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 이강백
by 송화은율들판에서 / 이강백
등장 인물 : 형, 아우, 측량기사. 조수들. 사람들
장소 : 들판
무대 뒤쪽에 들판의 풍경을 그린 커다란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샛노란 민들레꽃, 빨간 양철지붕의 집,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이 동화책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킨다.
막이 오른다. 형과 아우,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형은 무대의 오른쪽에서, 아우는 왼쪽에서 수채화를 그린다. 둘 다 즐거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른다. 형, 아우에게 다가가서 그림을 바라본다.
형 : 야, 멋진데! 아주 멋지게 그렸어!
아우 : 경치가 좋으니까 그림이 잘 그려져요.
형 : 넌 정말 솜씨가 훌륭해.
아우 : 형님 솜씨가 더 훌륭하죠.
형 : 아냐, 난 너만큼 잘 그리지 못하는걸.
아우 : (형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감탄한다.) 형님 그림이 훨씬 멋있어요!
형 : (기뻐하며) 오, 그래?
아우 : 그럼요. 푸른 들판, 시냇물과 오솔길, 샛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꽃,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 …….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군요.
형 : 난 아직 집은 못 그렸어. 그런데 너는 벌써 우리가 사는 집까지 그렸구나. 들판 한가운데 빨간색 양철 지붕과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아우 : 난 이 곳에서 평생토록 형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형 : 나도 너와 함께 아름다운 이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형과 아우, 다정하게 포옹한다.
형 :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아우 : 분명히 저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계실 거예요.
형 : 정말 고마우신 부모님이시다. 이렇게 좋은 곳을 우리 형제에게 물려주셨으니!
형, 주위에 피어 있는 민들레꽃을 꺾어서 아우에게 내민다.
형 : 들판에 피어 있는 이 민들레꽃에 걸고서 맹세하자. 우리 형제는 언제나 사이좋게 지내기로…….
아우 : 그래요. (민들레꽃을 꺾어 형에게 내밀며) 이 민들레꽃이 우리 맹세의 증표예요.
형과 아우, 흐뭇한 표정으로 민들레꽃을 주고받은 뒤, 각자의 그림 앞으로 되돌아간다.
형 : 난 인제 집을 그려야겠다.
아우 : 나는 저 파란 하늘과 해님을 그리겠어요.
형과 아우,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측량 기사와 두 명의 조수가 등장한다. 측량 기사는 측량기를 세워 놓고 조준경을 들여다보면서 조수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측량 기사 앞쪽에는 한 명의 조수가 눈금이 그려진 표지봉을 들고 서 있다. 측량 기사의 뒤쪽에서는 측량이 끝난 지점마다 다른 조수가 말뚝을 박고 밧줄을 맨다.
형 : (성난 모습으로) 여봐요! 여봐요!
측량 기사 : (태연하게) 우리 말씀인가요?
형과 아우 : (측량 기사에게 다가간다.) 당신들,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측량 기사 : 측량하고 있죠, 보시다시피.
아우 : 여긴 우리 땅인데, 왜 함부로 들어와서 말뚝을 박고 줄을 쳐요?
측량 기사 : (조수들에게 명령조로 말한다.) 자네들, 뭘 해? 어서 땅주인들께 인사드려!
조수 1 : 안녕하세요?
조수 2 :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측량 기사 : 아참, 제 소개도 해야죠. 저는 측량 기사입니다.
아우 : 우린 측량을 부탁한 적 없어요. 잘못 알고 온 모양인데, 어서 우리 들판에서 나가요!
측량 기사 : 우린 그냥 실습하러 온 겁니다.
형과 아우 : 뭐, 실습하러 왔다고요?
측량 기사 : 네, 오늘 날씨가 화창해서 조수들을 데리고 야외 실습을 나왔어요. (눈을 가늘게 뜨고 들판을 둘러보며) 그냥 버려 두기에는 아까운 땅이군요. 공장 부지로 개발해서 팔거나 주택지로 나눠 팔면 큰돈을 벌겠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죠? 우릴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시니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형 : (아우에게) 우리가 너무 심했나?
아우 : 글쎄요…….
측량 기사 : 내 조수들이 측량 경험이 없거든요. 그래서 실습을 나온 건데, 아무 설명도 없이 말뚝을 박아 대니까 화가 나셨나 보죠?
