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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와 매스 미디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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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와 매스 미디어

 

미디어는 단순히 매스 미디어에 국한되지 않으며, 훨씬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고안한 도구나 기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신체 및 감각 기관의 기능을 확장하는 것은 모두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량은 다리의 확장이며, 문자는 시각의 확장이며,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며, 전자 회로는 중추 신경의 확장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발명이나 기술은 인체의 기능을 확장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미디어는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할 수 있.

 

많은 사람들은 의미라든가 메시지를 기계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그 기계를 사용하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어떤 미디어나 기술이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삶의 척도나 발전 양상이 달라진다. 기차는 철도를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또는 바퀴나 선로(線路)를 인간 사회에 도입해 온 것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와 일과 여가 생활을 낳게 하여 종래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 열대 지방이건 한대 지방이건 간에 마찬가지이며, 또한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물건이나 내용이 무엇인가와도 상관이 없다. 한편 비행기도 그 사용 목적과는 전혀 관계 없이 운송 속도를 빠르게 함으로써 철도형의 도시정치인간 관계를 해소하려 하고 있.

 

그러므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테크놀로지가 점차로 전혀 새로운 인간 환경을 창조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명쾌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

 

환경은 결코 수동적인 외피가 아니라 능동적인 과정이다. 현대는 전자 시대이며, 이 시대는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해 냈다. 전자 시대의 미디어는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즉 모든 미디어라는 형식 자체의 메시지에 의해 인간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핫(Hot) 미디어와 쿨(Cool) 미디어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를 구별하는 기본 원리는 미디어가 지니는 정세도(精細度)와 관련이 있다. 정세도란 미디어가 제공하는 자료, 혹은 정보의 자세한 정도를 말한다. 자료와 정보가 미디어 자체 내에서 이미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높은 정세도라 하며, 적은 양의 정보만을 제공하여 인간의 참여 가능성이 높은 상태를 낮은 정세도라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높은 정세도의 미디어를 핫 미디어, 반대로 정세도가 낮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가지며, 만화는 극히 적은 시각적 정보가 제시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낮은 정세도를 갖는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적고, 듣는 쪽에서 상당히 메워 가야 하므로 정세도가 낮은 쿨 미디어이다.

 

그러나 핫 미디어는 듣는 쪽에서 채우는 부분, 또는 보완하는 부분이 극히 조금밖에 없다. 따라서 핫 미디어에서는 듣는 쪽이 참가하는 정도가 낮고, 쿨 미디어는 참가, 또는 보완하는 정도가 높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거니와, 라디오와 같은 핫 미디어는 전화와 같은 쿨 미디어와는 다른 효과를 주게 된다.

 

그리스의 나르시스 신화는 인간 체험에 대한 하나의 사실에 직접 관계하고 있다. 이 말은 마비를 뜻하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나왔다. 청년 나르시스는 물 위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았다. 이 거울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성립된 자기 자신의 확장이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확장된 자기, 또는 반복된 이미지의 자동 제어 기구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확장된 영상(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밀착되어 그에 적응된 채 하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신화는 인간이 자기 이외의 것으로 확장된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매혹을 설명해 준다.

 

어떤 발명이나 기술이라도 모두 우리 육체의 확장 또는 자기 절단이다. 가령 자동차는 우리 몸의 걷는 기능이 확장 또는 절단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확장은 인간의 신체의 그 기능이 외부로 확장된 미디어 사이에 이전과는 다른 균형의 상태, 즉 새로운 비율 관계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감각의 비율 관계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의 확장과 촉진을 도모하는 모든 미디어는 어느 것이나 감각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인간을 사물로 바꾸어 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사진은 인간의 이미지를 마치 대량 생산의 상품처럼 확대하고 다량화한다. 누구나 혼자만으로는 사진에 관여할 수 없다. 독서와 집필이라면 혼자서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그와 같은 모습을 생각할 수 없다. 사진은 외부 세계를 그대로 재현(再現)함으로써, 정확하고 반복 가능한 시각적 이미지를 낳는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기술이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를 절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획일성반복성이라는 중요한 특성 때문이었다. 사진은 구텐베르크의 기술과 같은 정도로 기계적인 공업주의 시대와 전자적 인간이 활동하는 그래픽 시대를 절단하는 결정적인 기술인 것이다. 활자적 인간의 시대로부터 화상적(畵像的) 인간의 시대로의 변천은 사진의 발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사진은 전통적 예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화가는 이미 몇 번이나 사진에 찍힌 적이 있는 세계를 사진과 동일한 정도로 정확하게 그릴 수 없다. 그리하여 화가는 인상주의와 추상주의의 예술과 같이 창조의 내적 과정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소설가 역시 사진출판물영화라디오 등 때문에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을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 시인과 소설가는 통찰의 세계, 즉 자기와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는 정신의 내면적 움직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술가는 그의 예술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와 유사한 세계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가를 요청하기 위하여 다만 창조의 과정만을 제시하게 되었다.

