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 서정범
by 송화은율미리내 / 서정범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보통 학교 아이들이 기차를 본 횟수를 늘리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달려가기도 하고, 기차를 보려고 밤늦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그리고 기차에서 얼마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느냐가 큰 자랑거리였다. 하루는 셋이서 새로운 기록을 내려고 기차 오기를 기다렸다. 선로 가에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기적을 울리기 때문에 숨어 있다가 지날 때 바싹 다가서야 된다. 기차가 굽이를 돌아 나타났다. 뛰어나왔다. 뒤늦게 우리를 본 기관사는 고막을 찢을 듯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가슴이 막 흔들린다. 순간, 기차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현기증이 난다. 겁이 나서 물러선다는 게 뒤로 자빠져 머리를 찧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함께 있던 사내애들은 온데간데없고 언제 왔는지 은하(銀河)가 울먹이며 옆에 있었다. 책보를 풀어 찬물에 적셔 머리에 대어 주고 있었다. 함께 있던 두 아이는 질겁해서 도망쳐 버렸다. 그 후로는 기차 꿈을 자주 꾸었다. 검은 연기를 뿜는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 논이고 밭이고 도망치는 나를 쫓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곤 했었다.
은하라는 소녀는 나의 짝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오 리 가량 더 가야 되는 마을에 살았다. 청소나 양계 당번도 한 반이고, 누룽지까지 가져와 나눠 먹는 사이였다. 은하가 하루는 자기 생일이라고 인절미를 싸 가지고 와서 공부 시간에 책상 밑으로 몰래 주었다. 선생님이 돌아보셨다. 난 고개를 못 들고 목이 메어 넘기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쩔쩔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은하와 나는 레일 양쪽 위에 올라서서 떨어지지 않고 걷기 내기를 하였다. 지는 편이 눈깔사탕 사 내기이다. 저녁놀이 등에 져서 그림자가 전선주만큼 퍽 길다.
“우리는 언제나 저 그림자같이 크나?”
내가 말했다.
“크지 않고 이대로면 좋겠다.”
은하가 말했다.
“넌 크는 것 싫니?”
난 이상해서 물었다.
“싫지는 않지만 크면 헤어지게 되지 않니?”
은하의 대답이었다.
나는 은하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만 레일을 헛디뎠다. 그 날 눈깔사탕은 내가 샀다. 은하의 고운 눈동자도 이렇게 눈깔사탕같이 달까?
6학년으로 올라가는 봄 방학이었다. 양계 당번이어서 학교엘 갔었다. 당번은 아홉 명인데 사내애가 여섯 명, 계집애가 세 명이었다. 그런데 계집애들은 코빼기도 나타내지 않는다. 알고 보니 뒷동산 양지바른 잔디밭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사내애들은 약이 좀 올랐다. 계집애들을 곯려 주기로 의논이 되었다. 뱀 허물을 뒷동산에서 찾아 내었다. 철사에 뱀 허물을 꿰어 계집애들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 타래에 꽂기로 한 것이다. 계집애들 앞에서 사내애들이 거짓 싸움을 벌였다. 나는 철사에 꿴 뱀 허물을 갖고 뒤로 몰래 기어들었다. 사내애들의 거짓 싸움은 더욱 커졌다. 계집애들은 사내애들의 싸움에 정신이 팔렸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머리 타래에 꽂아 놓는 데 성공했다. 나는 돌아와서 사내애들의 싸움을 말리었다. 계집애들에게 선생님이 찾는다고 했다.
한 계집애가 일어나다 “뱀!” 하고 소리질렀다. “어디!” 한 계집애가 놀란다. 뱀 허물이 달려 있는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사내애들은 당황한 나머지 당번 선생님께 가서 계집애가 죽었다고 했다. 까무라쳤다는 일본말을 몰라서 그냥 죽었다고 한 것이다. 당번 선생님은 하야시라는 일본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오셔서 팔다리를 주무르고 강심제 주사를 놓아 겨우 깨어나게 했다. 내 짝인 은하가 까무러친 것이다. 그 후 은하는 학교를 쉬게 되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은하의 고운 눈동자가 이제는 퍽 무섭게만 보일 것 같았다. 너무 장난이 심했다고 뉘우쳤다. 은하의 머리에 꽂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몇 번이고 뉘우쳤다.
한 달이나 가까이 쉬다가 은하가 학교엘 나왔다. 핼쑥해졌다. 난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은하는 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해 주었다. 고마웠다. 정말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되었다. 난 은하에게 사과하는 뜻에서 복숭아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뒤뜰에 있는 복숭아를 몰래 따야 한다.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꾸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밤에 따서 학교 가는 길 옆 풀섶에 숨겨 두었다가 아침에 학교 갈 때 가져가리라. 베적삼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복숭아를 따서 맨살에 집어 넣었다. 땀과 범벅이 되어 복숭아털이 가슴과 배에 박혔다. 따끔거리고 얼얼하고 화끈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앓는 소리도 못 하고 밤새도록 혼자 끙끙거렸다. 그렇지만 은하가 복숭아를 받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난 갑자기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내일 새벽차로 서울에 간다고 은하에게 말했다. 은하는 정말이냐고 물으며 퍽 섭섭해하였다. 이튿날 새벽, 숙부님과 함께 기차를 타려고 정거장엘 갔다. 간이 정거장이라 새벽, 밤에는 손님이 있다는 신호로 불을 놓아야 그 불빛을 보고 기차가 서는 것이다. 숙부님이 들고 간 짚단에 불을 놓고 나무 그루터기를 주워다 놓았다. 그런데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은하였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배웅을 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십 리나 되는 어두운 새벽길을 혼자서 온 것이다. 무섭지 않느냐고 했다. 늦어서 떠나는 걸 못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뿐, 뛰어오느라고 몰랐다는 것이다. 눈깔사탕 한 봉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은하의 마음씨가 고 귀여운 눈동자같이 곱다고 여겨졌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숙부님이 빙그레 웃으신다. 나뭇등걸에 불이 붙어 불길은 더욱 확확 타올랐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은하는 나의 가슴 깊이 꿈과 별을 심어 놓았다. 계집애 하면 고 귀여운 별을 생각하고 그 별과 비교하게 되었다. 편지를 쓰고 찢기가 수백 번, 지금껏 소식 한 번 전하지 못한 ‘숙맥’인 나였지만. 열일곱 살 땐가 여름 방학에 친구를 따라 두메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피우는 이야기꽃도 재미있었지만, 모닥불에 묻어 놓은 옥수수와 감자를 꺼내 먹는 맛도 구수하였다. 이슥하여 동네 사람이 가고, 나는 멍석에 누워 하늘 가운데를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고 귀여운 은하의 눈동자를 찾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검은 연기를 뿜는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며 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차가 아니고 용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용이 아니고 뱀이었다. 이 뱀은 순식간에 허물만 남았다. 회오리바람이 불자 허물은 수만 수천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은하수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은하수에서는 홍수가 일어났다. 은하수의 별이 소나기같이 지구로 쏟아져 내 이마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빗방울이 후드득 이마를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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