아우 : 그 말이 맞아요. 미리 알려 주셨더라면, 우린 기꺼이 허락했을 겁니다.
측량 기사 : 두 분께선 안심하고 그림이나 그리세요.
형 : 그런데 실습이 끝나면 저 말뚝들은 어떻게 할 거죠?
측량 기사 : 걱정 마세요. 우리가 다시 뽑아 갈 테니까…….
아우 : 줄은요?
측량 기사 :물론 줄도 거두어 가야죠. (조수들에게) 자, 그 표지봉을 저 앞쪽에다 세워! 그리고 뒤따라서 말뚝을 박고 밧줄을 쳐!
측량 기사와 조수들, 작업을 진행하면서 퇴장한다. 형과 아우 사이를 나누어 놓은 일직선의 밧줄이 허리 높이만큼 매어져 있다. 형과 아우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신경이 쓰이는지 말뚝과 밧줄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아우 :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측량 실습을 끝내면 그들이 치운다고 했으니까요.
형 : 그들이 잊고서 그냥 가면 어떻게 하지?
아우 : 우리가 치우면 되잖아요?
형 : 그렇구나. 난 괜히 염려했다. 그런데 지붕 그릴 빨간색 물감 좀 빌려 주겠니?
아우 : 그럼요. 이리 와서 가져가세요.
형, 밧줄 앞에서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망설인다. 허리 높이의 밧줄을 뛰어 넘어가려다가 말고, 밧줄 밑으로 몸을 낮춰 아우에게 간다. 아우는 빨간색 물감을 형에게 빌려 준다.
형 : 고맙다.
아우 : 부족한 게 있거든 언제든지 건너오세요.
형 : (밧줄 밑으로 기어 나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너도 건너와, 나한테 있는 거라면 뭐든 빌려 줄 테니…….
아우 : 난 하늘색이 모자라요.
형 : 이 쪽으로 와서 가져가.
아우, 밧줄을 껑충 뛰어 넘어서 간다. 형은 아우에게 하늘색 물감을 빌려 준다.
형 : 불편하구나. 넘어 다니기가…….
아우 : 하지만, 재미는 있는데요.
형 : 재미있다고?
아우 : 네, (밧줄을 뛰어넘어가며) 이것 보세요! 껑충껑충 뛰어서 넘어 다니는 게 재미있군요!
형 : 옛날 생각이 난다. 우리가 어렸을 땐 줄넘기놀이를 했었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은 줄을 넘어갈 수 있지만, 진 사람은 넘어가지 못하는…….
아우 : 형님, 나도 방금 그 놀이가 생각났어요.
형 : 우리 어렸을 때처럼 재미있게 해 볼까?
아우 : 좋아요. 가위, 바위, 보!
형 : 가위, 바위, 보!
형과 아우, 밧줄을 사이에 두고 가위바위보를 한다. 아우가 이긴다. 그는 형 쪽으로 껑충 뛰어넘어가서 뽐내며, 의기 양양하게 다니다가 자기 쪽으로 되돌아온다. 아우는 세 번이나 형을 이기고,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형 : 그만 하자, 그만 해!
아우 : 왜요?
형 : 너는 나보다 늦게 한다! 내가 가위를 내면 너는 기다렸다가 바위를 내놓고, 내가 보를 하면 너는 그걸 본 다음 가위를 내놓잖아?
아우 : 아뇨! 난 형님과 동시에 했어요!
형 : 난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뒤돌아서서 자신의 그림 앞으로 걸어가며) 다시는 너하고는 놀이 안 해!
아우 : 형님, 나에게 지더니만 심통이 났군요?
형 : 너는 날 속이고 이겼어!
아우 : 아뇨! 형님이 지금 화를 내는 건 내가 이겼기 때문이에요. 형님은 언제나 이겨야 하고, 동생인 나는 항상 져야 한다! 그게 바로 형님의 고정 관념이죠!
형 :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내 허락 없이는 이 쪽으로 넘어오지 말아라!
아우 : 그럼 형님도 내 땅에 넘어오지 말아요!
아우, 자신의 그림 앞으로 되돌아간다. 형과 아우는 침묵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형 : 가만 있자, 저건 놀라운 사실인데! (아우를 향하여 소리지른다.) 야, 저기 있는 우리 집을 봐!
아우 : 우리 집?
형 : 그래!
아우 : 우리 집이 어때서요?
