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박순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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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예지(理智)로 그린 인간학

張  伯  逸

 

 

1

  여류 작가 박순녀는 함남 함흥(咸興) 태생으로, 1928년 9월 1일에 세상에 태어났다. 함남 고등 여학교를 거쳐(1944), 원산 여자 사범 학교 강습과를 수료(1945)한 후 월남,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 영문과를 졸업(1950)했다. 서울 중앙 방송국 문예계(1955∼58), 성루 동명 여고 교사(1956~59), 이후 작가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단편 <케이스워카>(1960)가 조선 일보 신문 문예 현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중편 <스꼴까 장수>, 단편 <아이 러브 유>, <외인촌 입구>, <임금의 시>, <로렐라이의 기억>, <정조>, <영어열(英語熱)>, <잃어버린 과거>, <고독한 방관자> 등의 역작을 발표했다.

    <임금의 귀>는 한 여성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주인공 명화는 자기의 작품을 읽었다면서 세계 역사 연표라는 소사전을 보내 준 지숙이라는 동년배의 여성을 알게 된다. 자기의 내면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말과 움직임을 찾아 헤매는 명화는 지숙이에게서 좋은 자극과 격려를 받으면서도 지숙은 경제에 이바지한 공으로 딸을 프랑스까지 보낼 수 있는 재산가의 딸이라는 것을 통감한다. 교육에 이바지한다는 말이 즉 학교 재벌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그러나 명화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또 않을 자기를 다짐한다. 피의 자국이 임리(淋 )했던 자기의 발자국, 그것은 맨발로 자기처럼 뛰어본 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있는 힘을 다한 작업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 밖에 장편 <난(蘭)>은 여자 사범 학교 기숙사에 든 네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그린작품이다. 단편 <어떤 파리(巴里)>로 현대 문학사 신인 문학상을 받았으며, 일본 아사히 신문사 (朝日新聞社)의 《아시아 리뷰》지의 아시아 문학 특집호에 전역 게재되었다.

  이 외에도 단편 <싸움의 날의 동포>, <단절>, <남자 친구>, <전시대적 이야기>, <장갑을 벗는 여자>, <빨간 한복의 여인>, <고색 찬란>, <검비 아내의 소녀>, <이웃 돕기>,<꿈많은 손>, <잘못 온 청년>, <감사합니다>, <밤에서 밤으로>, <사에서 만난 사람>, <생명 안치소>, <센티멘털져니>, <별 같은 아이>, <우리는 대열(隊列), 중편 소설 <영가(靈歌)>, 장편 소설 <강(姜)바위돌씨(氏)>, <눈 속에 가슴속에>, <어느 계절과 함께>, <먼 나라의 강> 등 괄목할 만한 문학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2

  박순녀의 대부분의 작품 세계는 여인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국민 학교 학생에서 중학생, 고등 학생들의 학창 생활을 다루고 있으며, 디자이너 같은 직업 여성 또는 가정 주부 등 여인들의 얼굴도 다양하다. 여학생들의 주소를 살피면 거의가 이북 함흥쯤이 고향이고. 해방 후 월남,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결혼 생활에 실패한 여인도 있으며, 그 후 재혼한 열굴도 보인다.

  그녀들의 성격은 한결같이 여성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말 그대로 마음씨가 아름답고 사랑을 대인 관계의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자유와 이지적 생활을 찾는 얼굴들이다.

  이미 작가의 성장 계보에서 엿보이듯 작품 주인공들은 박순녀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어느 의미에서 주인공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자신을 통한 인생의 해석과 이해임을 짐작케 한다.

  어느 작품에서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애이다. 인간 옹호에의 사랑이 작품 배후에서 스스로 우러나옴을 읽는다. 무한한 애정으로 감싸면서도 사리를 분명하게 밝히려는 이지적 인격을 버리지 않는다.

  사건의 전개나 그 처리에 있어서도 그의 이지적인 사고는 도처에서 엿보인다. 하나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리되, 그로부터 인간적 삶을 제시하면서 문제 해결에의 이지적 태도를 잊지 않는다. 곧 현실 속에서 생활하는 일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생활에의 길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는 본 전집의 여러 소설에서도 엿보인다.

