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문순태

by 송화은율
반응형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민중(民衆)의 한(恨)과 그 힘
이보영

 



문순태(文淳太)는 비교적 늦게, 서른 셋의 나이에 「백제(百濟)의 미소(微笑)」가 신인 문학상에 당선되어 소설가로서 출발하였지만, 현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미 출판된 단편집으로는 《고향(故鄕)으로 가는 바람》과 《흑산도(黑山島) 갈매기》, 장편으로는 《걸어서 하늘까지》, 연작 소설은 《징소리》 및 《물레방아 속으로》가 있고, 금년초에는 유명한 나주 궁삼면(宮三面) 사건을 다룬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江)」제1부를 발표하였다.

문순태는 소재는 다양해서 농어촌 사람뿐 아니라 도시의 하층민이나 소시민적 지식인을 취급한 작품들도 있지만, 지금까지 주로 취급해 온 것은 사회 변동기에 처한 가난한 서민의 동태이다.

그런데 문순태의 작품을 개관할 때 주목되는 것은 먼저, 하디가 웨섹스라는 가공의 세계를 그의 전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포크너가 요크나파토파를 전작품이 중심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허구의 왕국을 구축하였듯이 문순태도 영산강 유역의 방울재와 그 웃마을 노루목을 보편적인 중심 배경으로 정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백제의 미소」의 도자기를 만드는 분원리나 「청소부(淸掃夫)」의 차남수의 대장간이 있었던 곳은 방울재이며, 「징소리」연작의 잃어버린 고향도 방울재이다. 또한 단편 「고향으로 가는 바람」이나, 연작 소설집 《물레방아 속으로》 및 「타오르는 강」의 배경은 노루목이다. 이처럼 <방울재>나 <노루목>을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의 보편적 배경으로 삼은 것은 허구의 왕국을 세우려는 의욕과 함께 그만큼 문순태의 고향의식 혹은 향수가 짙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문순태의 소설의 큰 특징은 시적 표현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주로 냉엄한 산문 정신이 요구되는 소설의 경우에도 시적 표현이 현저히 많은 것은 오히려 그 작품의 일상적 리얼리티를 감소하는 약점일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적 비유가 문순태 소설의 매력인 것은 틀림없다.

위에 언급한 <방울재>·〈노루목〉이나 〈할미봉〉이라는 지명부터가 비유적 표현이며, 눈을 나타낼 때도 <콩꽃 같은 눈>이라 하고, 택시의 윈도우 클리이너는 <장수잠자리>에, 비행기는 <갈가마귀떼>에, 튼튼한 살림 형편은 <황소가 디뎌도 꿈쩍 안 할 살림>으로 비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비유들을 주의해 보면, 그 비유가 자연과 관련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 및 그 자연과 조화되었던 원시적 공동 사회 같았던 과거의 방울재나 노루목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과 향수에 연유할 것이다. 또한 그 결과 그런 비유가 담긴 작품은 독자에게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그곳에 살았던 순박한 사람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문순태 소설은 반드시 그 향수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다. 그 향수와 더불어, 아니 향수와 대립적일 수도 있는 역사 의식과 사회적 관심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 점을 일찍부터 보여 준 예가 처녀작 「백제의 미소」이다.

이 작품은 그 작중 시기가 이조요, 배경은 나주 근처의 방울재 도자기 마을이며, 등장인물도 주로 도공과 그 가족이다. 그들은 나당 연합군에 패망한 백제를 재건하려고 했던 견훤의 부하들의 후손이다.

이런 사연이 짤막하게 담긴 서장에 이어서 김진사의 명으로 사옹원(司饔院)에 납품할 자기를 굽는 도공들의 비참한 생활과, 김진사의 횡포에 대한 도공의 아들 바우의 저항이 박력있게 취급되고 있다.

그 도공들은 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목욕 재계하고 도방에서 재벌구이가 끝날 때까지 지내는 동안 김진사가 그들의 아내를 겁탈한다는 것도 모른다.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사정을 종각(鐘閣)의 신문고(申聞鼓)에 호소할 줄도 모른다. 그저 <무념무상의 흰 마음>으로 백자를 빚어 만든다. 오직 바우가 신문고를 친다. 그는 어머니가 김진사에게 겁탈당하는 현장을 목격했었다. 바우는 신문고를 치다가 김진사의 하인에게 타살되며, 여기에 격분한 도공들이 그의 시체를 메고 김진사의 집으로 몰려가 그 집에 불을 지른다는 것이다.

이 처녀작에서는 세 가지의 특징이 주목된다. 첫째로는 향토애의 애정인데, 그 후 문순태가 방울재와 노루목을 그 고장 원주민과의 일체감을 가지고 연이어 작품 배경으로 애용한 것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장소적으로 통일하려는 의도에 연유한다.

