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박영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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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신을 향한 절실한 기도

정창범

 

 

 

1

박영준은 1976년에 작고했다. 오랜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연세대 문과 대학장으로 재직 중 정년을 며칠 앞두고 운명한 것이다. 학교 선배로서 때로는 동료 직원으로서 인간 박영준을 대해 온 필자에겐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문과 대학장 직에 있기 전엔 강의만 마치면 곧장 시청 근처 '가화' 다방에 들러 오후 한 때를 보내곤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그 집 커피 맛이 유별나게 좋았다. 그래서 그를 찾는 사람들은 커피를 맛보고 그의 커피 취미가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그 집 단골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한때 그 다방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 것은 박영준도 만나고 커피 맛도 볼 겸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수월찮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방 마담은 박영준에게 깍듯이 경의를 표하면서도 돈을 안 받고 커피를 대접하는 따위의 서비스는 베풀지 않았던 것 같다. 장삿속에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박영준의 성품을 잘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는 여유를 가끔 보였으나, 무뚝뚝하고 투박한 그 표정은 마음 약한 사람들에겐 가까이하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

 

다방 마담이 그에게 한 잔의 커피라도 공짜로 대접하지 않은 것은, 만약에 커피 값을 받지 않을 경우 그 무서운 표정으로 미루어 그가 모서운 호령을 퍼붓거나 이튿날부터 발을 딱 끊고 나타나지 않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그는 경우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사람에겐 상대를 하지 않는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지만 경우 없이 날뛰는 사람을 몹시 역겨워했다.

 

그러니 하루 이틀 아니고 몇 해 동안 날이면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단골 손님의 성미를 다방 마담이 모를 턱이 없지 않은가.

 

이러한 그는 매일같이 많은 사람과 차를 나누었지만 사실은 고립된 감정을 되씹으며 살았다. 많은 사람과 담소를 나누되 그 사람들의 일에 깊이 개입하기를 싫어했다. 예를 들면 다른 작가나 시인, 비평가하고 가끔 공적인 화합같은 데서는 자주 접촉했으나, 문인 협회다 뭐다 해서 감투 싸움에 여념이 없는 모임엔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원래 술을 못하는 그는 물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할 기회도 좀처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초대하는 자리엔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몇몇 제자들이 이끄는 대로 산으로 바다로 따라다녔다. 어떤 땐 제자를 강제로 불러내서 여행길의 동반자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제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린 것은, 경제적 부담은 들지 몰라도 마음의 부담이 전혀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동안 자신의 젊음 같은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뇨병에 시달려 몸이 쇠약해지고 있는데도 그는 누가 늙어 보인다고 그러거나 몸이 안 되어 보인다고 그러면 질색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연고전이 벌어지는 날엔 앞장 서 운동장에 뛰어갔고, 교수 대항 축구 시합 땐 환갑이 넘은 몸인데도 센터 하프로서 시합장을 누비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쓰는 데에도 남달리 정력적이었다. 같은 연배의 작가나 신인들이 일년에 서너 편 쓸까말까할 동안에 그는 거의 한 달에 한 편, 어떤 땐 두 편 꼴로 거르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

 

말년에 접어 들수록 청탁받는 것마다 거절하지 않고 더욱 더 많은 양의 작품을 써 나갔다.

 

 

2

박영준은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모범 경작생>이 당선된 이래 한동안 농촌 문학 또는 농민 문학 작가라는 레테르가 붙여졌으나, 사실은 그가 일생 동안 써 온 많은 작품 중에서 농촌을 다룬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는 데뷔 초기, 즉 일제 시대 때 쓴 몇 편 안 되는 작품에만 농촌을 배경으로 설정했을 뿐, 해방 후엔 주로 도시 풍경, 애정문제, 스승과 제자, 노인의 고독, 전쟁, 등산, 젊은 세대 등 거의 농촌과 관계가 없는 소재를 골라 썼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소재 선택의 변화는 1930년대에서 해방 직전까지 그가 평안도 농촌에서 살다가 만주에서 농촌 관계 기관에 종사했고, 해방이 되자 서둘러 귀국하여 서울에서 잡지사 주간, 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작가 생활을 해 온 일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만주 농촌에서 살 때는 농촌 소설을, 서울에서 살 때는 농촌 이외의 세계를 썼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작가란 자기가 체험한 현실을  허구를 보태서 작품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증하는 아닐 수 없다.

 

먼저 <모범 경작생>을 검토해 보자.

