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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송(諧謔頌) / 본문 일부 및 해설 / 최태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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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송(諧謔頌) / 최태호

 

 본문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 친구 집에 찾아가니, 주인이 차려온 술상에 안주라고는 채소뿐이었다. 주인이 미리 말막음으로 "집안이 구차해서 고기 한 점 안 놓여 미안하네." 하였다. 시쳇말로 green field였던 모양이다. 그 때 마침 마당에 닭 여러 마리가 나와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우스개 잘 하는 친구 말하기를, "대장부가 친구를 만나 어찌 천금을 아끼겠나? 내 당나귀 잡아 안주를 장만하게나." 하였다. 주인이 깜짝 놀라 "나귀를 잡아먹으면 자넨 무엇을 타고 돌아가겠나?" 그 친구 대답이 태연하였다. "닭을 타고 가지." 주인은 크게 웃고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 속의 한 토막이다. 대문장가로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 <사가정집(四佳亭集)> 등을 남긴 분의 글 속에서 왜 하필이면 이런 것이 나의 흥미를 돋우는 것일까?

 

 공자왈(孔子曰) 맹자왈(孟子曰)로 굳어버리고, 삼강 오륜(三綱五倫)만으로 굴레를 씌워 놓은 것 같은 옛날 선비들, 벼슬이 높다거나 문장으로 이름난 분이 남긴 글 속에는 보한(補閑)이니 잡기(雜記)니 야화(夜話)니 만필(漫筆)이니 해서 오히려 그 시대의 인정과 풍속을 남김 없이 나타내고, 글쓴 분의 인간미를 그대로 풍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청화(淸話)가 있는가 하면 기문(奇聞)이 있고, 연담(軟談)이 있고, 야록(野錄)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밑바닥에 흐르는 일관된 해학(諧謔)이다.

 

 옛날에 강릉 부사가 도임하는데, 한양 벼슬아치를 곯려 먹으려고 지방 사람들이 한 꾀를 냈다. 대관령 넘어가는 길목 산신당의 무당을 시켜 길잡이 치성을 들여 맞이하게 하였다. 무당이 말하기를 고갯길이 두 갈래 있는데, 포경(包莖)이거든 아랫길로 가야지 산신이 노하신다 하였다. 아랫길로 내려간 부사는 그 고장에서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였다.

 

 이런 등속의 이야기들을 민속 연구가들이 수록한 책이 <고금소총(古今笑叢)>이란 이름으로 해방 직후에 퍼졌다. 호사가(好事家) 모씨의 출판으로 <제어수록(制禦睡錄)>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순한문으로 원작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여 그 가운데의 연담(軟談)만을 골라서 번역하여 마치 시쳇말로 <와이당 전집>인 양 오해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사실이다. 더욱 불쾌한 것은 몇 편씩 골라서 에로틱하게 각색하여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도 있다. 경세 제민(經世濟民)과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를 줏대로 삼는 선비들의 여운(餘韻)을 모독하는 불손까지도 느끼는 것이다.

 한국 해학의 멋은 때로는 이솝 우화처럼 신랄하기도 하고, 모리엘의 연극처럼 시속적(時俗的)이기도 하며, 데카메론의 염정(艶情)과 선미(禪味) 풍기는 쇄탈( 脫)도 있다.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허허 웃는 김삿갓, 봉이 김 선달, 정수동, 황진이의 행동까지도 이것이 아닌가 한다. 양반을 조롱하는 서민의 감정 표현이라 하는 가면극의 사설도 해학(諧謔) 섞인 선비들의 글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일제(日帝)의 손에 잡혀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출옥하니, 그 제자들이 위문와서 얼마나 고생하셨느냐 하였다. 그 때 이상재 선생 말씀이 "그래, 자네들은 얼마나 호강을 했는가."는 반문이었다.

 

 말 속에 뼈가 있어 삼천리 강산이 온통 감옥인데, 너희들 무슨 말을 하느냐는 따끔한 질책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우스갯소리는 여유와 뼈대 없이 나올 수는 없다. 신음과 저주에는 독설이 있을 수 있으나, 해학(諧謔)에 미치지 못한다.

 옛날 노론(老論)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데, 남산골 소론(少論)의 샌님이 벼슬은 고사하고 끼니도 때우지 못했다. 그를 아끼는 선비가 보다 못해 충고하기를 노론(老論)에 들면 벼슬길에 나아가 지식과 덕행을 펼 수 있고, 우선 의식주로 선비의 체면을 세울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남산골 샌님 대답하기를, "좋은 말씀이오. 노론이 되겠소마는, 나야 이왕 늦었으니 자식에게나 시켜 노론 애비가 될까 하오." 하였다 한다. 그냥 웃어 넘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조태흘(趙太 )은 근엄한 성격에 백성을 괴롭히지 않아 이제까지 청백한 선비라 전해지고 있다. 강릉 부사로 있을 때, 하루는 부의 기생들이 좌석에서 서로 히히덕거리고 있기에 공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한 기생이 "제가 간밤 꿈에 영감을 모시고 잤습니다. 그래서 지금 해몽하는 중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공은 곧 붓을 들고 시 한 수를 썼는데, 마지막 귀가 이러했다.

