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독서와 리더십 / 위인들의 독서2

by 송화은율
반응형

 

아브라함 링컨(1809-1865)의 독서


       그가 어릴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깊이 영향 받은 책은 성경이다. 어린 링컨은 어머니를 통해서 성경이야기와  구절들을 들었고 어머니의 격려를 받아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성경에 제시된 도덕법의 간단한 항목을 익숙하게 들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쓸쓸하고 외롭게 보낸  몇 달 동안 큰 위안이 된 것은 어머니가 읽고 링컨과 누이 사라에게 읽도록 가르친 성경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4권의 중요한 책을 만났다. 이 책들은 그에게 일평생동안 영향을 끼친 책들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도덕적 책임을 가르쳐 준 성경, 천국을 사모하도록 동기를 준 천로역정, 조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을  일깨워준 워싱턴의 생애, 재치와 유머를 알게 해준 이솝우화가 그것이다. 낡고 너덜너덜해진 죤 번연의 [천로역정]을 아버지인 토마스 링컨이 빌려와서 어린 링컨 손에 쥐어주자 그 날 그는 너무 기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으며 그 날  밤에는 그 이야기에 심취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워싱턴의 생애]를 손에  넣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멀리  떨어진 이웃 크로포드로부터 이 책을 빌렸으나 폭풍이 불어 창문에 놓고 잠들어 그 책의 겉 표지가 손상되었다. 어린 링컨은 그 책값을 지불하기 위해 사흘동안 곡식을 잡아 뽑는 일을 하였고 마침내 그 책은 링컨의 것이 되었다. 11살 때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어린 친구이자 과부인 사라  부쉬 로슨과 재혼했다. 새 어머니 역시 친절한 분이었는데 그가 재혼하면서 가져온 가구와 물건들과 함께 세 권의 책들을 가져왔다. 웨스터 사전, 로빈손 크루소우,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링컨은 이 책들을 내용을 파악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새 어머니인 사라 부쉬 링컨은 정열적이며 겸손하며 부드러운 여성으로서 자녀들을 애정을 갖고 돌보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자진해서 일어설 때까지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밤늦도록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와 미국의 역사책을 구입했으며 그는 지역에서 들은 책은 전부 구해 읽었다.

    1832년에 23세의 나이로 공직사회에 진출한다. 주 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것이다. 정직함과 공정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에게 보안관이나 경찰관 등의 대우를 했다. 1831년  뉴살렘 토론회가 조직되자 어린 나이지만  초대를 받았고 그의 연설은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공개연설을 함에 있어서 링컨은 자신의  영어가 부족함을 깨닫고 학교 교장인 멘터그fp함에게  '영문법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그래함은  6마일 가량 떨어진 죤 벤스에게 [쉬르함의 영문법]이 있음을 말했고, 링컨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식사도 끝내지 않고 걸어가서 그 책을 빌려왔고, 시간 날 때마다 그 책으로 공부했다. 이해가 안가면 그레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문법책을 통달했다.

     동시에 역사책을 읽었으며 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링컨의 위인 됨은 드러난다.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인지한다면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히 배우려 했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두 번 째 주 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그는 당선되지 못했다. 낙선 후 2년  후의 정치를 기대하며 낯선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상점을 경영하길 원해서 동업으로 회사를 세웠다.

    1834년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에도 우편물 배달을 하면서 법률공부를 했다. 선거 기간 중에 친해진 스튜어트는 링컨에게 법률전문가가 되기를 제안하고 법률공부를 했다. 그의 독서는 변호사로 일하게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유명한  변호사요 정치가이지만 1837년 피터에이커스의 노예제도 중단과 내전'에 관한  설교를 듣고는 매우 충격을 받아 더욱 공부에 몰두한다. 다른 변호사들은 재판이  끝나면 선술집으로 모여 잡담을 했으나 링컨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양초를 침대 머리 밑 의자에 놓아두고 몇 시간이고 밤늦도록 공부에 열중했다.  