 

서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를 제공하는 사적인 고백의 형태이다. 그러나 신문은 공공의 참가를 촉진하는 집단적 고백의 형태이다. 서적이 저자의 정신적 모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신문은 행동하고 상호 작용하는 사회의 뒷이야기를 파헤친다. 그러므로 신문의 주기능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것이다. 신문을 폭로 기사를 모은 사회의 쓰레기통이라고 개탄하는 사람들은 미디어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신문이 서적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백화점은 하나의 매장만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느닷없이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문은 그 시초부터 책의 형태를 목표로 삼아 온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적 형태 또는 사람들의 참가를 요청하는 형태를 목표로 삼아온 것이다. 모자이크적 형태에 의하여 신문은 사회 전체의 이미지, 또는 그것의 단면도가 된다. 신문이 모자이크적이고 독자의 참여를 강력히 요청하는 매체임을 명심한다면, 그것이 왜 민주주의적 정치에 불가결한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적 지향형의 인간은 광고가 없어지고, 따라서 광고주의 압력이 없어지면 신문이 좋아진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독자의 조사 결과 신문 독자들은 뉴스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광고에도 만족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 위문 협회는 주요한 미국 잡지의 광고를 뺀 것을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당연한 노릇이다. 잡지나 신문에 있어서 광고는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문과 잡지의 어떤 읽을 거리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의 노고와 배려와 재치가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고도 뉴스이다.

 

라디오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의에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를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일 대 일로 상대할 때와 같은 효과를 준다. 잠재 의식의 깊은 곳에 작용한다고 하는 이 미디어의 성격은 고대 부족의 북소리와 본질적으로 같다. 즉 라디오는 개인과 사회를 하나의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십대의 젊은이들은 라디오와 함께 사생활의 독립성을 보장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고립된 태도를 지니게 하는 라디오를 통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숙제를 하는 프라이버시와, 부모의 명령에 시달리지 않는 자유를 얻고 있다. 한때는 교회를 텅 비게 하였을 만큼 집단 청취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라디오가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 사적개인적 이용의 형태로 바뀐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1초 동안에 수백만 개의 점()을 시청자에게 보내는데, 이 가운데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고작 수십 개이며, 그것에 의하여 영상을 구성한다. 텔레비전 영상은 영화 화면에 비해 정세도가 낮고 정보량도 적다. 또한 텔레비전은 라디오에 비해 쿨(Cool)하며, 시청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는 참가 요청적 미디어이다. 우리는 라디오를 배경음이나 다른 소음을 중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지만, 텔레비전은 그처럼 단순히 배경 음악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우리를 참가시킨다. 우리는 텔레비전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텔레비전은 그것이 등장한 이후 우리의 개인적사회적정치적 생활의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감각과 정신 과정을 변화시켰다. 텔레비전은 촉감(觸感)의 확장이며, 모든 감각의 최대한의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 깊은 사색과 반성하는 생활은, 대상에의 순간적인 참가를 요구하고 약간의 지연도 허용하지 않는 텔레비전 영상의 모자이크 형태와 공존하기 힘들다.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에 의해 다른 감각들보다 촉각(觸覺)과 시각(視覺)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텔레비전이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각의 종합적인 발달을 추구하고, 반성적인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맥루한, 현대 사회와 매스 미디어/박정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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