형 : 난 지금까지 우리 집이 들판 한가운데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냐! 측량 기사가 쳐 놓은 밧줄을 보라고. 우리 집은 한가운데가 아닌, 약간 오른쪽에 있잖아?
아우 : 그렇군요. 우리 집이 오른쪽에 있는데요.
형 : 오른쪽은 내 쪽이야.
아우 : 형님 쪽에 있다고 우리 집을 형님이 독차지하려는 건 아니겠죠?
형 : 너는 내 허락 없이는 내 집에 들어오면 안 돼!
아우 : 형님, 저건 우리 집이에요! 우리가 다 함께 사는 집이라고요!
형 : 네가 있는 그 쪽도 우리가 다 함께 살던 땅이었어. 그런데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넘어 가지 못하게 했잖아?
아우 : 그건 오해예요, 형님. 얼마든지 이 쪽으로 넘어오세요!
형 : 지금은 넘어오라고?
아우 : 네, 형님.
형 : 내가 뭣 때문에 그 쪽으로 가야 하지? (아우를 외면한 채 그림을 그리며) 난 집이나 마저 그려야겠다.
아우 : 좋아요, 형님을 집을 가지세요. 그렇다면, 나는 젖소들을 가지겠어요.
형 : 젖소들을 가지겠다고?
아우 : 저기 들판을 보세요. 젖소들은 지금 왼쪽에, 그러니깐 내 쪽에 있어요.
형 : 어떻게 모두 네 쪽에 있지?
아우 : 내 쪽의 풀이 탐스러워 젖소들이 몰려왔겠죠. 난 젖소들을 길러서 재산을 모을 겁니다. 그래서 형님 집보다도 더 큰 집을 짓겠어요!
형 : 집을 크게 짓든 작게 짓든 네 마음대로 하렴! 하지만, 젖소들은 자유롭게 나 둬! 네 땅의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다시 내 땅으로 넘어올 거다!
측량 기사와 조수들, 등장한다.
측량 기사 : 어떻습니까, 우리 실력이? 양쪽으로 정확하게 나눠 놓은 측량 솜씨에 놀라셨을 겁니다. (조수들은 칭찬한다.) 자네들, 참 잘했어. 아주 능숙한 솜씨야!
조수들 : 고맙습니다, 칭찬해 주셔서.
조수 1 : 사실은 우린 이런 일을 여러 번 했거든요.
조수 2 : 측량을 한 다음엔 땅을 빼앗았죠.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요.
측량 기사 : 쉿, 입조심해!
조수들 : 네, 알겠습니다.
측량 기사 : (먼저, 형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측량을 끝냈으니 다음엔 무슨 일을 할까요?
형 : 그걸 왜 나에게 묻죠?
측량 기사 : 일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죠. 처음 약속대로 말뚝과 밧줄을 치워 드릴까요?
형 : 아니, 그냥 둬요.
측량 기사 : (동생에게 넘어가서 묻는다.) 어떻게 할까요? 당신 형님은 말뚝과 밧줄을 그냥 두라는데요?
아 우 : 밧줄은 약해요. 더 튼튼한 건 없어요?
측량 기사 : 더 튼튼한 거라면…….
아 우 : 젖소들이 넘어가지 못할 만큼 튼튼한 것이 필요해요.
측량 기사 : 그거야 철조망도 있고, 높다란 벽도 있죠.
형 : (아우를 향하여 꾸짖는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아 우 : 형님은 내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측량기사에게) 철조망보다는 벽이 좋겠어요.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리며) 이 정도 높은 벽을 쌓아올리면 아무것도 넘어오지 못하겠죠!
형 : 뭐, 높은 벽? 너와 나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겠다고?
측량 기사 : 우리 조수들은 유능해서 여러 가지 부업을 하고 있죠. (조수들을 손짓으로 부른다.) 이리 와! 이분에게 자네들이 잘 설명해 드려!
조수들, 아우에게 다가간다.
조수 1 : 이런 들판에는 조립식 벽이 좋습니다.
조수 2 : 설치하는 시간도 얼마 안 걸리고 비용도 저렴합니다.
측량 기사 : 그럼요. 벽돌로 쌓는 것 못지 않게 튼튼하고요.
조수들 : 품질은 우리가 보장해 드립니다.
아우 :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난 현금이 없어서.......