이 작품의 무대는 작품의 흐름으로 미루어 평안도의 어느 농촌이다. 이것은 작가의 출생지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이라는 점을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고 작중에

 

평양 구경도 못한 마을 사람들이 서울까지 가서 별난 구경을 다 하고 돌아올 그에게서 서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그의 돌아옴이 기다려지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 하는 대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평양 구경도 못한 마을 사람'이라고 하면 작품의 배경을 요약하는 말도 되지만, 작중 인물들의 가난한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글도 된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은 1930년대 우리 나라 농촌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길서'는 그런 마을에서

 

동네 전체로 보아 보통 학교(오늘의 초등학교) 졸업을 혼자 했고, 군청과 면사무소에 혼자서 출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나이 젊은 사람으로 일을 부지런히 해서 돈도 해마다 벌며, 저축을 하여 마을의 진흥회니 조기회니, 회마다 회장을 도맡고 있는 관계로 무식하고 착한 농부들은 길서를 잘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말을 들을 정도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름 그대로 '모범 경작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작인들의 궁핍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가는 마을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몸인데도, 지주가 그들을 수탈하는 처사에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소작농들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호세(戶稅)' 할당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일본을 구경하고 돌아온 길서는 농부들의 냉랭한 반발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서'에 대한 농부들의 반발엔 '길서' 개인에 대한 노여움도 섞여 있었지만 더 이상 수탈당할 수 없다는 농민으로서의 자각적인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들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편 <종각(鐘閣)>을 읽기에 앞서 먼저 알아 둘 일은 인간 박영준의 종교적인 배경이다. 그가 원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란 미션 계통 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미션 계통인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줄 안다. 생전에 그는 작품을 통해서 가끔 그리스도교에 대한 회의를 나타낼 때도 있었으나 숨을 넘기는 그 날까지 일요일엔 교회에 일요일엔 교회에 나가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작품 <종각>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를 배경으로 하여 목사, 장로, 집사, 전도 부인, 종지기 등을 등장시켜 갈등을 벌이게 하고 있는 것도 박영준의 신앙적 체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 구성상의 시점으로 볼 때 작중 인물 '최광주'는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사건의 목격자요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사찰 노릇을 하며 교회의 잡일을 도맡아 보고 있는 광주에게 있어선 종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지만 종치는 시간 가운데서도 새벽종 치는 일이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

 

이렇게 종치는 즐거움을 느끼는 광주는 틈만 있으면

"여호와이시여, 육신은 벌을 받고 있사오나 마음에까지 벌을 주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 품속에서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울린다. 그의 기도에는 그 나름대로 간절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현재 반신 불수가 되어 있는 아내 '심삼애'를 돌보며 교회의 종을 맡아 살고 있으나 그는 엄청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나날 육욕의 화신으로서 열 다섯 여자를 차례로 범해 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 '삼애'를 위한 기도와 함께, 개중에는 이름마저 잊어버린 많은 여자들에 대한 자기의 죄와 자기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그 여자들의 죄를 사해 달라는 간절한 뜻을 기도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지금의 아내는 정확하게 말하면 그에게 있어선 처제의 관계에 있었던 여자였다. 지난날 그가 육욕의 대상으로 삼아 온 수많은 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희생된 여자였다.

 

형부와 정사를 나눈 처제의 언니 곧 '광주'의 전처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난날의 처제는 오늘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무슨 까닭에선지 '경원' '경삼' 두 아들을 낳자 반신 불수가 되었고, 전처 소생 '경선'은 이모를 친어머니로 알고 정성들여 환자를 돌보아 오고 있었다.

 

이런 곡절 때문이라도 '광주'는 하느님에게 날이면 날마다 기도를 안 드리곤 못 배겼다고 할 수 있다.

'광주'가 경건한 신앙 생활로 치닫고 있을수록 그의 아우 '대주'는 형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거나 때로는 강하게 반발해 왔다.

 

그런데 '광주'가 날이 갈수록 두터운 신앙 속에 몰입해 가는 동안 골치 아픈 사건이 집안과 교회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경선'이 자기의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이모라는 사실을 환자의 일기를 통해서 알고 집을 뛰쳐나간 사실인데, 그 일만은 '광주' 자신이 나서서 간곡하게 설득한 결과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만은 '광주'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목사 부부였다. 그들은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목사의 딸 '선희'가 남의 남자와 여관에서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 장로', '김 집사'가 목사를 몰아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뒤늦게 안 광주는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다.

