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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안제미(擧案齊眉)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다. 《出典》 '後漢書'의 逸民傳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縣(현)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 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경국지색(傾國之色) 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용모가 빼어난 미인.. '漢書' 李夫人傳. '傾國'이 '傾城'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傾國(경국)이란 말은 李白의 [名花傾國兩相歡]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
견토지쟁(犬兎之爭)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 곧 ① 양자의 다툼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利)를 봄에 비유. 횡재(橫財)함의 비유. ② 쓸데없는 다툼의 비유. 犬:개 견, 兎:토끼 토, 之:갈 지(…의), 爭: 다툴 쟁. [동의어] 전부지공(田父之功). 방휼지쟁(蚌鷸之爭). 어부지리(漁父之利).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출전] 《戰國策》〈齊策〉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重用)된 순우곤(淳于?)은 원래 해학(諧謔)과 변론의 뛰어난 세객(說客)이었다. 제나라 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로(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名犬)이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를 뒤쫓았사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돈 다음 가파른 산꼭대..
고복격양(鼓腹擊壤) // ‘태평성세를 즐김’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 《出典》‘十八史略’ 樂府詩集 擊壤歌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堯)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민정(民情)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立我烝民]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莫匪爾極]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不識不知]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順帝之則]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
괴짜 문인(文人)들 ① 오상순(吳相淳․1893~1963) 오상순은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대자유인이었다. 목재상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나와 전도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20년 김억․남궁벽․황석우․변영로등과 함께 [폐허]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 이란 평론을 발표하면서 식민 치하의 허무주의자로 돌아선다. 불교에 귀의, 허무의 극한에서 공(空)을 깨치고 속세로 돌아와 동 가식서가숙하며 70평생을 문학도들에게 시의 순수를 자신의 삶 자체로 깨우쳐주다 갔다. 기독교도, 불교의 공사상도 초월해 「공초(空超)」라 한 오상순은 하루 2백개비씩 줄담배를 피운「꽁초」로도 유명하다. 오상순같이 세상과의 불화를 견뎌낼 수 없는 타고난 순정한 기질로 세 상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유혼으로 문학을 일..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친하게 사귐. 《出典》韓愈의 '柳子厚墓誌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 字는 '退之')와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운동을 제창한 문우(文友)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墓誌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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