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박경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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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박경수(朴敬洙)의 작품 세계 - 농민 문학의 平原

任 重 彬

 

 

1

  <향토기(鄕土記)>의 작가 박경수는 자전적인 그의 많은 소설에 보이는 대로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으로는 국민학교밖에 거친 것이 없이 독학으로 성가(成家)한 놀라운 문학인의 한 사람이다. 그가 어엿한 작가가 되는 과정의 일단은 단편 <작은 왕국>의 서두에서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그는 충청도 어느 보잘것없는 산촌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 곳에서 그는 국민학교만을 마치고 이래 그의 부친이 짓는 농사일을 거들었었다.

 

  그러한 그가 지금은 어엿한, 아주 어엿한 서울 사람〔작가〕이 된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 4급 공무원〔작가〕이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중학교 대학교에 가 낮에 공부할 때 그는 논밭에서 일을 했고, 그들이 밤에 편히 자고 있을 때 그는 강의록을 읽었다. 그나마 남들이 자자는 그 밤마저도 그에게는 완전한 자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안은 필자)

 

  1930년 충남 서천(逝川) 한산(韓山)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세에 소학교를 마치고 농사짓기에 땀을 아끼지 않는 한편 밤을 낮삼아 피나는 독학을 해 나갔다. 해방되던 해 16세의 박경수 소년은 자동차 정비공으로 운전 기사의 기술까지 습득하였다.

 

  그래도 소년 시절이 러시아의 막심 고리끼보다는 다소 숨통이 트인 편인 그는 농사짓는 기사로서 고학의 자습 기간을 거쳐 20세에 국민학교 교사 자격 검정 시험에 너끈히 합격하는 실력을 과시한다. 이제 그는 사범 학교를 마친 실력과 같이 되어 교단에 서게 되었다. 국민학교 교사로 만족할 수 없던 그는 4년 뒤에 중학교 교사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대학 졸업자와 다름없이 중등 학교의 교단에 설 수 있었다.

 

  젊은 교사 박경수는 그러나 교육자로서보다도 작가 지망생으로 문학 수업에 몰두하면서 25세에 육군에 입대하였다. 군문(軍門)에 몸을 담은 20대 후반기는 박경수에 있어서 과연 작가 수업의 요람기였고, 소설가 탄생의 획기적인 시점이었다. 그것도 《사상계(思想界)》지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작품 활동은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곧 1955년에 《사상계》 창간 2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 단편 소설 <그들이>가 입선되고, 2년 뒤인 1957년 단편 <닭> 그리고 단편 <환생(還生)>이 계속 이 잡지에 발표되면서 신진 작가의 얼굴은 문단에 차츰 낯익게 되었다.

 

  군에서 제대하자 갓 30대에 접어든 그는 《사상계》사에 입사한 기자로서 창작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1959년에 <혈맥(血脈)> <하행 열차> <그 아내> <이빨과 발톱>, 그리고 <김광재군(金光載君)> 등에 이어 1961년에는 <절벽> <구돌재> 등의 단편을 계속 발표한다.

 

 4·19와 5·19을 넘기는 그 무렵부터 그는 건설부 공보실에 근무하기도 하나 창작에 전념하고자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소설 쓰는 이외의 생활을 일체 유보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해마다 작품이 쏟아져 나온다.

 

  <우수(憂愁)와의 결별> <박람회>(64년), <싸늘한 계절> <우울한 마을> <야수(夜嗽)>(63년), <잃어버린 가을> <낙인(烙印)> <춘난(春暖)> <애국자> <속(續) 애국자> <화려한 귀성(歸省)>(64년), <태아(胎芽)의 해> <고독한 잠을> <육체의 천사> <어느 빈농(貧農)의 세대> <성년(成年)의 비밀>(65년), <어느 충직한 짐승 이야기>(72년) 등이 그것들이다.