  먼저 단편 <아이 러브 유>를 본다. 이 소설은 작가의 여학생 시절을 엿보게 하는, 학창 시절이 그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여학교 때란 여성의 일생을 통해 가장 꿈이 많은 동경에서의 시절일 것이다. 엄한 학칙에 순응하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 엉뚱한 모험을 즐기려는 나이요, 신비스러운 이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의 꿈이 그들에겐 있다. 작품 <아이 러브 유>도 바로 이런 여학생들의 꿈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일제 때의 여학교란 오늘의 그것과는 다르다. 교칙이 엄하기란 오늘이나 그때나 다를 바 없겠지만 교육 방법이 오늘과는 달랐다. 일제하이고 보면 여학교 교육 또한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여학생들도 이른바 근로 동원이라는 미명하에 노력 봉사에 동원 되었고, 간호원 지원을 독촉하는 등 한마디로 일제의 제물, 그것을 강요하는 교육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이 러브 유>는 바로 그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일제하의 교육이었으면서도 여학생으로서의 호기심과 티없는 장난을 펼쳐 보여 준 것이 곧 이 작품일 것이다.

  어느 날. 이 학교에 야마끼라는 일어와 작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부임해 왔다, 선생의 이름 대신에 별명짓기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야마끼 선생에세 '브라운씨'라는 별명을 증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온 소문인지 '브라운씨'의 발가락이 여섯 개인 육발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여학생들은 어떻게 하든지 그 발가락을 보겠다고 후작을 부린다. 이를테면 '브라운씨'의 양말을 벗겨 보겠다는 것이 하나의 과제라면 과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심기의 근로 동원이 있었다. 드디어 좋은 찬스가 왔다고 학생들은 반겼다. 모를 심으려면 어차피 양말을 벗어야 하고, 그 사이에 확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 그 기회를 노렸지만 '브아운씨'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모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학생들은 더 의심이 가는 것이었다. 분명 육발이기 때문에 감추기 위한 꾀병으로 여겼다.

  모심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봉숙 여학생은 '브라운씨' 뒤에서 뜻있는 노래를 던진다.

  "코는 하나요, 눈은 둘이요, 입도 하나요, 발가락은 여섯 개."

  '브라운씨'를 생각하고 하는 노래였지만 이런 노래에도 '브라운씨'로부터는 육발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실망한 학생들은 또 다른 익살을 부렸다.

  마침, 그들 옆을 도망병처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범 학생들을 향해 '아이 러브 유'를 장난 삼아 토해 버렸다. '브라운씨'의 육발을 확인하려다 실패한 봉숙이의 말이었다. 뒤를 따라오던 교장 선생이 이 말을 들었고, 교장 선생으로부터 심한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봉숙과 '나'는 교무실에 꿇어앉아 교장 선생과 훈육 선생으로부터 갖은 욕을 듣는다. 그것이 학생으로서 할 말이냐는 점에서 호된 꾸중을 듣는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군대로 입영해 가는 출정 병사들을 전송하기 위해 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로 여학생들은 학교의 지시대로 역으로 나갔다. 일제의 간호원으로 지망해 가는 '그녀'를 전송하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갓난아이를 떼 놓고 간호원으로 나가는 모자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용기를 동경하게 된다. 이런 따분한 학교 생활보다는 차라리 적십자 간호원으로 지망해 보릴까 하고 장난 삼아 하는 말을 교장이 듣곤 다음날부터 지망 독촉을 받는다. 갖은 감언으로 지원서를 쓸 것을 종용하나, 학생들은 한결같이 이에 반대했고,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는 줄거리. 해방과 더불어 주인공들은 서울로 남하했고,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브라운씨'의 발가락이 육발이 아니더라는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제하의 시대적 불행을 배경으로 깔면서 여학교 시절의 소녀적 낭만 속에 펼쳐지는 호기심과 그들 나름대로의 한 가닥 저항을 읽게 한다. 그러면서 그로부터 무한한 인간애의 휴머니즘에 젖게 한다.  

  한편 이러한 인간애의 휴머니즘은 소설 내용은 다르지만 <잘못 온 청년>에서도 접하게 된다. 정과정으로 이어가는 인간애가 무엇인가를 이로부터 실감한다.