다음으로는 작자의 역사적 관심을 들 수 있다. 당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예민한 관심으로 인하여 문순태의 토속적 작품은 그저 토속에 대한 인정스럽고 시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토속적 사회의 근원 감정인 한을 민중의 저항력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셋째로는 비유적 표현의 애용으로서 예컨대 <백제의 미소>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의 수준을 넘어선 상징이 되어 있다. 그것은 김진사의 착취와 횡포에도 불구하고 예도(藝道)에 정진하는 극히 비세속적인 도공들이 만든 항아리, 곧 민중의 한을 감싸 주는 어머니 같은 여인의 어딘지 슬프면서도 관후한 미소이다.

「백제의 미소」의 도공들의 극한적인 가난은 「고향으로 가는 바람」「복토(福土) 훔치기」「청소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복토 훔치기」에서 <나>의 할아버지는 대보름날 가난한 사람이 그 마을의 부잣집에 몰래 들어가 마당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네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가난해지고 복토를 훔친 집은 부자가 된다는 속신(俗信)을 좇아 윤초시네 집에 숨어 들어 갔다가 그 집 종들에게 들킨다. 그 결과 <나>의 할머니는 윤초시의 집에 감금된 남편을 살려 낼 생각으로 윤초시와 화간(和姦)을 하고 첩이 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여기에 대한 통분을 대장간에서의 노동으로도 삭히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것이다.

윤초시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서될 수 없지만, 복토를 훔치려 했던 <나>의 할아버지의 행위도 부정한 일이다. 따라서 그 복토 훔치기와 토속적 사건이라 하여, 혹은 극도의 가난이 죄라 하여 미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무당이 화랑이들과 간음하는 것을 그들의 원시적 생명력의 발현이라 하여 용서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상 토속적 사회일수록 인습적 도덕률은 계급 차별과 금전의 힘으로 악용되곤 했을지라도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도 엄존했었다. 게다가 문학은 그 작품이 섬세한 도덕적 감성의 산물일수록 악법하(惡法下)에서의 개인의 윤리 의식에 관심이 많다. 따라서, <나>의 할아버지가 윤초시에 대한 복수 의지를 대장간의 심한 망치질로 대신하다가 자살한 것은 아내를 빼앗긴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망 탓이지만, 그 밖에도 작자는 그 자살자의 죄의식의 갈등까지도 보여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내가「복토 훔치기」에서의 자살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방울재>나 <노루목> 사람들, 곧 문순태가 애석해 마지않는 그 고향 사람들이 요즘 사람들과는 동떨어지게 단순하고 순진하다고 해도, 그 점을 미덕으로서만 그리워해야 할 것인가를 반성해 보기 위한 것이다.

「청소부」만 해도 그렇다. 개나리 하숙옥의 창녀 순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청소부가 된 차 남수는 방울재 대장간에서 아버지한테 대장일을 배웠으나 일감이 떨어져 도시로 나온 뜨내기이지만, 어느 권력층 인사의 집 식모였던 길자의 하소연 편지를 쓰레기 속에서 발견하여 그 편지를 권력층 인사에게 건네주게 된다. 그 내용인즉, 그 집의 주부가 가정 교사와 관계한 것을 길자가 알게 되자 그녀를 쫓아내게 된 전말인 것이다. 이 억울한 사건은 단순한 차남수의 뇌리에서 사회적 부정의 모델 케이스로 확대되어, 벽돌 공장 옆 쓰레기 하치장의 쓰레기로 피해를 보고 있는 집들에 대한 동정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권력층 인사의 집에서 가정 교사가 쫓겨나지도 않고 순자마저 병사하자 그는 하치장 옆 피해자의 집 쪽으로 쌓아 놓은 쓰레기 더미를 해고당할 각오를 하고 무너뜨려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차남수의 그런 행위는 도덕적으로 의로운 일이지만, 그의 사고의 논리는 너무도 단순하다.

중편 소설의 연작 「물레방아 속으로」에서도 노루목 출신의 순식이 불타버린 물레방앗간을 재건하려는 고집을 부리는데, 그것도 그의 아버지의 친구 장쇠 노인의 비판을 마땅히 받아야 할만큼 너무 단순한 정열의 소치이다.

물론 물레방아에 대한 순식의 집착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이 작품에 넘치는 향수의 시는 우리를 매혹한다. 그리고 문순태의 강점인 역사적 관심으로 하여, 그 연작들은 단순한 향토색 찬미의 소설로 떨어지지 않고 있으며, 옛적부터 복잡한 인간 관계가 빚어내는 상황의 비극, 굳이 노루목에서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런 비극의 보편적 의미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전달된다.

순식의 국민학교 친구 필식의 아버지는 지서 주임으로서, 미녀로 소문난 순식의 어머니를 탐낸 나머지, 그녀와 관계를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그러자 순식의 아버지는 최주임의 아내를 겁탈하고 월북해 버린다. 그 결과 순식의 생모는 방앗간 조수인 점박이(순식이 생부의 친구)와 부부가 되어 방앗간을 경영해 왔는데, 6.25때 인민군으로서 부상당한 순식의 생부가 방앗간을 몰래 찾아옴으로써 제2의 비극이 발생한다. 순식은 <부상한 군인(생부)>의 상처에 쓸 구절초꽃을 산에서 따오다가 필식을 만나 그 부상병 이야기를 했고, 필식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아들에게서 알게 되자 물방앗간에 달려가 불을 지르고 순식의 생부와 점박이 및 어머니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다. 복수의 악순환이 빚어진 것이다.