 

 막언태수풍정박(莫言太守風情薄)
 선입가아길몽중(先入佳兒吉夢中)

 

  (태수가 풍정이 박하여 야속히 생각 마라. 먼저 미인의 좋은 꿈 속에 들어갔는데……)

 

 조태흘(趙太 )은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한다. 하루는 그 하인이 '조태흘, 조태흘.'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그게 무슨 짓이냐 하였다. 하인이 되묻기를 영감은 왜 관세음보살을 찾으십니까 하였다. 불도를 닦아 부처님 같은 사람 되기를 원한다는 부사의 대답에 하인의 대꾸가 걸작이다. "저야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외운들 부처님 될 수야 없으니, 영감님처럼만 되었으면 해서 성함 석자만 외웁니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최태호(崔台鎬)

 형식 : 수필

 성격 : 분석적. 해설적

 제재 : 한국 해학의 멋

 주제 : 해학은 한국의 중요한 생활 문화 유산으로서 소중한 것이다.

 출전 : <낚시와 인생>(1976)

 내용 연구

 해학송 : 익살스런 품위가 있는 농담을 높여 칭송함.

 시쳇말 : 그 시대의 풍습과 유행에 따라 널리 속되게 쓰이는 말.

 green field : 푸른 벌판, 즉 육류(肉類)나 어류(魚類) 따위의 고기 반찬이 없이 야채 반찬만이 있는 밥상의 일컬음

 삼강오륜 :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됨.

 보한(補閑) : 한가로움을 도움

 잡기(雜記) : 일정한 주제 없이 이것저것을 되는대로 적은 글

 야화(夜話) : 밤에 모여 앉아 하는 이야기

 만필(漫筆) : 일정한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부드러운 문체로 사물의 특징을 과장하여 즉흥적이고풍자적으로 가볍게 쓴 글

 청화(淸話) : 맑고 깨끗한 사실적 이야기

 기문(奇聞) : 기이한 소문

 연담(軟談) : 조용히 주고받는 말, 성적인 내용이 중심

 야록(野錄) :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적은 것

 길잡이 치성 : 운이 좋은 길을 잡기 위하여 산신이나 부처에게 드리는 정성

 호사가 : 일을 벌려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와이당 : 음담패설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비속어

 경세 제민 :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

 치국평천하 : 나라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평안하게 함

 염정 : 남녀 사이에 서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마음

 선미(禪味) : 세속을 떠나 담담한 맛

 쇄탈( 脫) : 속기를 벗어나 시원하다.

 노론 : 조선 시대 사색당파의 하나

 소론 : 조선 시대 사색당파의 하나. 서인 내부에서 정치적 입장의 분화는 이미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講和) 여부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나타나며,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정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때는 훈신·척신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에 대한 처리 방안 등에서의 이견과 지도자인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를 배경으로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 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정점으로 한 노론과 대립하였다. 특히 경종대에는 왕위 계승문제를 직접적 정치 쟁점으로 하여, 국왕의 동생 연잉군(延燥君:영조)을 후원한 노론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숙청하였다(辛壬獄事).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의 반격을 받아 '소론사대신(少論四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제거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남인과 연계하여 무력으로 봉기하다 진압되었다(李麟佐의 亂).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아래에서 일부 구성원이 정부에 참여하며,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계승되지만 권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지는 소론의 사상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거치면서 확립된 성리학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는 노론과 같으나, 병자호란 때 청에 대한 항복을 주관한 최명길(崔鳴吉)과 효종대의 대청관계를 담당한 이경석(李景奭)의 자세를 계승하여,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었다고 평가된다. 노론과의 대립 초기에는 훈신 및 척신과 제휴한 송시열 등의 정치 행태를 격렬히 비판하여 사림정치의 본령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샌님 : 얌전하거나 보수적이거나 완고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

 풍정(風情) : 멋스럽게 세상을 즐기는 마음

 필경 : 마침내는

 주종(主從) : 주인(主人)과 종자(從者). 주장이 되는 사물과 그에 딸린 사물.

 오두마니 : 오도카니

 대한문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의 정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 군주와 스승과 부모는 하나임

 조소와 야유 : 비웃음과 남을 빈정거리며 놀리는 언행

 이해와 감상

  1976년에 간행한 <낚시와 인생>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서 작자의 수필이 대부분 해학과 기지에 찬 것들인데, 이 작품은 특히 수필의 해학성을 직접 제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학이란 웃음을 자아내는 품위 있는 언어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수필 읽기의 즐거움을 유발하는 요소의 하나이다. 기지(機智)는 날카로운 판단이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그럴 듯함과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수필을 통하여 독자는 수필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해학과 기지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화 자료

 최태호(崔台鎬) (1915-1982)