   이 작가가 장편 소설을 선보이기는 갓 40대에 접어들어서였다. 문제의 소설 <동토(凍土)>를 1969년 1년간 《신동아(新東亞)》 지에 연재하면서 그의 작가적 위치는 확고해졌다. 이어서 <흔들리는 산하(山河)> <이화중선(李花中仙)> <청산별곡(靑山別曲)>(71년), <종이 울리는 새벽>(72년), 소년 소설<임꺽정>(73년), <여인도(女人圖)>(74년), 전기 소설 <이 때 이렇게 사는 사람> <폐소기(廢巢記)>(77년) 등의 장편물이 쏟아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동토>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뒤 수필집 <이 추수기(秋收記)에>를 72년에 간행했고, 장편 <향토기>와 창작집 <화려한 귀성>을 77년에 간행했으며, 이에 앞서 71년에는 제 8회 한국 문학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 문인 협회 상임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적도 있지만, 근래의 작가 박경수는 다만 충직하게 창작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역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귀향사(歸鄕史)>나 <비(碑)>는 자전적인 귀소문학(歸巢文學), 그리고 농민 문학으로서의 박 경수 문학세계를 충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극형(極刑)> 역시 '전직 소설가'를 작중 인물로 설정하여 무기력한 개인에 대해 자기 고백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수록작품 <귀향사(歸鄕史)>나 <비(碑)> <극형(極刑)> 등에 일관하여 흐르는 박경수 문학의 주제는 그의 다른 작품 <동토>와 <향토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그의 작품 전반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하여 장편 <동토>와 <흔들리는 산하> (<향토기>로 개제)를 통하여 그의 문학 세계를 살펴 보기로 한다.

 

  <동토>나 <향토기> 어느 작품에든 흙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제기되어 있어 이 작가가 대지(大地)의 소설가임을 전제하게 한다. 태어나 자라며 살아 온 곳을 다시없이 거룩한 땅으로 알고, 이 작가는 아무런 가식이나 과장없이 떳떳하게 돌이켜보고 서술해 나간다. 이러한 작가의 자세는 전투하듯 사는 강인한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먹고 살 걱정이 문학이 되는 얘기'에서 실토했듯이

 

  ……새벽에 눈을 뜨면 이런저런 먹고 살 걱정으로 다시 잠이 들지 않습니다. 원고지를 꺼내 놓고 그 걱정거리를 적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 한국 문학이 되는 것입니다.

 

라는 허식 없는 리얼리즘의 평원(平原)을 열어 보인 바로 그 입장이다. 전통 사회로서의 농촌 세태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 박경수의 농민 문학은 승리의 서경시(敍景詩)를 이룬다. 암담한 전통 사회의 유산이 온축된 채 좀처럼 가셔질 줄 모르지만, 그 비애 속에 인간애(人間愛)의 정감(情感)이 폭발적으로 집약되고는 한다. 더욱이나 일단 도회지에 진출해 있다가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 되는 생활 현장으로서의 농촌인 점에서 박경수의 문학은 삶의 타개책을 뜨겁게 모색해 보이려는 귀소(歸巢)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지식인 귀향의 감미로운 허세와의 차원이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동토>에서 주인공 강문호(康文浩)는 품팔이 농사꾼과 직부(織婦) 사이에서 태어남을 받은 현직 교사로 농민들과 일체감을 지니고 있다. 조금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거나 지적 우월감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지 않는, 듬직한 연대 의식(連帶意識)을 지닌다.

 

   이래서, 나는 그들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한번 싹이 트기만 하면 한이 없이 뻗어나가는 뿌리를 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호기심을 가질 것도 없고, 그들 개개인의 존재가 신비로울 것도 없고,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숨겨진 별다른 생활이 있을 것도 업는 것이다.