측량 기사 : 당장 현금이 없으면 땅으로 주셔도 돼요.
아우 : 땅으로?
측량 기사 : 네, 지금 가지고 계신 땅의 반절을 주세요.
아우 : (망설이는 태도로) 하지만,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측량 기사 : 그래도 땅을 주고 벽을 만드는 게 낫습니다. 젖소들이 저 쪽으로 넘어가 버리면 당신만 큰 손해 아닙니까?
아우 : 좋아요. 땅 반절을 드릴 테니 벽을 설치해 주세요.
조수들, 벽 공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칸막이 형태의 벽을 운반해 오더니 재빠르게 조립해서 밧줄을 따라 세워 놓는다. 형과 아우 사이에 벽이 가로놓인다.
형 : 맙소사, 이런 벽이 생기다니!
아우 : 형님 때문이야! 집도 가지겠다, 젖소들도 가지겠다는 형님의 그런 욕심만 아니었어도, 난 정말 벽 같은 건 만들지도 않았을 거야.
형 : 믿어지지 않아. 동생이 이럴 수가……!
아우 : 하지만, 형님과 완전히 갈라져 살 생각을 하니 마음이 괴로운데……. 그래, 벽은 잘못된 거야. 내가 너무 심했어.
형 : 동생 탓만은 아니야. 내 탓도 있어. 내가 잠시 기분이 상해서, 동생에게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잘못이었어. 그런 나를 동생은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우 : 형님에게 잘못했다고 빌어야겠어.
형 :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겠어.
형과 아우, 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망설인다.
아우 : 그렇지만 형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형 : 미안하다고 말해도 소용 없다면?
아우 : 나 혼자 독립해서 사는 것도 나쁜 건 아닐 텐데, 좀더 생각해 봐야겠어.
형 : 그래도 체면이 있지, 내가 먼저 말할 수는 없어.
아우 :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해 보자.
형 : 동생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군.
형과 아우, 각자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린다. 맑았던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세게 불어 온다.
형 : 바람이 거칠게 불어 오는군.
아우 :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있어.
측량 기사,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형의 지역에 등장한다.
측량 기사 : 보세요! 바로 이 들판이 내가 여러분에게 분양해 드릴 땅입니다!
사람들 : 굉장이 넓은데요!
사람1 : 난 공장을 짓고 싶어요.
사람2 : 상점은 어디가 좋을까요?
사람3 : 우선 주택부터 짓고 봅시다.
사람들 : 그런데 벽 이 쪽 땅만 분양할 건가요?
측량 기사 : 이 쪽부터 둘러보세요. 그리고 저 쪽 땅도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 형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펴본다. 측량 기사,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형에게 다가간다.
측량 기사 : 아직도 그림을 완성 못 했습니까?
형 : 네, 저 높다란 벽 때문에.......
측량 기사 : (그림을 바라보며) 그림 가운데 벽을 그려 넣는 중이군요.
형 : 이젠 아름다운 들판이 아니에요. 내 그림도 보기 싫게 됐고요.
측량 기사 :내가 봐도 그림이 흉측합니다.
형 :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측량 기사 :이 땅을 살 사람들이죠.
형 : 내 땅을요? 난 절대로 내 땅을 남에게 팔지 않습니다.
측량 기사 : 물론,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결국 이 들판은 당신 형제 것이 아니라 내 소유가 될 겁니다. 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어요.
형 :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요!
사람들, 형의 지역을 둘러보고 퇴장한다. 측량 기사는 벽에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측량 기사 : 이상하게 조용한데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형 : 나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겠죠.
측량 기사 : 이렇게 조용한 게 의심스러워요. 혹시, 저 쪽의 동생이 형님 집에 몰래 들어가려고 땅굴을 파는 건 아닐까요?
형 : 땅굴을 파면 요란한 소리가 들릴 텐데요?
측량 기사 : 땅 속에서 파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겠어요? (형에게 다가간다.) 가만, 저 쪽이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측량 기사, 바지 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분다. 그러자 조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등장한다. 그들은 바퀴가 달린 전망대를 밀면서 들어온다.
형 : 이건 뭡니까?
측량 기사 : 감시용 전망대입니다. 밑에는 이동하기 쉽게 바퀴를 달았고, 위에는 불빛이 강렬한 탐조등을 장치했죠. 올라가 보세요. 자동으로 탐조등이 켜지면, 벽 너머 저 쪽을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형 : (망설이며) 글쎄, 이런 것이 필요할까요?