    링컨은 매우 유능한 변호사였고 명성이  높아지고 존경을 받았지만 자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독서를 했다. 그의 철학은 그의 학습과 독서와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대통령이 된 뒤에  성경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삶에 정의와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링컨의 뜻은 확고하고 쇠처럼 단단했다. '이 책을 잡아 보게 그러면 자네는 더 나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걸세' 이것이 친구에게 대한 그의 충고였다

   "책을 한 권 읽는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고, 하루 읽은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을 다스린다"


윈스턴 처칠(1874-1965)

     윈스턴 처칠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두차례(1940-1945, 1951-1955) 영국의 수상직을 지냈다. 학창시절 그는 문장을 몇 번씩 외우지 않으면 안되는 둔재였으며 지능발달이 늦어 아버지조차 군인 이외의 다른 직업은 맞지 않다고 여겼던 아이였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고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비롯하여 철학, 경제학의 고전 독서를 통해 훗날 격조 높은 문장과 연설문을 남겼다. 그리고 "말보로의 시대", "강의 전쟁", "세계의 위기", "제 2차 세계대전" 등의 역사서를 서술함으로써 군인과 정치가의 삶을 보낸 사람으로서 극히 드물게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의 학교시절"이라는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학교를 나는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다. 2년 넘게 거기서 보낸 내 어린 시절의 불안한 삶이라니! 나는 공부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게임에도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어서 학기가 끝나고 그 노예 같은 학교생활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유모의 방 마룻바닥에 내 장난감 병정들을 전투 대열로 도열시켜 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 무렵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책읽기였다. 내가 아홉 살 반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읽어보라며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주셨다. 이 책에 나는 얼마나 즐겁게, 흠뻑 빠져 들었던가! 학교 선생님들은 내가 우둔한 것 같으면서 조숙한 데가 있다는 사실에 몹시 기분 나빠했다. 책읽기라면 또래 아이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 실력을 가진 아이가 라틴어 문법에서는 언제나 꼴찌였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내게 라틴어 문법을 강요할 온갖 수단들을 다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이성과 상상력과 흥미가 발동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것도 배울 생각이 없었고 배울 수도 없었다. ...... 단순히 문법이나 통사구조를 달달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와 풍습을 가르쳤더라면 나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사회를 훨씬 더 잘 공부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처칠은 이처럼 일생동안 꾸준한 독서를 통하여 내적인 실력을 쌓아갔던 것이다.


몽테뉴(Michel de Monttaigne, 1553-1592)

     몽테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이자 인문주의자이다. 모국어인 프랑스어보다 라틴어를 먼저 배웠던 그는 6세 때 벌써 라틴 고전을 읽었다. 툴루즈에서 벌률을 공부하고 1570년까지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심사관으으로 일했다. 그러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568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맏은 그는 1570년 법관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몽테뉴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성탑 3층에 있는 서재에 틀여 박혀 독서와 명상에 잠기고, 라친 고전을 비롯한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지냈다. 그의 책상에는 언제나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 놓여 있었다. 온 생애를 통해 인간적인 진실만 탐구한 그는 이곳에서 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과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독서를 바탕으로 유명한 수상록 "에세"(Les Essais"를 남기게 되었다. 그의 평생의 주제는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하는 것이었는데 이광주의 글을 한 토막 인용해 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자신의 고전을 몇 권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는 고전중의 고전이다. 이 책은 몽테뉴가 자신이 읽은 고전에서 명문(名文)들만 뽑아서 묶은 책이요 주석서로서 루소의 "고백록"보다 2백 년이나 앞선 자아와 자아를 통한 인간관찰의 기록이다. 2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한 해에 두세 번 한유의 시간을 골라 "에세"를 펼쳐들 때면 나에게 몽테뉴는 어김없이 독서의 참맛을, 약간 과정하면 서중선(書中仙)의 세계를 펼쳐보여준다. .... 몽테뉴의 독서방법은 그의 취향과 그의 생활방식 그대로 자유롭다.

   나는 매일 많은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산다. 그런데 그들의 학식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의 사람됨을 알고 싶을 뿐이다. 내가 책을 찾는 것은 오직 거기에서 진지한 놀이의 방식으로 조그마한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연구도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죽음과 삶을 가르치는 훌륭한 학문만을 찾고자 한다.

   놀이로서의 독서, 인간과 나 자신의 탐색, 이것이 몽테뉴가 책에 바란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몽테뉴가 책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인생에서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고전의 많은 작가들로부터 향수한 것을 우리는 바로 "에세"에서 즐기고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몽테뉴의 문학적 소양과 고전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혹자는 기술문명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케케묵은 고전이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 고전을 알지 못한 정신의 세계는 깊이 없는 천박함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씨알의 씨알 노릇하기 위해서는 옛글을 고쳐 다시 읽어야 한다"라고 했던 함석선 선생의 말을 되새겨 볼만 하다.