 

  흔히 이런 사람들한테 배울 것이 많다고들 하는 말을 듣게 된다. 흔히 고귀한 사람들과 이들을 비교하여 전자가 뭐라고 이야기 할 때면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알 수가 있지만, 반면에 이들 보잘것없는 농촌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끊임없는 경탄을 일으킨다고도 말한다. 흔히 이들을 질박 정직(質朴正直)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인간의 상징이라고, 그리고 이들은 자애 깊은 자연과 일체가 되어 생활을 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 생활은 도시의 타락한 자들로는 도저히 바랄 수도 없는 인간으로의 건전함과 전일(全一)힘을 지니고 있다고도 말한다. 이들이 보여 주는 그 안정(安定)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생활은 그들 개개인의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민적 덕성(德性)의 중심적 원천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농민은 국가를 형성한 가장 귀중한 존재들이 되고, 그들이 사는 농촌은 낙원(樂園)이라고들 한다.

 

  이 얼마나 그들을,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모르는 말인가? 아니다. 이 얼마나 이들에 대한 경멸을 가장하고 하는 위선자들의 말인가? 비록 가난은 하지만 그들은 그 무구(無垢)한 생활과 도덕적 근로에 대한 보수로서 신의 은총의 손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끊임없는 기적, 즉 뿌린 씨는 틀림없이 열매를 맺는 그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들을 슬프게 해 온 말들인가?

 

  그것을 나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그리고 그 가난이 뭔가를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천사이던 그들의 얼굴에 그같이 추한 주름살 투성이의 모습을 찍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를, 그 건강한 육체를 그렇게도 빨리 구부려뜨린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 모를 것이라고는 나에게는 없다. 그들의 감각은 곧 나의 감각, 그들이 느끼는 사물을 내 감각은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입는 누더기 옷을 나는 내 피부로 느낀다. 그들이 먹는 그것은 그대로 내 시장기를 가시게 한다. 나는 그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위를 채워 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희미한 반응이 아니라 예리하고도 정확한 반응인 것이었다.

   재래의 속류(俗流) 농촌 문학을 극복하는 이 결정적인 선언에서 농민의 고통은 작가 자신의 고통이 되고, 그들의 일거 일동이 예리하고도 정확한 반응을 일으킨다. 농민의 분신인 작가 박경수가 소박한 농촌 소설가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농민 작가의 자리에 있음은 결코 우연스런 일일 수 없다.

 

  농민들이 어떠한 참상에 놓여 있었던가, 봉건 사회의 제도적·구조적 허구성이 어떠한 운명을 농촌 사회에 강요했던가? 이 작가는 농민들이 농촌 사회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명료하게도 직정적(直情的)으로 호소하기에 앞장 선다. 다시 <동토>의 주인공이 설파하는 주목할 대목이 있다.

 

 "태어난 게 왜 잘못인가요. 사람은 다 똑같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게 잘못입니다. 소위 고귀한 사람들은 저희 같은 평민들이 그런 생각들을 가지기를 바라고, 또 그런 생각밖에는 못 가지도록 여러 가지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왕후(王侯)에게 불만을 가지면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혹독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절대로 가난하게 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부자의 구박을 당연한 것으로 받는 것이지요."

 

'그럴싸한 말이네.'

 

계층 상호간의 이 완고벽은 <향토기>에 와서 더욱 날카로운 시선을 보인다.

  흔히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은 못 먹을 것들을 먹고 사는데,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은 이밥만을 먹고 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가령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는 격으로 그 예들이 세상에는 하도 많으니 모순이랄 것도 없다.

  그런 중의 하나가 이 고장의 여인들이 여름철의 고급 옷감으로 직조하는 모시다. 고을(현재는 面으로 한산면) 전체로는 전국적으로도 그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불과 50호 남짓한 이 마을에서만도 하룻장 동안에 평균 여남은 필씩의 모시가 생산되건만, 마을 안에서 그것을 입어 보는 사람이란 이장네 내외와 그 딸들 정도다. 역시 이장네 집은 모시를 하지 않는다.

 

  사냥개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그 자신의 먹이를 삼기 위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가 농사꾼이 짓는 다른 농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모시에도 적용된다.