  <잘못 온 청년>들은 홍섭, 익재, 기범 등의 월남민들이다. 이들은 북괴를 거역하는 함흥 학생 사건에 가담한 학생들이었고, 이를 계기로 월남한 사람들이다. 월남민으로서 이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서울에서 이들의 유일한 빽이란  그들이 이북에서 듣던 것과는 딴판인 가난한 '나'밖에 없다. 방이라고 해야 두 개, 다다미방이 고작이다.

  어느 날 이 세 청년이 '나'를 찾아 왔다. 같은 또래이건만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반가운 정이야 어디에다 비하랴만 그들은 반기기엔 생활이 너무나도 구차하다. 또 남편이 어떻게 받아 줄는지 그걸 생각하면 차라리 찾아오지 않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으면 '누나'인 내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더니, 생계를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미군 부대에라도 쑤시고 들어가 목구멍에 풀칠할 곳을 찾기에 혈안이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의지와 패기만은 만만했다. 하나만 떨어져도 못 살기라도 하듯 그들은 한 형제처럼 붙어다녔고, 매사를 함께 해 나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외롭기 그지없는 그들, 외로움에 지쳐 '나'를 찾아와선 되레 나를 위로해 주는 그들, 플루트, 파곳, 호른 등을 어디서 구했는지 그것들을 연주하며 날 위로해 줄 땐 사랑으로 불타는 눈물이 솟아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그들의 옷은 군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고, 6개월 후면 육군 소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군인으로의 패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고, 그 패기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듯했다.

  언젠가 남편과 이들 사이에 토론이 있었다. 남편은 북괴가 쳐내려 올 것을 예언했고, 그때 살려면 도망을 쳐야 하는데 뭣 때문에 군에 입대했느냐고 육사 입교의 반대론을 펴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한결같이 반대 의사를 표명, 만일 북괴가 밀고 온다면 스스로 나아가 싸울 결의를 굳게 했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지키겠는가고 응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그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었다.

  6개월 후 그들은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고, 또 셋이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다. 군인이 된 뒤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를 찾아주곤 했다. 남편은 그 후 나와의 이혼을 선언하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북괴의 남침이 있었다. 6.25가 일어난 것이다. 분명 세 청년들은 북괴를 맞아 용감한 싸움을 하였겠지만 6.25 후에도 영 소식이 없었다. 전사를 했는지 아니면 '나'를 잊어버렸는지 세월은 흐르건만 생사의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실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 통이 편지가 월남으로부터 날아들었다. 그 편지로 홍섭과 익재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되고 찾아오지 못한 까닭을 알게 된다. 그것은 기범이가 보낸 편지였다.

  그러나 홍섭이도, 익재도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도 역시 언젠가는 목숨을 잃겠지요.

  우리가 동원된 과거의 싸움이나 현재의 싸움이 후세에 어떻게 평가될지 저는 모릅니다. 그 계산을 할 수 있었다면 군복을 입는 사람은 되지 않았겠지요.

  저는 저 나름의 욕구 불만으로 괴로워질 때면 제 군복을 한참씩 내려다 봅니다. ……그 군복은 얼마나 무능한 청년들을 굴욕으로부터 건져 주고. 전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 무한한 애석을 남겨 주는 영광된 죽음을 갖다 주곤 했을까요. 혹 식자( 者)들이 우리를 파멸의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는 조국의 제물이라 해도 저는 기꺼이 그 제물로 생애를 끝마치고 저의 몸 위로 시대의 묵중한 차륜이 딛고 넘어 가는 것은 견디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보내 드리는 이 열매는 이전에 누님을 찾아가 세 명의 꼭 같이 무능한 청년이 기념으로 보내는 것이라 알고 어디엔가 심어 주십시오.

  이것은 월남에서 보낸 기범의 편지의 일부이다. 이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듯 전쟁을 통한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깨닫게 한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를 심원으로부터 들여다보게도 한다. 그 심원을 들여다 보면서 조국의 제물이 됨에 목숨은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인간의 신념을 읽는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신념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이지적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그 이지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인간애로부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캔다.