 아동 문학가, 수필가. 경기도 안성 출생.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제 1차 교육과정에 의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할 아동극 '걸레와 동화', '이상한 안경'을 쓰면서 아동 문학작가로 활동 시작, 작품집으로는 동화집 '리터엉 할아버지(1955)'와 수필집 '애처론(愛妻論, 1961) 등이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 ∼ 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강중(剛中) ·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익진(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 牧使 ) 미성(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 ( 權近 )의 딸이다. 최항 ( 崔恒 )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 ( 趙須 ) · 유방선 ( 柳方善 )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 · 지리(地理) · 의약(醫藥) · 복서 ( 卜筮 ) · 성명 ( 性命 ) · 풍수 ( 風水 )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 · 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 ( 副校理 )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을 따라 명나라에 종 사관 (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 琅 )의 〈 적벽부 赤壁賦 〉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 · 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 ( 庭試 )에서 우등해 공조참의 · 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 오행총괄 五行摠括 ≫ 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 ( 謝恩使 )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 ·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 ( 拔英試 )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 ( 登俊試 )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 경국대전 ≫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 · 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 ( 文衡 )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 삼국사절요 ≫ 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 ( 都摠管 )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 동문선 ≫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 ( 館試 ) · 한성시 ( 漢城試 ) · 향시 ( 鄕試 )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 오자 吳子 ≫ 를 주석하고, ≪ 역대연표 歷代年表 ≫ 를 찬진하였다. 1481년 ≪ 신찬동국여지승람 ≫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 동국통감 ≫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 필원잡기 筆苑雜記 ≫ 를 저술, 사관( 史官 )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 논어 ≫ 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 사가집 四佳集 ≫ 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 동국통감 ≫ · ≪ 동국여지승람 ≫ · ≪ 동문선 ≫ · ≪ 경국대전 ≫ · ≪ 연주시격언해 聯珠詩格言解 ≫ 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 역대연표 ≫ · ≪ 동인시화 東人詩話 ≫ · ≪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 ≫ · ≪ 필원잡기 ≫ · ≪ 동인시문 東人詩文 ≫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 ( 官學 )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 동문선 ≫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 동문선 ≫ 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 삼국사절요 ≫ · ≪ 동국여지승람 ≫ · ≪ 동국통감 ≫ 에 실린 그의 서문과 ≪ 필원잡기 ≫ 에 실린 내용이다. ≪ 삼국사절요 ≫ 의 서문에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 동국여지승람 ≫ 의 서문에서는 우리 나라가 단군 ( 檀君 )이 조국(肇國 :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 · 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 동국여지승람 ≫ 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 방여승람 方輿勝覽 ≫ 이나 ≪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 ≫ 와 맞먹는 우리 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해 편찬된 사서 · 지리지 · 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참고문헌 ≫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雜錄, 大東奇聞, 朝鮮前期史學史硏究(韓永愚, 서울大學校出版部, 1981).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조선 전기에 서거정 ( 徐居正 )이 편찬한 설화집. 일반적으로 ‘ 골계전 ’ 이라고 한다. 앞 부분에는 편자의 자서와 양성지 ( 梁誠之 ) · 강희맹 ( 姜希孟 )의 서문이 있는데, 편찬의 동기 및 과정, 골계전적인 소화 ( 笑話 )의 효용성과 의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현존하는 원본은 없고 네 종류의 이본이 전하는데, 1959년 민속자료간행회에서 유인본으로 출간한 ≪ 고금소총 古今笑叢 ≫ 제2권에 수록된 146화(話), 일사본(一 侶 本) ≪ 골계전 ≫ (유인본 고금소총과 같은 내용임.), 정병욱가(鄭炳昱家) 소장본의 110화, 일본의 이마니시문고본(今西文庫本)의 187화가 있다.

 

≪ 골계전 ≫ 은 한문으로 편집된 해학적 이야기책이므로 일종의 문헌 설화로 간주되며, 소화로서의 민담의 성질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유인본 ≪ 고금소총 ≫ 에 수록된 ≪ 골계전 ≫ 제1권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탐관과 승려의 대화, 정삼봉(鄭三峰) · 이도은(李陶隱) · 권양촌(權陽村)이 벌인 평생의 자락처(自樂處)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 말재주가 좋은 승려와 말 잘하는 향인 최양희(崔揚喜)의 대화, 호주가 끼리의 음주 시합(부마와 태수) 등으로, 이상은 첫머리에 나오는 것을 순서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편차의 순서나 편집상의 분류 의식은 전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편집 방법은 모든 소화집의 공통점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 소화집에는 이야기의 제목도 없으며 짤막짤막한 이야기를 연편식(連篇式)으로 이어간다. 위의 예에서 볼 때, 꾸며낸 옛말이라기보다 실화에 가까운 것이 많다는 점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 골계전 ≫ 에서는 역사적 인물의 일화가 단연 우세해 수록 작품의 3분의 1이 유명 인물의 일화이고 그 나머지도 거의 유자(儒者)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풍성하니, 위의 예에서도 탐관 오리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 · 관료를 중심으로 향인, 서당 선생, 승려, 기생 등 각층의 인물이 고루 등장한다. 이 가운데 정수는 조영암(趙靈巖) 번역본의 ≪ 고금소총 ≫ 에 발췌된 13화다.