측량 기사 : 이 전망대만 있으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죠.
조수1 : 이 쪽에서 사지 않아도 좋아요.
조수2 : 저 쪽에 팔면 되니까요.
측량 기사 : 저 쪽에서 이런 걸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등골이 오싹해질 거예요.
형 : 저어, 가격은 얼마나 합니까?
측량 기사 : 가격은 걱정 마세요. 만약, 현금이 없다면, 땅으로 주셔도 됩니다.
형 : 땅은 얼마만큼이나?
측량 기사 : 많이 달라고는 않겠습니다. 반절만 주세요.
조수들 : (전망대를 밀고 나가며) 너무 망설이는데, 살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 쪽으로 팔러 가겠어요!
형 : 아니, 여기 둬요! 내가 삽니다!
측량 기사 : 잘 결정하셨습니다. (조수들에게) 이왕이면 벽에 바짝 붙여 드려. 올라가서 저 쪽을 바라보기 편리하도록 말야.
조수들 :네, 그러죠.
측량 기사, 퇴장한다. 조수들은 전망대를 벽에 붙여 세워 놓는다. 사람들이 아우의 지역에 등장한다. 그들은 관심 있게 그 지역을 둘러본다. 조수들, 작업을 마친 후 퇴장한다. 형은 전망대 위에 올라가기를 망설인다. 측량 기사, 아우의 지역에 등장한다.
측량 기사 : 자, 어떤가요? 이 쪽도 저 쪽만큼이나 좋은 땅이죠?
사람1 : 양쪽 다 땅은 좋은데, 저 가로막은 벽이 눈에 거슬려요.
사람2 : 그래요. 저 벽 때문에 누가 집을 짓겠어요?
사람3 : 헛걸음만 했어요. 돌아들 갑시다.
측량 기사 : 여러분은 저 벽이 얼마나 훌륭한 관광 명소인지 모르시는군요!
사람들 : 관광 명소라뇨?
측량 기사 : 여러분이 이 곳에 호텔을 세우면 큰돈을 벌 겁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들판에서 벽을 쌓아 놓고 싸우는 어리석은 형제의 싸움을 보려고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올 테니까요.
사람들 : 설마, 그럴 리가...... .
측량 기사 : 아뇨, 틀림없이 몰려옵니다. 싸움이 더욱더 치열해지면 저 벽은 온 세상에 널리 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분양할 때 사 두세요. 저 벽이 유명해진 다음엔 땅값이 몇 배나 뛸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 : 듣고 보니 그렇군요! 분양 신청은 어디에 해야죠?
측량 기사 : 우리 측량 사무소에 가서 하세요. 선착순 접수니까 일찍 가시는 분이 유리합니다. 그리고 분양 측량은 우리에게 맡겨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따로따로 정확하게 나눠 놓을 테니……. 그럼 어서 서둘러요! 늦게 신청하면 받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 측량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로 앞을 다투며 달려나간다. 측량 기사는 아우에게 다가간다.
측량 기사 :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울적한 표정이군요!
아우 : 그림이 보기 흉해요.
측량 기사 : 그림이 왜요?
아우 : 저 벽 때문에 흉측하게 됐어요.
측량 기사 : 그건 저 쪽의 심보 사나운 형님 탓입니다.
아우 : 아뇨. 내 탓이죠.
측량 기사 : 당신은 잘못한 것 없어요.
아우 : 어쨌든, 이렇게 나눠진 이상, 나도 독립해서 살아야겠어요.
측량 기사 : 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형님은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아우 : 그게 무슨 뜻이죠?
측량 기사 : 이제 곧 알게 됩니다. 저 쪽의 심보 나쁜 형이 당신 땅으로 넘어올 테니까요.
아우 : 형님이?
측량 기사 : 당신을 쫓아 내고, 젖소들을 차지할 욕심이죠.
측량 기사, 호루라기를 꺼내 분다. 조수들이 검정색 가죽가방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 가방에서 분해 상태의 장총을 꺼내 조립한다.
측량 기사 : 이게 뭔지 알아요?
아우 : 총인데요.
측량 기사 : 아주 성능이 좋은 총이죠. 당신은 이 총으로 벽을 지켜야 합니다.
아우 : 벽을 지켜요?