  기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별 것도 아니다. 그날그날 남이 살아가는 방법을 되풀이하며 일반적인 세상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본래적인 자기로서 산다기보다는 퇴폐적인 세상 사람으로 풍설(風說), 호기심, 애매성 등으로 은폐시키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 나를 찾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이라곤 할 수 없다. 일상적인 생활에 젖어 유용적(有用的)인 물건에 사로잡힌 나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영업이 있을 뿐이다. 생활에의 영업, 그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일상적인 입장에 수반되는 은폐적인 경향에 반항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홍섭, 익재, 기범의 세 청년은 그런 은폐적인 생활에 반항했던 생활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적어도 일반적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생활신념 속에서 자아의 철학을 찾은 사람들이다. 자기의 현 존재에 있어서 하나의 형식을 꾀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 혁신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찾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 현 존재의 혁신이 어떻게 가능하며, 본래적인 실존에의 결단적 돌진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그것을 세 청년의 삶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어 <어떤 파리>에 이르면 실존에의 각성을 대자(對自)보다는 대타(對他)적인 문제에서 각성시킨다. 대자가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대타는 사회에 관한 것이다. 자아에 관한 것은 바로 개인 윤리를 뜻하는 말이고, 사회에 관한 것은 사회 윤리를 가리킨다.

 

  작품 <어떤 파리>는 모든 사람들이 동경에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 간첩 혐의로 잡혀 온 진영이를 놓고 흥재와 지연간의 토론과 회상으로부터 전개된다.

 

  이들 세 남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다. 이제 흥재는 시인이 되었고 ,진영이는 남편을 따라 간첩 행위를 범했다. 과거의 성장 과정으로 보면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신분이건만 남편을 따라 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돼 버렸다. 지연은 현재 외과의사의 아내로서 평범한 주부에 불과하다. 지연은 진영의 소식을 듣고 진영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쓴다. 누구보다도 그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흥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흥재는 증언할 것을 거부한다.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포로로 석방된 자신의 신분을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언젠가 어떤 증언을 하러 갔다가 '검은 차'의 빛깔에 완전히 압도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빛의 마법'---그것은 사유를 혼란으로 모는 것이었다. 진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꾀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아와 진상의 충돌에서 도피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의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우리 선생을 돌려 달라'고 철없는 국민학생들이 벌인 데모의 주동자를 찾기 위한 수사관들과 아홉 살짜리 아들과의 심야의 대좌에서도 엿보게 된다.

 

  "B국민 학교 3학년 2반에서 오늘 데모가 있었지?"

  수첩의 사나이는 물었다. 아홉 살의 어린이를 놓고 순 직업적일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그것은 사회 봉사 관념으로 굳어진 압력조의 목소리였다.

 

  "왜 데모했지?"

  "우리 선생님 도루 오시라구요."

  "어떻게 시작됐지?"

  "어떻게라니요?"

  명쾌하게 반문한다.

 "응, 말하자면 누가 하자고 해서 시작했냐 말이야."

  "우리들이요."

  "그런 생각을 누가 맨 먼저 했냐 말이다."

  "내 옆의 아이가여."

  "그 아이 이름이 뭐냐?"

  조서와 수첩의 두 사나이가 함께 흥분을 보인다.

  "몰라요."

  "왜?"

  "내 옆에 누가 있은지 모르겠는걸요."

  "잘 생각해봐. 누가 하라고 했지, 맨 먼저?"

 

  이것은 수사관과 아홉 살 짜리 아들과의 대화이다. 수사관은 주동자를 찾아 내기 위한 유도 심문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대답이 흐리다. 지연이가 진영의 구속에서 직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국에서는 진영이를 간첩 활동의 협조자로 판단하지만 지연은 진영이가 남편의 사랑에 순(殉)한 것으로 짐작한다.

 

  결국, 이 작품은 대타적 관계에 있어서의 자아의 성실성을 찾아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극한 상황에서의 자아 발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와의 충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대자와 대타와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 충돌 속에서의 자기 발견인 것이다. 한계 정세에 놓인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제시하면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그 대결로부터 진정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철학적 의미일 것이다.

 

 3

  이상에서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작가 박순녀의 작품 세계를 찾아 보았다.

  이미 말한 대로 그의 소설엔 인간애를 그리워 찾으면서도 그것을 찾음에 있어 이지적으로 추구한다. 한결같이 여성 중심의 세계요 여성 그것에의 이해와 이해를 촉구하면서도 휴머니즘적 애정으로써 옹호하고 이성으로써 사리를 판단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부드러운 필치로 전개해 가면서도 사건을 제시함에 리얼리티로 추구해 가는 섬세한 문장, 애정 속에서 이지로 판단하는 비평 정신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의 해석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서도 그의 소설은  그만이 갖는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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