 

≪ 참고문헌 ≫ 韓國의 諧謔-文獻所載漢文笑話를 中心으로-(張德順, 東洋學 4,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197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 ( 徐居正 ) 등이 왕명을 받고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 56권 28책. 인본.

 

[간행경위]

1458년(세조 4)에 편찬 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에 ≪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전년에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감≫ 56권을 신편하였다.

원래 세조가 목표했던 의도는 김부식 ( 金富軾 )의 ≪삼국사기≫와 권근 ( 權近 )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1476년에 완성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거의 짜여진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해 간행한 것이다.

 

[삼국사절요]

이 책은 1474년에 영의정 신숙주 ( 申叔舟 )가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신숙주가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음으로써 노사신 ( 盧思愼 )이 주축이 되어 서거정· 이파 ( 李坡 )·김계창(金季昌)· 최숙정 ( 崔淑精 )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의 연결을 의식하고 편찬한 듯한 ≪삼국사절요≫는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수이전≫·≪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이용하려던 고기류(古記類)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수사관(修史官)이 완성한 것이지만 세조 자신이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보다 고대문화를 훨씬 포용하고 있다.

 

이는 처음으로 삼국의 세력이 대등하다는 입장이 표방되어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을 수정했다는 것과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음으로써 고대문화에 대한 비판을 완화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편제 및 내용]

≪신편동국통감≫은 서술 체재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였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 부족으로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며,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 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워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된다 하겠다.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의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즉위년칭원법으로 바꿔 당시의 사실과 맞게 고쳤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을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정신을 절충시켰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사론]

한편, 모두 382편의 사론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 서거정도 사론을 썼으며 다른 사신(史臣)도 이를 쓴 듯하다.

 

찬자 자신들이 쓴 사론의 성격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명교(名敎)를 존중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난신적자를 성토하고, 간유(奸諛)를 필주하고자 하는 것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취지의 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론이 전보다 한층 경직된 포폄(褒貶)이 가해지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교를 존중하는 사론으로 중국에 지성으로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은 철저히 비판되고 있다.

 

둘째, 강상의 윤리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다. 강상윤리를 잘 지킨 인간상으로 기자(箕子)· 김보당 ( 金甫當 )·조위총(趙位寵)· 박제상 ( 朴堤上 )·김흠운(金歆運)· 계백 ( 階伯 )·경순왕자(敬順王子)· 한유한 ( 韓惟漢 ) 등이 칭송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공리를 배격하고 인의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다. 불교·도교·민간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은 기왕에도 있었으나, 고려 태조의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별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팔관회 ( 八關會 ) 실시, 신라의 삼보 ( 三寶 )에 대한 물음, 〈훈요십조 訓要十條〉 등이 모두 비난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그리고 신라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단군조선·고구려·백제·발해·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다.

 

[사학사적 의의]

이 책은 세조에 의해 유교적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고 낭만적인 신화적 역사 서술을 받아들여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입장에서 그 편찬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지키려는 유신들의 비협조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삼국사절요≫는 신숙주 주도하에 유교적 명분론을 깔고 수정된 ≪동국통감≫의 일부로써, 아직도 세조 때 낭만적 분위기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1484년(성종 15)에 서거정의 주도하에 찬진된 ≪동국통감≫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찬자들이 모두 훈신이었던 성향으로 보나, 찬자 자신들이 사론을 써넣지 않은 점으로 보나,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있던 사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지금 전해지는 1485년에 개찬된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해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투영된 사서가 되었다. 따라서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해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세조 및 그를 보좌했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를 가지며,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세조와 훈신을 비판해온 재야 사림세력의 처지를 강화해주는 기능을 가진다고 하겠다. 동시에 훈신의 압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편찬은 형식상으로는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공동 합작으로 편찬되어 지금까지 모아지지 못했던 대립적인 요소가 합일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초기 역사 서술에서 완성의 의미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

 