 

  사실 농사짓는 사람 따로 있고, 그것을 먹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어찌보면 지극히 온당하게 보이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이 모시라는 것도 그렇다. 잘 먹고 앉아서 농사짓는 농사꾼 없듯이 비단옷을 입고 베틀에 앉아서 모시를 짜는 직녀도 없다. 참말이지 쌀이란 것이 얼마나 귀한 먹을 것이고, 이 모시가 얼마나 귀한 옷감인가! 이 귀한 것들이 귀하신 분네들의 식사가 되고, 옷감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쌀을 주식으로 먹는 그 귀한 분네들이, 그 쌀이 어떻게 하여 나오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이 모시를 입는 분네들이, 그것이 어떻게 하여 나오는 것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이 참 기한 백옥 같은 살갗에다가 걸치는 잠자리 날개옷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얼마나 천하고, 헐벗고, 굶주린 여인네들의 손에 의하여 짜여지는 것인가는 모른다. 엿을 침을 뱉어 늘인다는 것을 알지만, 이 모시가 그 미천하여 보잘것없는 여인들의 침 묻은 혀로 일일이 핥아서 이빨로 짜개어 된 올로 짜여지는 것임은 모른다. 공장에서 거대한 기계의 스위치를 눌러놓고 큰 주판알을 퉁기며 1분간에 몇백 척씩 대수롭잖게 짜내는 비단은 알지만, 그것이 얼마나 긴 기간 동안 그 미천한 여인들의 눈물과 한숨과 여러 사연들이 올마다에 배에서 나오는 것인가는 모른다.

 

  이러한 근원적인 모순 현상과 부조화 사례를 염두에 둘 때 문제작 <향토기>는 미온적인 새마을 건설로의 귀착(歸着)에도 불구하고, 변천 시기에 놓인 한국 농촌 사회의 독자적인 단면이 아닐 수 없고, 농민들이 자각해 살아가는 긍정적 특성의 이모저모를 보여 주는 농촌 리얼리즘 문학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아니 할 수 없다.

 

 

3

  <향토기>의 이야기 전개는 대학 중퇴자로 귀향한 실의의 청년 송학규의 편력과 회심(悔心)을 담고 있다. 학규와의 사랑 때문에 여대마저 그만두고 애인을 따라와 보따리 장수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윤주 또한 시련 속에 놓여 있다. 휴전 직후의 농촌 정경이 주림과 헐벗음을 면치 못하는 참담한 실태로 묘사된다. 고향에 돌아와 노름이나 하여 윤주를 괴롭히며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학규는 병역 기피자이기까지 하다. 학규와의 관계 때문에 유복한 가정에서 버림받고 남편의 고향에 따라와 갖은 신고(辛苦)를 겪어야 하는 윤주로서도 암담한 나날이다. 윤주에게 격려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을에서 모시를 제일 잘 짜는 시어머니 망천댁이다. 삯베를 짜는 망천댁의 따뜻한 그늘 아래에서 윤주는 괴로운 나날을 참고 견딘다. 학규의 아버지 치서영감 또한 의지를 북돋는 힘이 되어 준다. 이제 학규는 마음을 바로 잡게 되나 때마침 병역기피로 강제 입영에 끌려 간다. 윤주는 그 무렵 한성 상회 주인에게 몸을 더럽히자 정처 없이 타향으로 흘러간다. 잉태중인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남편 앞에 언젠가 속죄할 마음을 품고 있다.