측량 기사 : (아우의 손에 총을 쥐어 주며) 지금은 외상으로 드릴 테니, 대금은 나중에 땅으로 주세요.
조수들 : (가방에서 총탄을 꺼내 놓으며) 여기 총알이 있어요.
측량 기사 :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아낌없이 쏘세요!
측량 기사와 조수들, 웃으며 퇴장한다. 벽의 오른쪽에서 형이 전망대 위로 올라간다. 탐조등이 켜지면서 강렬한 불빛이 벽 너머를 비춘다.
형 : 아우야! 아우야!
아우 : (강렬한 불빛을 받고, 눈이 안 보여서 당황한다.) 누구예요?
형 : 나다, 나!
아우 : 형님?
형 : 그래! 내가 안 보여?
아우 : 왜 그런 불빛으로 나를 비추죠?
형 : 네가 뭘 하는지 잘 보려고…….
아우 : 나는 그 불빛 때문에 형님이 안 보여요!
형 : 그럼 내가 그 쪽으로 넘어갈까?
아우 : 아뇨! 넘어오지 말아요! 내 눈을 안 보이게 하고 넘어온다니 무슨 흉계죠?
형 : 난 아무 흉계도 없어. 넘어간다.
아우 : 넘어오면 쏩니다! (허공을 향해 위협적으로 총을 발사한다.) 이건 진짜 총이에요!
형, 요란한 총 소리에 놀라 전망대에서 황급히 내려온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모습이 되어 움츠리고 앉는다. 측량 기사, 가죽 가방을 든 두 명의 조수와 함께 등장한다.
측량 기사 : 저 쪽 동생이 미쳤군요. 형님에게 총질을 하다니!
조수들 : (웃으며) 완전히 미쳤어요.
형 : 무서워요…….
측량 기사 : 이젠 동생이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철저히 무장하고 자신을 지켜야지, 가만 있다간 죽게 됩니다. (조수들에게) 여봐, 이분에게 총을 드려.
조수들 : 네.
조수들, 가죽 가방을 열고 장총의 분해품을 꺼낸다. 그리고 재빠르게 조립해서 형의 손에 쥐어 준다.
조수1 : 손이 떨려서 총을 잡지 못하는데요
측량 기사 : 꼭 쥐어 드려. 그리고 방아쇠 당기는 법을 가르쳐 드리라고.
조수2 : (형에게) 잘 보세요. 총 쏘는 건 간단해요.
조수2, 형이 쥐고 있는 장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요란한 총 소리가 울려 퍼진다. 벽 너머의 아우,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리더니 허공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한다. 놀란 형 역시 반사적으로 총을 쏘아 댄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울린다.
조수들 : (박수를 치며) 아주 잘 하는데요!
측량 기사 : 양쪽 다 정말 잘 해!
조수1 : (하늘을 바라본다.) 그런데 멀쩡하던 날씨가 왜 이 모양이지?
조수2 :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잖아?
측량 기사 : (허공에 손을 내밀며) 이런,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조수들 : (측량 기사에게) 비를 피했다가 다시 오면 어떨까요?
측량 기사 : 그래, 그게 좋겠어. (호주머니에서 수첩과 만년필을 꺼낸다.) 빨리 청구서를 써야겠군. 전망대는 워낙 가격이 비싸서……. 여기에 총값을 추가하고.
조수들 : 총알값도 받아야죠.
측량 기사 : 물론이지, 총알도 공짜로는 줄 수 없고……. (수첩의 종이를 뜯어서 형에게 내민다.) 청구서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싸게 드린 거예요. 전망대는 땅의 반절로 계산하였고, 총값은 그 나머지 반절의 반절로 계산했어요.
형 : 뭐라구요?
측량 기사 : 당신 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수들 : 저 쪽 청구서는 저희가 전달하죠.
측량 기사 : (수첩에 청구할 내용을 적으며) 저 쪽에서 받아 낼 것도 굉장히 많군. (수첩의 종이를 뜯어서 조수들에게 준다.) 어서 갖다 줘! 금방 비가 쏟아지겠지!
조수들, 청구서를 받아 들고 퇴장한다.
측량 기사 : 당신, 비가 온다고 해서 집에 가면 안 돼요. 이 벽 앞에서 언제나 총을 들고 지켜야지,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적이 넘어옵니다. 자, 그럼 잘 지키고 있어요!