≪참고문헌≫ 朝鮮前期史學硏究(韓永愚, 서울大學校出版部, 1981), 三國史節要에 대한 史學史的考察(鄭求福, 歷史敎育 18, 1975), 東國通鑑에 대한 史學史的考察(鄭求福, 韓國史硏究 21·22합집호, 1978), 朝鮮前期의 歷史意識(南智大, 韓國思想史大系 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문선(東文選)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 徐居正 )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 나라 역대 시문선집. 본문 130권, 목록 3권, 합 133권 45책. 활자본 · 목판본. 당시 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 盧思愼 ) · 강희맹 ( 姜希孟 ) · 양성지 ( 梁誠之 )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 동문선 ≫ 은 이 책 이외에 또 신용개 ( 申用漑 )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과 송상기 ( 宋相琦 )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세가지가 있는데, 서거정의 것을 정편 ≪ 동문선 ≫ , 신용개의 것을 ≪ 속동문선 ≫ , 송상기의 것은 신찬 ≪ 동문선 ≫ 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 ( 金仁問 ) · 설총 ( 薛聰 ) · 최치원 ( 崔致遠 )을 비롯,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인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였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 진동문선전 進東文選箋 〉 이 실려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해서 ‘ 사리(詞理)가 순정(醇正)하고 치교(治敎)에 도움되는 것 ’ 을 선택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시문이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극성해졌다고 보고,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글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내용을 보면, 권1 ∼ 3은 사(辭) · 부(賦), 권4 · 5는 오언고시, 권6 ∼ 8은 칠언고시, 권9 · 10은 오언율시, 권11은 오언배율, 권12 ∼ 17은 칠언율시, 권18은 칠언배율, 권19 ∼ 22는 오언절구 · 칠언절구 · 육언절구, 권23 ∼ 30은 조칙 ( 詔勅 ) · 교서 ( 敎書 ) · 제고 ( 制誥 ) · 책문(冊文) · 비답 ( 批答 ), 권31 ∼ 45는 표전(表箋) · 비답, 권46 ∼ 48은 계(啓) · 장(狀), 권49 ∼ 51은 노포 ( 露布 ) · 격서(檄書) · 잠(箴) · 명(銘) · 송(頌) · 찬(贊), 권52 ∼ 56은 주의(奏議) · 차자 ( 箚子 ) · 잡문, 권57 ∼ 63은 서독(書牘), 권64 ∼ 95는 기(記)와 서(序), 권96 ∼ 98은 설(說), 권99는 논(論), 권100 · 101은 전(傳), 권102 · 103은 발(跋), 권104는 치어 ( 致語 ), 권105는 변(辯) · 대(對) · 지(志) · 원(原), 권106은 첩(牒) · 의(議), 권107은 잡저, 권108은 책제(策題) · 상량문, 권109 ∼ 113은 제문 · 축문 · 소문(疏文), 권114는 도량문(道場文) · 재사(齋詞), 권115는 청사 ( 靑詞 ), 권116 ∼ 121은 애사 ( 哀詞 ) · 뇌( 柰 ) · 행장 · 비명(碑銘), 권122 ∼ 130은 묘지 ( 墓誌 ) 등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되도록 많은 문체를 망라하여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하였다. 문체의 종류로 보면 55종에 걸쳐 있어 중국 ≪ 문선 文選 ≫ 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 속동문선 ≫ 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는 단 1편의 작품만 있는 노포(露布)와 같은 것도 설정되어 있어 당시로서 자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다량을 선취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 김부식 ( 金富軾 ) · 이인로 ( 李仁老 ) · 이규보 ( 李奎報 ) · 이제현 ( 李齊賢 ) · 이곡 ( 李穀 ) · 이색 ( 李穡 ) · 이첨 ( 李詹 ) · 정도전 ( 鄭道傳 ) · 권근 ( 權近 ) 등 이 책의 편찬 직전까지의 인물들을 차례로 싣고 있다. 29인의 승려와 약간의 무명씨를 포함, 500인 가까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작품만 가지고 등장한 작가가 220여인에 이른다.

 

이는 당시 문헌의 인멸로 그들 작품의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우리 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인식 아래 한두편의 작품도 포괄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시는 약 4분의 1 정도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는 문(文)이다. 문 가운데에도 조칙 · 교서 · 제고 · 비답 · 주의 · 차자 · 첩 · 책제 등 정교(政敎) 관계 문장과 표전 · 축문 · 소 · 도량문 등 의례성(儀禮性)이 강한 문장에 해당되는 것이 1,130편 가량 된다.

 

특히, ‘ 표전 ’ 하나만 460여편으로 전체 작품수의 10 % 를 넘어서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표전의 내용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주로 임금에게 축하나 감사를 올리는 경우나 사양할 경우, 진상할 때에 올리는 의례성이 강한 글이다.

이를 통하여 ≪ 동문선 ≫ 의 선문(選文) 방향이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각적(館閣的) 문학관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국가의 관찬서(官撰書)이면서 도량문 · 재사 ·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儀禮文)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 철저하게 유교적이지는 않았다는 반영이 된다.

 

동시에 그 내용이 대부분 국가와 임금, 귀족의 복을 빌어주는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와 같은 통치층의 권위를 장식하는 효용에서 실려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 작품의 거개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화려한 문장이어서 전체적으로 형식미를 추구하고 있는 선정기준을 엿보게 한다.

 

작품의 선정에 있어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예로 최충헌 ( 崔忠獻 )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한 시문이 많이 실려 있고,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塔銘), 그리고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 ( 元曉 )의 일련의 불서의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혜심 ( 慧諶 ) · 일연 ( 一然 ) · 보우 ( 普愚 ) 등 쟁쟁한 선승(禪僧)들의 선시 ( 禪詩 )는 거의 한편도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작품 선정자의 미의식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동문선 ≫ 은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는 화려하고 호부(豪富) · 숭엄(崇嚴)한 미, 우아 · 온유의 미에 지배되어 있으며, 비장미(悲壯美)나 골계미(滑稽美)의 범주에 드는 것은 드물다. 거의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되어 유포되자 성현 ( 成俔 )은 “ 이것은 정선(精選)한 것이 아니고 유취(類聚)한 것이다. ” 라고 하였고, 이수광(李 邈 光)도 “ ≪ 동문선 ≫ 의 채선(採選)은 범위는 넓으나 주선자(主選者)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취사(取捨)되었다. ” 며 공평성이 부족함을 비평하였다.