괴테(Johan Wolfgang von Goethe, 1949-1832)

     세계 문학사의 거인으로 널리 인정받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으로 세계 문단에 이름을 떨쳤고, 60년 가까이 노력해 온 "파우스트"를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했다. 독일적 개성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대어는 물론 불어, 영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히브리어까지 배웠다. 그리고 열 살의 나이에 이솝,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오비디우스를 읽었다. 82년간의 생이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탁월한 경지의 예지를 터득했으면서도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존재를 내 맡길 줄 알았던 그였다. 훗날 정통 기독교의 형식에 거리를 둔 것은 사실이엇지만 그는 나이를 먹어서도 자신의 정신적인 교양의 큰 부분을 "성서"에 힘입었다고 고백했다.

    괴테는 "나의 문학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로부터 창조되었다"라고 고백하는데 그는 회고하기를 아버지에게서는 생김새와 삶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를, 어머니에게서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다음은 브루노 베틀하임의 "마법의 효용"이라는 책에 기록된 괴테 어머니의 회고담을 인용해 본다.


    "바람과 불과 물과 땅, 나는 이 모든 것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의 눈은 잠시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어떤 인물의 운명이 그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떤지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쪽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아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리고, 그가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엄마, 공주는 그 못된 양복쟁이하고 결혼하면 안돼. 양복쟁이가 악당을 쳐부순다 해도말야." 그럴 때면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먼추고, 결말은 다음날 받으로 미루었다. 그런 식으로 내 상상력은 가끔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어떤 때는 바로 다음날 아침 그가 바라던 대로 주인공의 운명을 고쳐 이야기해 주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넌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 결과는 네가 생각한 대로 된거야.' 그러면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및나고, 나는 그의 어린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대 문호의 배경에는 이야기꾼 어머니가 있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시간적인이유와 상상력의 비곤으로 괴테 어머니처럼 탁월한 이야기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된다. 짐 트렐리즈라는 미국인 여성은 수 십년동안 "책읽어 주기 운동"을 펼치고 자신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자"라는 책에 담았다.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책을 읽어주는 것은 비단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청소년 심지어 노인들로 좋아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가정, 책을 읽어주는 학교, 책을 읽어주는 사회는 결코 잘못된 길로 가거나 메마르지 않을 것이다.


막심 고리키(Maxim Gorki, 1868-1936)

     고리키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시한 소설가이다. 그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가난하게 살면서 각지를 방랑하며 제화점 보조원에서 기선의 접시닦이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그런 생활중에 책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 후 그에게 독서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다. 훗날 그는 굶주리고 헐벗은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작가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러시아 생활의 어두운 면을 탁월하게 묘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자서전 중 하나인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Detstvo, 1914), "사람들 속에서"(Vlyudyakh, 1916), "나의 대학"(Moi university, 1923)을 썼으며, 한 때 볼셰비키당에 들어가 소설 "어머니"(Mat, 1907)에서 혁명가의 전형을 창조하기도 했다. 다음 글들은 막심 고리키의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와 "책에 대하여"에서 그가 어떻게 독서 인용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울곤 했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이었고 내게 너무도 귀하고 가까운 것이었다. .... 동화책에서 퍼덕이며 날아온 신기한 새들처럼 책은 마치 감옥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내게 노래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책은 삶의 온갖 모습과 풍요로음을 들려주고 선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질긴 투쟁을 이야기해 주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어떤 건강하고 친절한 영혼이 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훨씬 침착해졌고 자신감이 생겨났으며, 공부도 한결 잘되었고 삶이 나에게 퍼붓는 수많은 모욕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게 었다."

    "내 신념이 진실하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서 나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을 사랑하라. 책은 당신의 삶을 한결 편안하게 해줄 것이며, 온갖 혼란스런 생각, 감정, 사건들을 정돈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당신 자신과 남들을 존경할 수 있게 가르칠 것이며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당신의 마음과 가슴을 채우게 해 줄 것이다."

