 인간형과 유은지로 상징되는 정서적이며 감성적인 인간형의 대비를 통해 작가는 도시의 비정과 냉한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늘에 묻힌 연약한 인간성의 내면, 즉 고독·소외감·허망성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악마적 도시로부터 학대받고 있는 인간의 외침은 고향에로의 강렬한 회귀(回歸)의지로 나타난다.

 

병든 은지 어머니의 소망이라든지 도엽이나 동오가 쫓기면서 마지막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고향에의 의지는 도시적 삶이 절망적으로 나타날수록 더욱 강렬하게 구체화된다.

 

도엽은 비로소 깨달았다. 남루하지만 스물 여덟 살의 그가 껴안아야 할 재산의 전부가 그곳에 있음을, 그가 도심지를 부랑하며 목숨까지 걸었던 그 무엇인가가 사실은 그곳의 부러진 갈대 한 줄기만도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팽개치고 떠났던 그곳이 바로 그가 꿈에서도 소망하고 소망하던 삶의 뿌리라는 사실을

 

그곳이란 물론 고향을 뜻하는 말이다. 고향은 또 <새떼 날고 숲이 빛나는 순결인 땅>인 그런 고향이다.

도시적 악마의 화신인 최장군을 인질로 잡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도엽 일당은 야음을 이용해 삼엄한 포위망을 교묘히 뚫고 고향인 D읍으로 향한다.

 

<자유롭기>위하여 고향을 버렸던 이들에게 도시는 <죽은 땅>일 뿐이며 <조만간 우리들까지도 야금야금 잡아먹고 말> 절망과 좌절의 공간이다.

 

도엽과 동오, 그리고 은지는 <사냥감>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철컥철컥, 놀이쇠들이 감기는 금속성, 이쪽으로 몰아, 하는 사냥감을 앞에 둔 가파른 음색. 아무데도 도망칠 곳 없는 노루, 노루 두 마리……그렇다.

 

「풀잎처럼 눕다」의 주제는 프로메테우스적 반항과 시시포스적 절망의 뒤섞인 이중구조를 제시한다. 반항과 숙명론, 기계적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주제가 도사리고 있는.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공간 속에 공존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이 작품의 비극적 세계상이며 화해할 수 없는 갈등과 모순의 세계를 이룬다. 그것은 또 양면가치적이며 역설적인 아이러니의 한 원형을 이룬다. 서로가 배반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도엽의 프로메테우스적 저항과 시시포스적 절망은 바로 우리의 70년대 경험 세계와 일치한다. 급속히 이루어진 도시화 과정에서 황금 만능의 사조는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인간적 가치를 배제하고 물질 위주의 가치관을 내세웠다. 조직 사회의 폭력성, 전통적 가치의 무력, 불법적 욕망의 추구는 사회를 타락으로 이끌어 갔으며 창조의 요람지인 도시를 대중적 광기의 집산지로 떨어뜨렸다. 도엽과 동오 그리고 은지는 이같은 대중적 광기가 추방해 버린 인간 원형으로서, 작고 큰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분신일 따름이다.

 

3.

「풀잎처럼 눕다」의 작품 효과가 극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박범신의 특유한 솜씨와 재질로 평가되어야 한다.

「풀잎처럼 눕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긴 하나, 이 작가의 여러 다른 작품을 통하여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으로 삶의 강렬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소설에 있어 넓은 공간을 펼쳐 보이거나 긴 시간의 양을 보여 주기보다는 삶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렬하게 제시함으로 작품의 특정 효과를 얻는다.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삶의 소용돌이를 완만하게 제시하기보다는 핵심 부분을 고도로 긴장화시켜 집중적으로 표출시킨다. 그의 작품 성격이 날카롭고 첨예하게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이같은 작가적 개성에서 오는 것이다. 웅대하고 광활한 인생의 드라마적 요소보다는 날카롭고 골격적인 한 단면을 확대, 독자들로 하여금 외외성에 놀라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강렬성의 순간 포착은 인물 성격의 창조나 행동 패턴의 변화. 전략적 사건의 조성 등으로도 충분히 성취되고 있지만 문장의 기술적 처리를 통해서도 비정의 격조를 만들어 낸다.

 

인물 성격의 창조를 통해서, 혹은 액션의 양상을 통해서, 혹은 의도적 갈등을 통해서 조성되는 강렬성이 외적인 방법이라면 대화나 지문, 또는 문법적 진술을 통해서 달성되는 강렬성은 내적 상황을 통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꿈에, 은지는 풀을 심었다. 황막학 빈 도시의 거리에서 도엽과 동오가 아스팔트를 뒤집어엎고 있었다. 뗏장을 떠내듯 아스팔트에 삽날을 들이박는 그들의 벗은 어깨뼈엔 건강한 햇살이 얹혀 있었다. 은지도 흙이 드러난 자리마다 쉬지 않고 풀을 심었다. 작고 가냘픈, 그러나 빛보다도 더 싱싱한 풀이었다. 도시의 거리는 끝없이 길고 작업은 힘들었으나 지루하거나 피곤하진 않았다. 풋풋한, 아름다운 노동이었다.