 

후대의 이러한 비난은 정치적인 안정에 만족하는 관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 동문선 ≫ 의 전집적(全集的)인 성격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풍부한 양을 남겨 당시의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우리 나라의 문학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하였다는 의의와 함께 우리의 문학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후대에 주자학적 문학관에 의해 경직된 선집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신라 · 고려 시대의 기록과 도교 · 불교 관계자료의 중요성은 지대한 것이다. 1478년에 을해자로 펴낸 초간본이 있고, 1482년 갑인자로 찍은 재인본이 있다.

 

연대는 미상이나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측되는 을해자본 번각본(飜刻本)이 전하고 있으며, 1615년(광해군 7)에 임진왜란으로 거의 인멸되었으므로 서적교인도감(書籍校印都監)에서 재인하였다고 한다.

 

규장각도서에 있는 목판본은 어느 때의 간본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미 간행되었던 활자본을 대본으로 해서 판각(板刻)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도서 ·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5년 고서간행회에서 번인본을 간행하였으며, 1966년 경희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내었고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을 내었다.

 

≪ 참고문헌 ≫ 東文選解題(李佑成, 慶熙出版社, 1966), 국역동문선해제(金斗鍾, 민족문화추진회, 1968), 韓國의 名著-東文選-(李慶善, 玄岩社, 1969), 韓國의 古典百選(金奎聲, 東亞日報社, 1969), 東文選의 編纂動機와 史料價値(許興植, 震檀學報 56, 1983), 東文選의 選文方向과 그 意味(李東歡, 震檀學報 56, 198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가정집 : 조선 성종 때 사가정 서거정이 지은 시문집. 모두 63권 26책

 고금소총(古今笑叢)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설화집.

 

〔개 요〕

 민간에 전래하는 문헌소화(文獻笑話 : 우스운 이야기)를 집대성한 설화집으로, 대략 19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속에 수록된 소화집의 편찬자는 대개 알려져 있다. 1947년 송신용(宋申用)에 의하여 ‘ 조선고금소총(朝鮮古今笑叢) ’ 이라는 제목으로 제1회 배본에 ≪ 어수록 禦睡錄 ≫ 이, 제2회에 ≪ 촌담해이 村談解 蓬 ≫ · ≪ 어면순 禦眠楯 ≫ 이 한 권으로 묶여 정음사 ( 正音社 )에서 출판되었다.

 

1959년 민속자료간행회에서 ≪ 고금소총 ≫ 제1집이 유인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속에는 서거정 ( 徐居正 ) 편찬의 ≪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 ≫ , 홍만종 ( 洪萬宗 )의 ≪ 명엽지해 蓂葉志諧 ≫ , 송세림 ( 宋世琳 )의 ≪ 어면순 ≫ , 성여학 ( 成汝學 )의 ≪ 속어면순 ≫ , 강희맹 ( 姜希孟 )의 ≪ 촌담해이 ≫ , 부묵자(副墨子)의 ≪ 파수록 破睡錄 ≫ , 장한종(張寒宗)의 ≪ 어수신화 禦睡新話 ≫ , 그 밖에 편찬자 미상의 ≪ 기문 奇聞 ≫ · ≪ 성수패설 醒睡稗說 ≫ · ≪ 진담록 陳談錄 ≫ · ≪ 교수잡사 攪睡 聘 史 ≫ 등 모두 789편의 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1970년 조영암(趙靈巖)은 ‘ 고금소총 ’ 이라는 표제로 소화 379편을 번역하고 그 원문까지 인용하여 명문당(明文堂)에서 발간한 바 있다.

 

〔한문소화와 일반소화〕

소화(笑話)로서의 특징은 한문소화로서 일반적인 소화와 구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소화는 구전하여 전래하는 구비전승인데, 여기에 수록된 소화는 이미 몇 백 년 전에 문헌으로 정착되어 전하고 있고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수집, 편찬한 작자들이 대개 한학자이자 문장가요, 관료나 양반들이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분 · 성격 · 주제 · 구성 등이 일반 구비소화와 판이한 데가 있다.

 

오직 웃음을 유발시키는 이야기요, 단편형식을 취하는 점에서는 일반소화와 다를 바 없으나, 역시 문장화되어 전하기 때문에 작품으로서의 짜임새나 표현기교는 훨씬 세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한문소화는 학자나 양반 등의 특정인에 의하여 수집, 편찬되었기 때문에, 편찬자의 창의와 윤필(潤筆)이 가미되어 순수한 구비전승물로 볼 수 없으며, 좀더 과장하여 편찬자의 창작적 의도에 의하여 씌어진 것도 있다.