측량 기사, 퇴장한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서 비가 쏟아진다. 형과 아우, 비를 맞으며 벽을 지킨다. 긴장한 모습으로 경계하면서 벽 앞을 오고 간다. 그러다 차츰차츰 걸음이 느려지더니, 벽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선다.
형 :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걸까! 아름답던 들판은 거의 다 빼앗기고, 나 혼자 벽 앞에 있어.
아우 :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비를 맞으며 벽을 지키고 있다니…….
형 : 저 요란한 천둥 소리! 부모님께서 날 꾸짖는 거야!
아우 : 빗물이 눈물처럼 느껴져!
형과 아우, 탄식하면서 나누어진 들판을 바라본다.
형 : 아아, 이 들판의 풍경은 내 마음 속의 풍경이야. 옹졸한 내 마음이 벽을 만들었고, 의심 많은 내 마음이 전망대를 만들었어. 측량 기사는 내 마음 속을 훤히 알고 있었지. 내가 들고 있는 이 총마저도 그렇잖아? 동생에 대한 내 마음의 불안함을 알고, 그는 마치 나 자신의 분신처럼 내가 바라는 것만을 가져다 줬던 거야.
아우 : 난 이 들판을 나눠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어. 형님과 공동 소유가 아닌, 반절이나마 내 땅을 가지기를 바랐지. 그래서 측량 기사가 하자는 대로 했던 거야. 하지만, 나에게 남은 건 벽과 총뿐, 그는 나를 철저히 이용만 했어.
형 : 처음엔 실습이라고 했지. 그러나 실습이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은 동생을 죽이고 싶어! 벽 너머에서 총까지 쏘아 대는 동생이 미워서……. 하지만, 동생을 죽인다고 내 마음이 편해질까? 아냐, 더 괴로울 거야.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어!
아우 : 이젠 늦었어. 너무 늦은 거야! 벽이 생겼던 바로 그 때, 내가 형님께 잘못했다고 말해야 했어. 하지만, 이제 형님은 내 말이라면 믿지 않을 테고, 나 역시 형님 말을 믿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운다.) 이래서는 안 돼,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
형 : 들판에는 아직도 민들레꽃이 피어 있군! (총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발 밑의 민들레꽃을 바라본다.) 우리가 언제나 다정히 지내기로 맹세했던 이 꽃…….
아우 : 형님과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것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구나, 민들레꽃이 남아 있어! (총을 내던지고, 민들레꽃을 꺾어 든다.) 이 꽃을 보니까 그 시절이 그립다. 형님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시절이 그리워…….
형 : 벽 너머 저 쪽에도 민들레꽃은 피어 있겠지...... .
아우 : 형님이 보고 싶어!
형 : 동생 얼굴이 보고 싶구나!
형과 아우,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비가 그치면서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비친다.
형 : 하지만, 내 마음을 어떻게 저 벽 너머로 전하지?
아우 : 비가 그치고, 산들바람이 부는군.
형 : 저 벽을 자유롭게 넘어갈 수만 있다면……. 가만있어 봐. 민들레꽃은 씨를 맺으면 어떻게 되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잖아?
아우 : 햇빛이 비치니까 샛노란 민들레꽃이 더 예쁘게 보여.
형 : 이 꽃을 꺾어서 벽 너머로 던져 주어야지. 동생이 이 민들레꽃을 보면, 진짜 내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아우 : 형님에게 이 꽃을 드리겠어. 벽 너머의 형님이 이 꽃을 받으면, 동생인 나를 생각하겠지.
형과 아우, 민들레꽃을 여러 송이 꺾는다. 그리고 벽으로 다가가서 민들레꽃을 벽 너머로 서로 던져 준다. 형은 아우가 던져 준 꽃들을 주워 들고 반색하고, 아우는 형이 던진 꽃들을 주워 들고 기뻐한다. 서로 벽을 두드리며 외친다.
아우 : 형님, 내 말 들려요?
형 : 들린다, 들려! 너도 내 말 들리냐?
아우 : 들려요!
형 : 우리, 벽을 허물기로 하자!
아우 : 네, 그래요. 우리 함께 빨리 벽을 허물어요!
무대 조명, 서서히 꺼진다. 다만, 무대 뒤쪽의 들판 풍경을 그린 걸개 그림만이 환하게 밝다. 막이 내린다.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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