    "책을 사랑하라. 책은 앎의 원천이다. 앎만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하고 인간을 경건하게 사랑할 줄 아는 정직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인간이 성취한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안에 인간 영혼의 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 순결하고 고결한 혼은 그 어느 곳보다 과학과 예술에 가장 많이 담겨 있고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장 유창하고 분명한 언어로 우리와 소통한다."


   책을 통해서 심리 정서적 문제를 치료하고자 하는 분야를 독서치료(bibliotherapy)라고 하는데 고리키는 책을 통해 이미 자신을 치료하고 있었음을 본다. 그렇기에 그에게 다가온 가난이라는 환경과 천애 고아라는 핸디캡을 넉넉히 딛고 일어서서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문학적 자원으로 승화시킨 장한 모습을 보라!


함석헌(1901-1989)

      함석헌 선생은 민족독립운동가, 탁월한 역사철학자, 그리고 종교사상가로서 미주 인권운동과 시민운동사에서 역사의 불기둥처럼 살다 가신 어른이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3.1운동에 참가하고,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이승훈,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1947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매주 YMCA강당에서 일요종교집회를 가졌고 1956년 '사상계"에 집필활동을 하고 1970년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우리 사회의 큰 선각자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추천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비롯해 "인간혁명의 철학",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그는 씨알의 옛글 고쳐 씹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씨알이 씨알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즉 고전을 고쳐 읽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이다. 이날까지 서양문명, 더구나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 왓다. 동양은 오랫동안 정신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문명에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왓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동양소리를 많이 하게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버려진 유산을 다시 찾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고쳐 씹서어 새 뜻을 찾아내야 한다."


함석헌 선생은 죽은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MBC텔레비전 다큐멘타리 "성공시대"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람은 갔어도 그의 생각은 여전히 영상과 글로서 남아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살며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 삶 자체가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말콤 엑스(1925-1965)

   1925년에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태어난 말콤 리틀은 아버지가 백인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더불어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자 보스톤의 록스버리 거리와 할렘가에서 비행소년이 되어 도둑질, 마약거래를 일삼다가, 찰스톤 주립감옥에 보내진다. 감옥에서 그는 모슬렘 교리를 접하고 완전히 바뀌게 된다.

   6년반의 수감생활 후 1952년에 석방되었을 때 그는 무식한 범죄자로부터 자신의 신앙에 대해 교육받은 대변인으로 변신해 있었다.그는 비록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긴 하나 자신의 사회적 비전에 대해 격렬히 주장하였다. 흑인에게는 그의 말들이 곧 계시이며 영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겪었으며, 지도자인 일라이자 무하메드의 부도덕성으로 모 슬렘의 원류를 찾아 중동으로 여행을 한다. 메카 순례는 그의 꾸준한 인격수양에 있어서 큰 분수 령이 된다.그는 모든 인종에 좋은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의 피부색깔이 아닌 영혼의 질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백인들의 사 악하다는 일라이자 무하메드의 가르침을 버렸으며 흑인들의 인권을 얻기 위한 그의 투쟁은 전 세 계적인 단결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은 결실을 맺기 전에 끝이 난다. 메카에서 귀국한 지 불과 10개월 후인 1965년에 뉴욕의 오드본 볼룸에서 연설 중 그는 저격당한다. 39세의 나이에 미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이며 중요하던 목소리 중 하나가 침묵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후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며, 깨우쳐줌으로써 말콤 X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불량배 말콤 엑스를 위대한 흑인 민권운동가로 변신 시킨 것은 "감옥"이라는 학교에서 책과 씨름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이슬람교 목사를 만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5년 간의 독서 덕분에 지독한 난시가 되긴 했지만 굉장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공부하는 방법도 그의 성격답게 우직하였다. 어휘실력이 모자라는 것을 알고 영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적은 것이다. 책을 통해서 미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백인들이 아프리카서 저지른 과거의 역사와 16세기이후 기독교상인들의 행패들을 알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다음 그는 완전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7)
(연표보기)

     에디슨은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캐나다 출신의 아버지 새뮤얼의 셋째아들로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가족이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옮겨 에디슨은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만에 퇴학당하고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게된다.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지하실 한쪽 구석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실험과 공작에 몰두하였고, 12세 때 철도의 신문팔이 소년이 되어 집에 있던 실험실을 열차 안으로 옮겼는데 1862년 이 실험실에 화재가 발생하여 차장에게 맞아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같은 해에 역장의 아이를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을 배우게 되어 69년까지 각지에서 전신수로 근무한다. 이때 보스턴에서 M.패러데이가 쓴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읽고 설명에 복잡한 수식(數式)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감탄하여, 그 책에 나와 있는 실험을 모두 시험해 보고자 했.