 

  여러 해가 지나 학규는 제대를 하는 길로 <신정계(新政界)>라는 잡지를 하는 친구를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으며 서울에 머물게 된다. 그런 어느 날 뜻밖에도 윤주와 재회한다. 어린애를 데리고 온 아내를 통하여 식모살이까지 해온 가파른 고난의 역정을 듣고 지난날의 상처를 용서하게 되며, 새 생활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울에서 산다는 일이 뜻과 같지 못하게 되는 판에 아내 윤주가 중병에 걸린다. 윤주의 전지(轉地) 요양의 필요성에 따라 학규 가족은 고향의 품에 귀소(歸巢)하기로 계획한다. 먼저 귀향하는 길에 한성 상회 주인댁을 만나 그 동안 가슴에 맺혀 있던 보복을 감행하고 난 학규는 새로운 결의로 슬픔에 빠진 고향 사람들을 위하여 할 일을 모색해 나간다.

 

  비록 가난한 고향이요, 그들 부부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준 고향이긴 하지만 매를 준 어머니가 훗날에는 더욱 그립듯이 그 고향에 끌리는 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끌리는 정에 겨워 학규는 고향에다 새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린다. 윤주의 건강이 회복됨과 함께 그는 이상촌 건설을 추진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이미 문제의 단편 <화려한 귀성>에 명료하게 제기된 숙원은 어찌되는 셈인가?

 

  내가 동네의 부잣집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건 좀 자라서였다. 부자 사람들은 도무지 인정이라는 게 없고 돈밖에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자기네들의 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갖는 악랄한 짓과 행패를 다하기 때문이었다. 일을 시키고 품삯을 차일피일하고 미루어 가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았다. 좀더 구박을 주고 배고픔을 주자는 심사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수해지고 또 헐값으로 데려다 부려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기가 지은 곡식을 직접 먹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일단 부자네 창고 속에 빚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을 다시 장리(長利)로 꾸어다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짓을 몇 해만 반복하면 이번에는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밭까지가 아주 부자한테 넘어가고 마는 것이었다. 그로부터는 거의 부자의 노예가 되다시피하여 간신히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자는 더욱더욱 부자가 되게 마련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욱 가난해지기로 마련이었다. 논을 살 만한 사람은 한둘의 부자로 한정되어 있는데 팔아야 할 사람은 많기 때문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논밭을 똥값으로 눌러 놓고 사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나는 미워했다.

 

  예기치 않은 장모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까지 물려받아 하루아침에 행운아가 된 학규는 마을 사람들의 이재민 구호에 앞장서는가 하면, 집 잃은 사람들에게 주택을 지을 자금도 대주는 선행을 베푼다. 화해의 바람을 일으키며 가난을 구제할 근본적인 농촌 부흥의 설계에 따라 지난날 증오해 마지 않았어야 할 돈 있고 세력 있는 서울댁이며 이장(里長)의 협조를 얻게 된다. 그 마을 출신의 세기적 인물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행적 비슷한 장한 일에 앞장서는 새마을 건설의 기수 장학규가 막대한 자산과 열성을 아끼지 않고 농촌 사회를 이상 사회로 가꿔 나가려는 부푼 꿈에 따라 농촌 마을에는 생기가 넘친다. 새로 지은 공회당 마당에서 흥겨운 잔치가 벌어지고 마을 사람들과 결의도 새로이하는 줄거리로 <향토기>는 끝난다. 이 작품은 요란스런 이상주의를 제거한 점에서 농민 소설로 성공을 거두는 반면, 너무도 애매한 정착 의지에 따른 이상촌의 접합으로 오히려 예술 성과의 하강을 초래한다. 다른 작품들에서 예리하게 제기했던 문제들이 지나친 우연성에 내맡겨 버리는 안일벽 탓인지 변증법적 발전보다는 소박한 인정미의 긍정적 지평에 안착하고 만다. 이를테면 단편 <애국자>의 주인공이 끝내 자유를 쟁취하지 못하고 어떤 배경의 혜택에 의해서 풀려나듯이 <향토기> 또한 농촌 구조의 근본악을 방치해 둔 채 뜨거운 인정으로 이상촌을 꾸미려는 저의가 앞서 생활이나 풍속을 개량은 할지언정 기본 구조를 크게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계점에 다다를지 모른다. 이 회심의 역작이 아쉬움을 남기는 구석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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