 

말세라고들 하지만 정말 말세란 생각이 들었다. 목사의 집안에까지 그런 일이 있으니 말세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목사는 전도 부인과의 관계로 의혹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는 차츰 목사에 대한 의심을 풀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광주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자기 딴으로 교회를 위해 살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다. 교회를 위해 살고 있다고 자처하는 자기 집안 역시 단순하지 않다. 특히 동생 대주가 교회를 등지고 있다. 술을 마실 뿐 아니라 여자와의 관계까지 맺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목사님이 딸을 지도하지 못한 책임감으로 사표를 제출했다면 자기 역시 사표를 제출함이 옳다.

이러한 판단은 목사 개인에 대한 동정적인 이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목사를 몰아세우고 있는 김 장로나 김 집사의 비신도적인 속악성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살이 찐 자기를 도욱 살찌게 하고 남는 것을 쪼개어 그 일부를 교회에 바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일단 목사를 모셔 온 뒤에 목사가 마음에 안 들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목사를 추방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목사를 두둔하고 있는 정 장로는 광주의 눈에 다음과 같이 비쳤다.

 

육십이 넘은 정 장로는 선지자는 되지 못할망정 선지자의 풍채를 보여 주는 사람이다. 그는 가나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하게 산다. 돈을 곧잘 버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는 그 대부분을 교회에 바치고 있다.

 

이런 정 장로가 두둔하는 목사를 '광주' 자신도 자연히 두둔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목사와 전도 부인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김 장로나 김 집사, 그리고 특히 김 장로 부인이 추측하는 바와 같은 그런 떳떳지 못한 관계는 없었다고 작품은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김 집사는 그런 관계를 실지로 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장면 때문일까, 작품에서 그 장면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목사님이 떠나시면 전 못 살 것 같습니다."

 

이때까지 전도 부인은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사랑하던 남편이 죽은 뒤 그미는 남편을 따라 죽고 싶었다. 그만큼 남편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죽지를 못했을 때 그미는 재혼을 단념하고 하느님 품속에서 살려 했다. 하느님 품속에서 살기만 하는 데는 남편에 대한 추억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육박해 왔다. 그미는 하느님의 역사를 맡아봄으로 육박해 오는 추억이 자기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느님의 역군 노릇을 하지 않으면 강력한 추억이  현실적인 유혹을 끌어들일 위험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전도 부인이 된 지 오륙 년이 되도록 자기 마음을 깨끗이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 년 동안 모시고 있던 목사가 목회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말에 그미는 이때까지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을 잃은 듯한 고독감을 느꼈다. 하느님을 믿는 마음엔 변화가 없으면서도 목사가 없으면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듯한 허전함을 느꼈던 것이다.

 

"가장 큰 힘을 가지시고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던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힘만으로는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 험한 것 같아요."

"사람의 힘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 험하지요. 정말 세상이 너무 험합니다."

이 말을 한 목사가 갑자기 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목이 멘 소리로,

"이젠 가 봐야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려 했다.

전도 부인은 목사의 무릎에 쓰러지며

"전 어떻게 하랍니까?"

하고 매달렸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목사 같았던 것이다. 그미는 목사의 무릎에 엎드린 채 오열을 했다.

"울지 마십시오. 마음이 약해질 때일수록 하느님을 부르십시오."

목사는 오열하는 전도 부인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위로했다.

 

바로 이 장면을 김 집사가 들여다보고 목사와 전도 부인인 남 모르게 포옹했다고 흥분했던 것이다. '광주'도 처음에 김 집사의 말을 확인하려고 그 장면을 들여다보고 김 집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으나, 그러나 그는 그들의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실된 대화를 엿들을 수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떳떳이 해명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아무튼 '광주'는 복잡 미묘한 신도들의 갈등을 보면서, 또한 자기 자신도 그 와중에 휩쓸려 들면서도 조금도 신앙심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온 사실에 감사하면서 마지막 종을 쳤다.

 

"뎅그렁 뎅그렁!"

종을 치면서 광주는,

"너는 잘 참았다."

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용서가 사랑보다도 더 힘드는 일이니라."

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광주는 생각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뎅그렁 뎅그렁

광주는 종소리에 맞추어

--감사아 감사아

하며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부풀어 자꾸만 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종각>에는 인간 박영준의 자전적 요소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으나, 그 자신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절실한 자세만은 짙게 그림자를 던져 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 작가 중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작가가 여럿 있지만, <종각>만큼 진지하게 그리스도교에 몰입한 작품을 쓴 작가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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