    그는 소속되어 있던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그만두고 전기식 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69년에 첫 특허를 얻었다. 이것은 의회에서의 표결을 전신에 의해 자동적으로 기록하는 기기였는데 채용되지는 않았다. 제2의 발명인 주식시세 표시기는 남북전쟁 직후 투기붐이 일어난 월스트리트에서 5000달러에 팔려고 생각했던 것이 4만 달러에 팔렸다. 이 자금을 밑천으로 71년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이곳에서 5년간 발명에 전념한다. 그해에 인쇄 전신기, 72년에 이중 전신기, 74년에 사중 전신기를 발명하였는데 전신기술은 1873년 공황 후 급속히 보급되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석달만에 질문이 많은 에디슨은 문제아, 열등생으로 찍혀 학교에서 쫓겨났다.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아들이지만 어머니는 '이 아이는 열등아가 아니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치겠다,'고 결심한다. 훗날, 발명왕이 된 에디슨은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어머니의 덕분이라고 감사해 하였다.
"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여 내가 좋아하도록 자유롭게 공부를 시켜 주셨다."

    15세 경에 "나의 피난처는 디트로이트 도서관이었다. 나는 맨 아래 첫째 칸부터 맨 위 마지막 칸까지 다 읽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문고판 백과 사전을 다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강의를 경멸했고 보통교육에 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다,  독창적인 사고가 길러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라고 비판하였다.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라는 그의 일생 동안의 신조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의 신조에서 99% 땀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서라는 차원에서 볼 때 1%의 영감은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발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의력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가 입력될 때 그것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것으로 창출되는 것이며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기의 독서는 그의 발명에 있어서 중요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독서(Napoleon Bonaparte)

       N a p o l e o n 1 세. 본명은 Napoleon Bonaparte 이고 별칭은 Le Caporal이다. 프랑스 장군이자 제 1부통령(1799-1804).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 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코르시카 총독의 비호를 받은 그는 1771년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778년에는 위로 두 아들인 조제프와 나폴레옹을 콜레주 도툉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간 뒤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9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툉, 브리엔, 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 놓은 채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 (La Fere)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연대가 주둔한 발랑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788년 6월에 연대에 복귀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볼테르와 루소를 읽은 나폴레옹은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직업장교로서 급격한 사회개혁에 대한 필요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나폴레옹은 9세에 코르시카섬에서 나와 파리로 유학하여 28세까지 4시간 자고 20시간을 오직 책을 읽는데 보냈다. 여기서 그는 정치, 전략, 군사기술, 인격이 배양되었다고 한다. 전쟁터에 나가면서 수레에 책을 싣고 말을 타고 가면서 까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인트 섬에서 유배되어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1000권 이상을 읽었다고 한다. 심지어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당한 곳에서도 결코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니 그의 독서습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과 그의 독서 편력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정규대학(전문대 2년 졸업)을 밟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나는 감옥대학, 감옥대학원을 나왔다"고 자랑한다. 그는 실재로 자기 서재에 20000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독서를 통해 정치적 꿈을 가지고 나라를 지도하고 있다. 그의 독서 편력에 관하여 김경재가 쓴 "DJ의 독서일기"(인북스/2000) 라는 책을 펴낼 정도이다. 김경재의 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다음과 같은 서평을 통해 독서와 리더십의 관계를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문 서평>'독서광' DJ의 서가 엿보기 책과 관련된 김대중대통령의 일화는 많다. 청와대 입주 때 책이 대형 트럭 2대분 이었다든 가, 고등학교 1학년생 아들의 일기장에 독서일기를 적으며 '대화'를 했다든 가, 애서가 상을 2번 받았는데 많은 상 가운데 가장 소중히 여겼다 등등…. 독서광 김대중 대통령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DJ의 독서일기] (인북스간)가 측근인 김경재 국민회의 의원에 의해 나왔다. 곁에서 지켜본 대통령의 독서습관을 비롯해 DJ가 직접 쓴 독후감, 애독서 다이제스트 등을 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운회사를 거쳐 정치에 뛰어들었던 그에게 스승은 바로 책이었다. 후광은 삼상지학, 즉 공부는 말을 타고가면서도, 침상에 누워서도, 측간에서도 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대통령이 늘 손이 닿는 곳에 책을 두었고, 철학 역사 경제에서부터 여성지까지 다방면의 책을 읽었지만 속독형보다 정독형에 가깝다고 말한다. 서재에 빼곡한 책들 대부분에는 밑줄이 그어져있고 메모가 적혀있다. 6년간 수감생활을 한 DJ에게 특히 영향을 끼친 것은 역사서와 기독교 관련서. 대통령 자신도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와 라인홀드 니버의'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등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통령이 쓴 독후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은 서부 개척시대를 지나온 미국식 히로인이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끝없이 도전하고 쟁취하는 인물형이다. 그에 비해 '토지'의 월선이는 한국의 여인상이다. 순종형의 조선여인이 아니라 나머지 것들을 아낌없이 버리면서도 자신이 택한 최고의 가치만큼은 타협하지 않는 '부드럽고 강한'우리나라 여성의 이미지를 말한다." 용이와 월선의 애틋한 사랑, 특히 용이의 품에 안겨 월선이가 죽어가는 장면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한다. DJ가 일생을 두고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한 목록도 많다. 재독 삼독할 책이라고 분류한 것은 '불확실성의 시대'(갈브레이드) '단절의 시대'(피터 드러커), 우리 소설로는 '토지'(박경리) '장길산'(황석영) '태백산맥'(조정래), 경제책으로는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변형윤) '제로섬 사회'(레스터 더로우) 등을 들고 있다. 광범위한 독서분야를 짐작케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험을 통해 볼때 학력이 곧 지적인 능력의 전부는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체계화된 교육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100년도 안되는 역사이며 유럽도 수백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전의 탁월한 인물은 가정교육을 통해서 배출되었다. 공자나 맹자, 석가 등 위인들은 대학이 없는 시절에 살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스승이었을까? 책과 사색이 중요한 부분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벤 카슨

