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와 단심가
by 송화은율하여가와 단심가
하여가와 단심가는 고려말을 배경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후, 권문 세족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으며,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며 당시 중국의 明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말 왕조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요동을 정벌하는 것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두고 고려 조정은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으나, 처음부터 요동 정벌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하고 우왕을 축출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민생의 안정이 전혀 도모되지 않을 때, “고려 왕조의 희생으로 개혁을 이루어서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 또한 희생을 무릅쓸만한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혁명을 계획하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에게는, 나름대로 민심이 쏠려 있던 정몽주(鄭夢周)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아무리 부모(고려 왕조)가 부모 역할을 못한다고 해서 자식(신하)이 부모를 내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성계를 가장 닮았다는 이방원은 이성계의 근심을 헤아려 정몽주를 타이르는데 정몽주는 항상 “忠臣은 不事二君이라(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맞아 회유의 시인 하여가를 읊는다. 여기서 만수산(萬壽山)은 개성 서쪽 두문봉 북방에 있는 산으로 고려 역대 왕릉이 많이 있어 고려의 북망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이에 정몽주는 그 유명한 단심가로 대답하고, 그 날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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