순식은, 그때 아버지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진 물레방앗간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던 비굴함과 죄스러움이 30년 동안 끊임없이 그의 심장을 후벼파고 목을 죄어 왔다. 아마 그 때문에 30년 동안 한번도 고향을 찾지 못했었는지 모른다.

이런 사건의 전말로 볼 때 「물레방아 속으로」연작은 <파트나>호의 수많은 승객을 방치하고 혼자서 파선(破船)의 위험을 피했다가 여생을 죄의식으로 괴로워한 콘래드의 「로드 짐」을 연상시킨다.

순식은 부모를 잃은 후 소년원, 야간 중학교, 야간 대학을 거쳐 지금은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고등학교의 사회과 교사이지만 소년 시절의 물방앗간 사건의 악몽과 한에 남몰래 시달려 온 것이다.

지금 생가해 보니 어머니가 고집스럽게 돌렸던 그 빈 물레방아 소리는,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간 본남편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속타는 한숨이었던 것 같았다.

이처럼 물레방아 소리는 순식의 어머니의 속깊은 한의 소리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순식의 죄의식을 일깨워주는 고통스러운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순식이, 장쇠노인이 친절하게 순식의 부모와 점박이를 합장한 무덤을 해마다 성묘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고, 그 원한의 물레방앗간을 다시 만들려고 고집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의 죄의식은 가셔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계획 혹은 노루목 주민의 표현으로는 다시 난리를 몰아올 미친 짓이다. 도정 공장이 있으므로 물레방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식은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만들 물레방아를 위한 잔치를 벌여 주고도 몹시 얻어맞는 곤욕을 치른다.

문순태는 《물레방아 속으로》 연작집의 서문에서 앞으로도 소설을 통하여 <고향찾기>를 계속하여, <의식의 뿌리, 역사의 뿌리를 철저하게 찾아서 그것이 상하지 않게 튼튼히 가꾸어 나가자는 데> 창작의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명주실처럼 가늘고 질긴 원초적인 아픔의 소리>인 물레방아 소리에서 <민중의 힘찬 맥박을 느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문순태가 의도한 고향찾기는 지금까지 든 여러 작품들에서 감동적으로 달성되었다. 그러나 그 고향의 뿌리가 바로 민중의 힘찬 맥박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부 차남수의 의로운 행동이나, <나>의 아버지인 대장장이가 윤초시에게 복수하듯이 하는 망치질이나, 물레방아를 다시 만들겠다는 순식의 편집광적 정열도 물론 민중의 맥박일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힘찬 맥박이 될 수 있을까? 민중의 맥박이 힘차려면 그들의 단순한 직관(直觀)이나 직정(直情)은 주체적인 결단과 냉정한 계획적 행동으로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징소리」연작 중의 걸작인 「무서운 징소리」의 강촌댁의 경우는 교훈적이다.

강촌댁은 여순 반란 사건 때 공비의 강간으로 잉태한 태아를 떼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역시 반란 사건의 와중에서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을 한다. 그 때 갑자기 무덤에서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이 강촌댁을 엄습하여 그녀의 온 몸을 오싹하게 한다. 그래서 정다웠던 그 무덤이 무서워진다. 친정어머니의 해석에 의하면 그 매정한 바람은 남편이 무섭게 정을 떼어 아내에게 모진 생활력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과연 강촌댁은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불탄 집을 다시 짓고 농토를 늘려 나간다. 그리하여 12년만에 다시 남편의 무덤을 찾았을 때는 그 무덤이 다시 정답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정을 뗀 것은 종래의 한국 여인의 한의 소극적 퇴영성을 부정하여, 그 한을 적극적인 부정적 힘으로 역전시키려 함이요, 강촌댁은 지혜롭게도 그 점을 명심하여 한을 끈질진 노동의 자극제로 삼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 경제적인 시야도 넓어지고 주체적 인격도 형성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작품의 종말에서 강촌댁은 허칠복의 징소리를 듣고 다시 애상적인 한에 침잠하여 딸과 함께 자살하지만. 그 무덤의 바람을 계기로 한 그녀의 현명한 결단과 능동적인 노동의 성과는 그런 방법에 의한 한의 창조적 극복에 의해서만 민중의 한은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강촌댁은 방울재나 노루목 사람이 아니라 남창 사람이다. 단순한 직관이나 직정에만 쏠리지 않는 한의 극복을 위한 지혜의 빛은 작자와 너무 가까운 고향을 떠나서, 타향의 인물과 그의 문제를 객관할 때 비치는 것일까?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