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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리더십 / 위인들의 독서1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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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리더십 - 위인들의 독서1  


I. 리더십의 본질

     리더십(leadership)의 사전적 의미는 "바르고 옳다고 믿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리더십은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물론 리더십이라는 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정의 될 수 있으나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추출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방향성의 요소이다. 리더는 나와 너라는 단 둘만의 인간관계에서든지 혹은 한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가는 차원에서든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리더십을 의미하는 우리나라 말에 지도력(指導力)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리더십에 있어서 방향성의 요소는 필연코 지도자의 비전과 연결된다. 비전은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지시하는 나침반과 같다. 블레인 리의(블레인 리, 2000)는 지도력의 원칙이라는 책에서 비전이 무엇인지 자신의 젊었을 때 체험을 통해 보여준다. 리가 젊었을 때 캔자스의 농촌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한 농부가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그것을 쉽게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트랙터를 몰고 밭이랑을 따라 열심히 몰았지만 형편없이 지그재그로 땅이 파이는 것이었다.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농부가 충고한다. "자네는 딱 한가지를 실수했네. 바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남이 갈아놓은 밭고랑을 보고 가서는 안 되고 먼 산을 똑 바로 주시해야 한다네!" 비전이란 과거의 역사를 참고삼고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을 보는 것이다. 즉 도착해야할 종착점의 관점에서 오늘을 바라보고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리더십인 것이다.

     리더십은 필연코 가치와 연결된다. 어떤 길이 바른 것인지는 길 자체로 분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십은 가치의 요소를 포함한다. 사실 리더십은 타인을 해치고 자신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작용될 수 있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리더십은 가치관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는 진리와 진실로서 사람들을 설득시킬 만큼 가치관이 분명해야 한다.

   스티븐 코비는 나침반과 지도를 비유로 들어서 "원칙 중심의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리더십의 기반이 강압적인 힘이나 거래가 아니라 항상 진리를 가리키는 원칙이라면 거래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계만 쳐다보고 살아간다. 일정표에는 해야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시간별로 가득차 있다. 분초를 아껴쓰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그러한 효율성 중심의 시간관리는 십중팔구 실패하기 십상이다. 예기치 못한 급한 일이나 손님이 찾아오면 그날 일정은 근원적으로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시계외에 다른 도구들이 필요한데 나침반과 지도가 그것이다. 나침반은 무엇이 원칙인지, 즉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지도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안내해 준다. 리더는 지도를 펴고 나침반을 보는 사람이다. 여기서 시계는 효율을, 나침반은 원칙을 그리고 지도는 비전을 가리키는 상징물이다.

    "책속에 길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훌륭한 리더들은 책속에서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한 개인의 꿈이나 공동체적 비전이 아무런 근거 없이 공상에서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야망은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꿈과 야망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야망은 자기 나름대로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라면 비전은 나를 넘어선, 때로는 민족적인 이해관계마져 초월하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근거해 있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비전이란 하나님께서 나, 혹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꿈은 배우는 것이다. 책속에서 만나는 인류의 스승들의 생애와 꿈을 읽으면서 나의 비전을 넓히고 높이고 깊이를 더해가야 하는 것이다.

        리더십의 세 번째 요소는 "힘의 요소"이다. 단 두 사람만 있어도 그 사이에는 파워(power)가 흐른다. 부모 자식은 물론 친구, 상사와 부하직원, 대통령과 국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에는 파워가 존재한다. 지도력은 상대를 지배하지 않고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힘, 가장 고요하고 합법적이며, 동시에 가장 막강한 파워다(블레인 리, 2000). 리에 의하면 지도력의 입장에서 사람은 크게 두가지를 선택한다. 지도력을 미치는 쪽과 무력함이다. 물론 필자가 보기에는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완전 무력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울음으로 표현함으로써 부모에게 심리적 정서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지도력은 좀더 좁은 의미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라고 정의해 보자. 그러할 때 지도력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시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번째 스타일은 강압적 지도력으로 힘으로 추종자들을 따라오도록 하는 사람이다. 두번째 스타일은 실리적 지도력으로 보상과 같은 거래관계로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반면 세번째 스타일의 원칙중심 지도력은 추종자들이 존경하기때문에 따르는 지도력이다. 힘에 근거한 리더십이나 효용의 지도력은 힘이 없어지거나 거래관계가 끝나면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칙 중심의  리더십은 설사 그 사람이 죽었다 하더라도 후세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또 다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지도력을 {영향력}이라는 완곡한 단어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이 단어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힘이라고 하면 정치적 파워가 연상되지만 {영향력}은 인간관계에서 보편적으로 채택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지도력을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이라고 정의할 때 훨씬 이해하기 쉽고 논의의 폭이 넓어진다.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나오는 영향력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여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리더들에 대한 느낌을 블레인 리는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다.
"평화롭다."
"그들과 함께 있들 때 그랬던 것처럼 그저 기분이 좋다."
"끝없는 감사의 마음이 든다."
"내가 그들에게서 받았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은 느낌이 든다."
"그들이 그립다."
"그들이 없으니까 안타깝다."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못해서 안타깝다."
"애정, 따뜻함, 친밀감."
"만족스럽다. 그의 존재에서 느꼈던 만족감을 기억한다. 사실상 그에 대해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그 느낌들을 되돌릴 수 있고 난 지금 커다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지금도 내 곁에 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들처럼 행동하고 싶다."
"나에게는 중요한 분들이다. 나는 그분들을 소중히 여긴다."