      흑인 빈민가 출신의 열등생으로서 5학년 반의 꼴찌의 영광(?)을 누렸던 벤 카슨이 어떻게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병원 존즈 홉킨즈의 소아외과 과장이 될 수 있었을까? 국민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머니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자녀교육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까? 유능한 외과 의사가 된 벤 카슨이 세계 최초로 샴 쌍동이 분리 수술을 성공시키고 수많은 기적적인 수술들을 집도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절감하게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인생의 성공요인으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는 어머니의 영향력이고 둘째는 독서습관이다.

    반에서 늘 꼴지를 면치 못하던 벤 카슨에게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도서관에서 매주 1권 이상 책을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준다. 처음에 그 과제가 싫었지만 도서관에 가보니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광물에 관한 책도 있음을 알게된다. 책을 읽으면서 등하교 길에 철길에 널려 있는 돌들과 비교연구 하는 것이 취미가 되고 있던 어느 날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광물에 관한 것을 배우게 된다. 설명을 마치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 돌에 관하여 이야기 할 사람이 있는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때 벤 카슨이 주저하며 손을 드는데 친구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아마 벤 카슨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의아해 하면서 벤 카슨을 지목하자 그동안 책에서 보았던 광물에 대한 지식을 거침없이 쏟아내 놓자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놀란다. 선생님을 "Excellent!"를 연발하면서 벤 카슨을 칭찬하고 그 날 이후 벤 카슨에게 있어서 책은 호흡하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그 과목만 공부하지 않고 관련된 책을 두루두루 섭렵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한 독서의 힘 때문에 가난한 흑인, 그것도 이혼한 홀어머니의 슬하에 자란 가정 환경의 약점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크게 생각하라!" 그는 책을 통해 크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영향력을 넓혀 갔던 것이다!


IV. 결론
     이제까지 필자는 리더십과 독서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책 자체에 어떤 마술 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추구할 때 독서가 의미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독서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자질이 있다. 첫째는 주도성(proactiveness)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영성과 감성과 지성, 그리고 체력을 정기적으로 갈고 닦는 습관이다. 그러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독서를 통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와 리더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격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책을 한 권 읽는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고, 하루 읽은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을 다스린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