 

한편, 한문소화의 주인공은 바보나 꾀쟁이 · 재담꾼 등으로 국한되지 않고 위로는 왕후장상으로부터 학자 · 관료 · 양반 · 중인 · 무당 · 판수 · 승려 · 기생 · 노비에 이르기까지 빈부와 남녀노소가 다 웃음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한국인이면 현우(賢愚)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등장하므로 문헌소화는 일반 구전소화보다 더 개성적이요, 더 현실적이다.

또한, 한문소화에서는 남녀의 육담 ( 肉談 ), 이른바 외설담이 그 양이나 질에서 모두 우세하고 또 과감할 정도로 노골적임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반드시 동반하여 소화로서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문헌소화의 편찬의도는 비록 유희적인 이야기를 본령으로 하더라도, 반드시 권계(勸戒)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좀 지나친 외설담이라 할지라도 은연중 교훈의 냄새를 풍기며, 심지어 각 소화의 끝에 건전한 평까지 부연하여 도덕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소화의 분류 및 해학〕

소화는 과장 · 모방 · 치우(癡愚 : 못생기고 어리석음) · 사기 · 경쟁담 등으로 분류함이 일반적이다. ≪ 고금소총 ≫ 은 외설담에 비중을 많이 두고 편찬된 소화이기 때문에, 이것을 주로 하여 분류하면 먼저 외설적인 것과 비외설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비외설적인 것은 다시 단순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과 슬기와 재담이 곁들여진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를 치우담이라 한다면 후자는 지혜담이라 할 수 있다.

 

치우 · 지혜 · 외설담 중에서는 그 구성이 단편소설과 비슷하거나 조선시대의 고대소설과 같은 궤(軌)인 것들도 있다. 양으로도 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도 다양하기 때문에 고소설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된다.

 

수록된 소화에 나타난 해학을 정리하면 첫째, 아무리 익살스러운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해학의 연출이 불가능하여 듣는 자나 쏘는 자 없이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해학의 조성이 힘드므로 매개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승려와 여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좌라는 매개자가 필요하고, 관료와 기생의 관계에서도 방자 또는 그것을 엿보는 제3자가 있게 마련이다.

 

부부의 비밀스러운 작업만으로는 웃음이 유발되지 않지만, 철모르는 자식이나 또는 장성한 자식의 개입으로 비로소 웃음이 나오게 된다. 주인과 여종의 관계에는 본처의 개입이나 비부(婢夫) 또는 다른 노복(奴僕)이 참여하게 된다. 그래야만 주인은 바보나 병신으로 둔갑하여 해학적인 인간이 된다. 파계승이나 호색양반들도 마찬가지이다. 소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치우담도 거의가 이런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명사들의 일화도 반드시 방관자가 있어야 한다.

둘째, 외설담은 비윤리적이고 범법적(犯法的)인 과감한 행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다. 과거에 객사의 유부녀를 범하는 것이나 수절과부를 꾀어내는 행위가 그것이다. 여종이나 노복과의 행위도 윤리적 관념이 앞서면 불가능하다. 요컨대, 기존질서나 법적 구속에서 탈출하는 행위가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체면과 권위만을 내세우는 학자나 양반이, 또는 수도에만 전념해야 할 승려가 그 울타리에서 탈출하여 과감한 엽색행각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이것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데 우리는 그 범법을 책하기 전에 인간본연의 자세로 돌아간 그 인간성에 동정마저 느끼게 된다.

 

외설담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공의 이야기도 많다. 그것은 호사가나 이야기꾼이 지어낸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만용적인 탈출, 인습에 대한 반항, 제도의 타파에 쾌감을 느낀다. 이런 기발한 해학은 외국에도 있겠지만 그 한국적인 인간군상이 한국인의 공명과 공감을 사게 되는 것이다.

 

셋째, 웃음은 공동사회의 요구에 응하여 생긴다. 즉, 어떤 특수사회의 습속(習俗)이나 관념, 그리고 그들만이 가지는 언어 · 습관과 불가분의 상관성이 있다. 원리적으로 말한다면, 서민사회에 뛰어든 양반의 해학에는 서민은 무감각하나 성(性)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양반과 기생 · 여종과의 관계, 노복과 여주인과의 관계가 그렇다.

 

기생은 비록 천민이지만 그 활동무대가 양반사회라는 데서 공동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여종은 오직 성의 비밀스러운 대상으로 양반과 사귀고 있기 때문에, 공동사회의 참여자는 못된다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양반들의 재담에 기생은 상대가 되지만 여종은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넷째, 표현기교에서 한국적인 해학을 체험할 수 있다. 언어가 지니는 민족적 특징은 어느 민족에게나 있기 때문에, 이 언어구사의 묘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경우는 민족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지혜담의 경우는 이것이 더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그 밖의 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소화는 한글로 표현된 것과 한문표현의 두 갈래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도 한글표현으로는 웃음이 나와도 한문표현으로는 무미건조해지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반대로 한문표현에서는 웃음이 있으나, 한글표현에서는 웃음을 체험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 고금소총 ≫ 의 소화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노골적인 외설담에서 표의문자인 한문표현에서는 은근한 해학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옮겨 놓으면 표현하기도 힘들지만, 그대로 직역해버리면 독자는 웃음은커녕 오히려 혐오를 금하지 못하게 된다.

