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 / 윤동주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 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양 땍볕에 자꾸 익어 간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저작 : 1938년 ( 22 연전#1/4 ) 10월 26일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거짓부리 / 윤동주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 한 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가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알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 걸.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간판(看板)없는 거리 / 윤동주 정거장(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사랑스런 추억(追憶) /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停車場)에서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기차(汽車)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下宿房)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汽車)는 몇 번이나 무의미(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停車場)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아침 / 윤동주 휙, 휙, 휙,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 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로.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는 소엉덩이처럼 푸드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오. 잎, 잎, 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오.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 고석규 ―아주 캄캄한 시간 속에서 무한내전(內戰)을 피할 수 없을 때 의식은 한 층 절대적 반항에 가까운 것이다 ―. R. D. Reneville 1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0년에서 45년에 걸친 우리문학의 가 장 암흑기에 마련된 것이다. 전 50여편의 유고시는 거의 표백적인 인간 상 태와 무잡(無雜)한 상실을 비쳐내던 말세적 공백에 있어서 불후한 명맥을 감당하는 유일한 이었었다. 을 청산하기 위한 내 면의식과 이메이지의 이채로운 확산, 그리고 심미적 응결과 우주에의 영원 한 손짓은 그의 28년 생애를 지지한 실존이었으며 겨레의 피비린 반기에 묻 힌대로 그 암살된 시간 위에 종식하는 날까지 그의 로 말없이 옮아가며 불붙는 사명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에 대한 ..
삶과 죽음 / 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序曲)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恐怖)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者)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者)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勝利者) 위인(偉人)들!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