     실제 훌륭한 지도자들을 연구해본 결과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데 사용하는 시간이 50%, 윗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시간 20%,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15%, 그리고 아랫사람을 관리하는데 사용하는 시간은 고작 5% 정도였다는 보고가 있다. 지도자들은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리더십의 요소로서 네 번째 고려할 것은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발성을 들 수 있다. 본래 리더십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의 커다란 문제로 취급되어 왔으나, 기업이 사회적 조직으로서 중요하게 되자 이의 반영으로서 경영학 특히 경영관리 면의 문제가 되었고, 경영자의 리더십은 기업의 발전을 좌우하는 것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리더십이 지배와 다른 것은 그 기능의 수행을 피 지도자의 자발성에 기대하는 점과, 집단의 성질에 따라 특성이 반드시 고정적이 아닌 데 있다. 물론 강압적인 힘에 기초한 리더십이나 상호 이익을 전제한 거래 중심의 리더십도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리더십은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존경을 끌어내는데 한계가 있다. 힘의 균형이 깨지거나 거래가 끝나면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리더십은 추종자의 자발성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편 지도자란 엄밀한 의미로 집단에 있어서의 리더십(지도적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어떤 인기 있는 사람이나 대표자, 또는 문화영역의 권위자 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결국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체로서 지도자는 집단의 통일을 유지하고 성원이 행동하는 데 있어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 리더십의 중요성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리더십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리더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리더십의 다양한 기법들, 조직에 대한 이해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II. 독서와 리더십
     위에서 리더십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방향성과 가지, 힘(영향력), 그리고 추종자들의 자발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지도력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변화되면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은 자연히 변화되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과 함께 산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역사에 수없이 많은 위인들, 훌륭한 사람들이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율곡, 이퇴계, 세종대왕, 기타 세종대왕에 의해 시작된 독서당에서 길러진 인재들(350년 동안 320명의 인재 배출)원효대사, 안중근, 안창호, 신채호, 정약용,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책과 더불어 살았다. 외국의 수많은 나라들의 예를 들자면 그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생각나는 사람들을 건드려보자. 에디슨, 처칠, 나폴레옹, 마르틴 루터 킹, 존 칼빈, 요한 웨슬레,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스펄전, 벤자민 프랭클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영국의 하인리히 8세, 마리아스튜워트와 그의 아들 야콥, 볼테르, 칸트, 훔볼트 형제, 헤르더, 괴테, 쇼팬하우어, 오스왈드 슈팽글러, 칼 야스퍼스, 톨스토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니체, 그 외에 악역을 맡은 이들 중에 칼 마르크스,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 김일성까지 이 모든 사람들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일에든지 호기심을 갖은 사람들이었다. 그 호기심은 세상에 문제를 바라보게 하였다.  그래서 문제를 찾으려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 의식은 곧 현실의 문제를 발견케 한다. 그들은 발견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묻기도 하고 이 책 저 책을 살펴보면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직접적인 해답을 책에서 찾지 못하면 이 문제의 원인들을 역사적인 흐름 가운데서 찾고자 책을 뒤지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학문 등에서 제기된 문제와 그 해결책들을 보면서 힌트를 얻는다. 결국 호기심은 문제를 찾으려는 의식으로 발전되고 실제로 문제를 발견하여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고 깊은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위대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책의 사람이 되었다. 찰스 스펄전 목사가 그런 예이다. 그는 15살 때 목사님들과 함께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론 예수님이 12살에 성전에서 박사들과 토론한 것(하워드 핸드릭슨,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17살에 영국 런던의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였고 그 설교를 들은 교회의 책임자들은 스펄전을 그곳에서 목회자로 일해달라고 청빙하였다. 스펄젼은 신학교도 대학도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불멸의 설교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간단하다. 그 답은 독서에 있었다. 그는 이렇게 독서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철저하게 읽으라, 흠뻑 몸에 벨 때까지 그 안에서 찾으라. 읽고 또 읽어 되씹어서 소화해 버리라. 바로 여러분의 살과 피가 되게 하라. 좋은 책을 여러 번 읽어서 주를 달고 분석해 놓으라" 그는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사상 자기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읽었다. 그가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구절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설교에 나타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책을 가져오되 특별히 앙피지로 된 책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져다 달라고 한 대목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충만함을 받았으나 책을 원했습니다. 그는 적어도 30년 간을 설교했으나 그는 책을 원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을 원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책을 원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리어 올라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말을 들었지만 그러나 그는 책을 원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했음에도 그는 책을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읽는데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스펄전의 독서편력을 이 말 한마디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도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 목사들처럼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방법이 있다. 그들에게 가서 "어떻게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요" 라고 물어보면 어떨까? 그게 불가능하면 그들이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를 연구해보고 나서 발견된 방법을 적용하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 방법은 비현실적이다. 두 번째가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연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 분야가 그렇게 좁은 분야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분야는 신학인데 이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분야를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학문이 생겨나고 후대의 사람들은 먼저 이론화된 학문을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연구경험을 받고 나서 출발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연구된 자료를 가지고 나의 독서기술을 습득한다면 매우 유익한 출발을 할 수 있다. 결국 독서지도라는 교육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일이다. 독서가 시간싸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책을 읽지 못한다. 아무리 독서기술이 뛰어나도 시간이 없으면 책과 나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보즈웰이라는 사람은 "하루에 5시간만 책을 읽으라. 그러면 곧 당신은 박식해질 것이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말했다. 이렇게 해서 독서를 통해서 내가 변하면 나머지 가정의 독서교육과 교회의 독서교육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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