 

이 부분은 도엽과 동오,  그리고 은지의 꿈과 이상이 응축된 장면으로, 은지의 꿈을 통해 나타낸다. 꿈이란 비연속적인 현실로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 경우 그 꿈은 완성된 그림처럼 정확할뿐더러 시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를 준다. <벗은 어깨뼈엔 건강한 햇살이 얹혀 있다>는 묘사나 <작고 가냘픈, 그러나 빛보다 더 싱싱한 풀>이라는 문장, 그리고 <작업은 힘들었으나 지루하거나 피곤하진 않았다. 풋풋한, 아름다운 노동이었다.>라는 표현 등은 사실의 전달보다 사실의 구체화에 역점을 둔 문장이다.

 

도엽이나 동오 또는 그들이 몸담고 살아온 주변적 상황이 위압적이거나 낯설지 않고 부드러움과 우연성을 주는 것도 그것이 문장의 시적인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야수적인 폭력의 장면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장면들이 때로는 세련되게 때로는 환상적으로 전달되는 것 등은 이 작가의 문장이 성취해 놓은 독특한 심미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산새들이 울면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조그맣게 접힌 은지의 한 마리 새였다.

호르래 호르래.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새벽보다 정결하게 우는 새 소리가 들려 왔다.

도엽의 입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은지가 속눈썹을 떨었다. 너무 작고 너무 깨끗해서 해만 떠오르면 그녀의 육신이 눈처럼 녹아 지층에 스며들 것 같았다. 파르스름한 정맥이 흰 피부에 조용히 떠 있었다.

 

바다는, 정맥처럼 푸른 바다는 아직 언덕 너머에 있었다.

비유법으로서 자연이나 사물을 응용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법은 아주 일반적이긴 하지만 박범신의 작품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자연과 인간의 일치와 화해는 시적인 분위기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언어의 지극한 절제, 감성적인 어휘의 구사 능력, 음률적인 문장의 구성 방법 등은 모두 이 작가의 뛰어난 솜씨로 보여진다.

 

풍부한 어휘 감각과 함께 정통적인 수사법을 깨뜨리려는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항상 새롭고 신선한 문학 세계를 추구하려는 작가 정신의 발로로 보인다.

 

<트럭은 이층 건물 앞에서 엔진을 껐다>라는 문장은 사실주의의 문체로서는 부적당할지 모른다. <……앞에서 멈췄다>라고 표현되어야 할 부분이 <……엔진을 껐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은 사실 전달의 새로운 부호의 기능을 한다.

 

<도엽은 발작적으로 그것을 입술로 찍었다>라는 문장에서 <……찍었다>와 같은 표현이나, <그는 바람을 빨아들이듯 거칠게 유방을 한 입 베어 물었다>의 <……베어 물었다>와 같은 진술, <회중전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죽창처럼 날아와 꽂혔다>는 표현의 <죽창처럼 날아와 꽂혔다>라는 부분 등등은 이 작가의 문체 감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문학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제시라는 기능도 지닌다고 볼 때 이 작가의 이와 같은 수사법은 낡고 상투적인 표현의 공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넓힌 경우라고 보여진다.

 

「풀잎처럼 눕다」가 70년대 우리 사회의 한 단면, 도시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인간화의 고통과 불화의 세계를 드러냈다는 점에 이 작품의 문제성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 표제의 <풀잎>이란 어휘 또한 70년대 이른바 민중시 계열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였던 낱말이기도 하다. 소시민에 대한 애정어린 문학적 관점, 경제적 괴물에 희생되는 순결한 영혼에의 향수, 권위주의적 사회 가치에 대한 시시포스적 저항 등은 모두 70년대 시와 산문의 세계가 공통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휴머니즘이었다. 「풀잎처럼 눕다」는 이와 같은 분위기와 상황을 집중적으로 노출시킨 작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도엽이나 동오, 은지 또는 최장군이나 오주호와 같은 인물들의 성격이 좀더 사회성을 획득하고 당대의 비극적 인물로 전형화되었다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잘라졌으리라는 점이다. 악마적 도시의 모순과 갈등을 <알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 사실을 <알리는> 데는 힘이 모자랐다는 점이 이 작품의 숙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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