 

≪ 참고문헌 ≫ 古今笑叢(民俗資料刊行會, 1959), 韓國의 諧謔(張德順, 東洋學 4,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197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데카메론 (Decameron)

이탈리아의 작가 G.보카치오의 단편소설집으로 1349∼1351년의 작품으로, ‘10일간의 이야기’라고 번역된다. 서사(序詞)에서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말하고, 1348년의 페스트에 관한 기술로 작품 제1일의 서화(序話)가 시작된다. 난을 피하여 피렌체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온 숙녀 7명, 신사 3명이 10일간 체류하며 오후의 가장 더운 시간에 나무그늘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 한 가지씩, 하루에 열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지기 전에 좌상을 임명하여 다음날의 주제를 정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노래를 부르고 잠자리에 든다. 신을 경외하는 뜻으로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설화는 12일간에 100가지에 달하고 한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내용은 다채로우면서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다. 여성 중에서 가장 젊은 네이피레의 이야기는 제일 천진스럽고, 팜피로와 디오네오가 대담한 이야기를 하는 등,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과 리듬이 달라지고 등장인물도 여러 계층이다.

 

전작을 통하여 2개의 주제를 끌어낼 수가 있는데 사랑과 지혜가 그것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누를 수 없는 욕망이 때로는 냉정히 억제되고 또 여러 가지로 위장되어 표현되고 있다. 한편, 무뢰한의 용의주도한 교활함에서 기사(騎士)의 고상한 재지(才智)에 이르기까지 지혜의 모든 단계가 관찰되고 이들 주제는 때로는 교차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새로운 시대정신의 표현으로 보고 중세의 교회와 봉건제도를 조소하는 신흥 부르주아지 사회의 승리의 기록이라고 단정한 것은 데 상크티스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이 작품의 내용 ·구성에 관해서 중세적 요소를 강조하는 설도 나타났다. 어쨌든 이는 풍부한 생활 체험과 고전 및 남북 프랑스 문학에서 배양된 천재적인 이야기 작가의 인간관찰에 대한 일대 집성으로서, 수세기에 걸친 설화의 호색성(好色性)에 대한 독자의 그릇된 관심은 작자의 본의와는 관계가 없다.

 

단테의 《신곡(神曲)》과 견주어 이 작품을 《인곡(人曲)》이라고도 하지만, 단테는 높은 이상을 내걸고 중세에 대한 경고를 한 데 대하여, 보카치오는 풍속 교정자로서 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미소와 풍자까지도 섞어 묘사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 이 작품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보카치오적 문체라고 하는 것으로, 그후 오랫동안 산문의 본보기가 되었다. 《데카메론》의 모작(模作)은 대단히 많아서 많은 작가에게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이상재(李商在 )  

    1850(철종 1) ∼ 1927. 독립운동가 · 정치가 · 민권운동가 · 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계호(季 染 ),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 ( 朴定陽 )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 · 어윤중 ( 魚允中 ) · 홍영식 ( 洪英植 ) · 조준영(趙濬永) · 김옥균 ( 金玉均 )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 兪吉濬 ) · 윤치호 ( 尹致昊 ) · 안종수 ( 安宗洙 ) · 고영희 ( 高永喜 )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 ( 總辦 )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 ( 親軍營 )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 중학교 · 소학교 · 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 ( 徐載弼 ) ·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 ( 沈相薰 )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 ( 金貞植 ) · 유성준 ( 兪星濬 )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 ( 維新會 )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 구금 ·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 · 배재 · 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 · 출판 ·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 · 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 · 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 · 1운동의 무저항 · 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 · 물산장려운동 ·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 · 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 · 토론회 · 일요강좌 · 농촌운동 · 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 ( 申興雨 ) · 이대위(李大偉) · 김활란 ( 金活蘭 ) · 김필례 ( 金弼禮 )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 ( 新幹會 )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 해 사망하여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 ( 卞榮魯 )가 비문을 지었다.

 

유저로는 논문집 ≪ 청년이여 ≫ 를 비롯하여 ≪ 청년위국가지기초 靑年爲國家之基礎 ≫ · ≪ 진평화 眞平和 ≫ · ≪ 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 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 ≫ · ≪ 청년회문답 ≫ 과 ≪ 상정부서 上政府書 ≫ 제1 · 2, ≪ 독립문건설소 獨立門建設疏 ≫ 등 다수가 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月南李商在(李時琓, 中央書館, 1926), 月南李商在實記(金 孵 東, 月南李先生實記出版所, 1927), 月南李商在先生略傳(公報室 編, 公報室, 1956), 나라사랑 9-월남이상재 특집호-(외솔회, 1972), 月南李商在一代記(金乙漢, 正音社, 1976), 월남이상재(전택부, 韓國神學硏究所, 1977),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月南李商在의 性格硏究(金聖泰, 省谷論叢 4, 1973),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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