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탈춤의 성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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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의 성격

 

(1) 신명

탈춤은 탈판 자체가 액을 떼고 복을 빌기 위한 한바탕 놀이판이기 때문에 신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신명은 탈꾼만의 신명도 아닌 구경꾼만의 신명도 아닌 판에 있는 모든 이들의 집단적 신명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신명을 사회화해서 피워 내고 서민들은 묵은 응어리를 풀고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 는 것이다. 춤이나 노래가 신명()을 돋구기 위한 것이고 대사도 운율을 타는 운문적 성격을 갖는다. 또 탈꾼들이 얼쑤’, ‘좋다’, ‘잘한다하는 추임새를 넣어준다든가 탈꾼과 구경꾼과의 즉흥적인 질문, 대답은 모두의 신명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점차 고조되는 신명이 탈판의 마지막에 집단적으로 터져 나옴으로써 집단적 신명을 이루는 것이다.

 

(2) 집단성

탈판에서의 집단성은 서로가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지향하기 위한 것이다. 원형의 무대는 탈꾼과 구경꾼뿐만 아니라 구경꾼과 구경꾼까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며 공동의 관심사를 판에 끌어들여 함께 해결하고자 하고 구경꾼이 단지 구경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뒤풀이에서 어우러져 대동을 이루는 것은 탈춤이 공동체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3) 전형성

탈춤은 시대의 전형성을 갖는다. 각 등장 인물들은 그 사회성을 대변하고 있는데 등장 인물의 탈을 보더라도 거기에 담긴 사연들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탈이 만들어짐에 있어서 한 인물에 대한 인상은 그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대변하고 민중의 시대적 희망을 포함하면서 형성되어지기 때문이 다. 거기에 춤이나 노래가 등장 인물의 전형성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전통 탈춤에서 볼 수 있는 노장, 소무(혹은 작은 어미), 양반들, 말뚝이, 할멈 등이 그렇고 창작 탈춤에 등장하는 여공이나 여대생, 사장님, 국회의원, 쪽발이, 떨거지들, 경찰 등이 시대적 인물로서의 전형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4) 종합성

탈춤에는 어떤 공연 방식에도 볼 수 없는 종합성을 갖는다. 즉 노래, , 재담, 촌극, , 풍물 등의 모든 양식들이 탈춤에 담겨져 각각의 극적 효과를 가지면서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예술 양식이 총체적으로 어울리고 가락과 박을 타며 판 전체로 출렁거리는 탈판 특유의 총체적 예술 양식을 의미한다. 이를 일컬어 신명적 예술 양식이라 해도 좋은데 이 신명성은 새로운 민중예술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http://webmail.hansung.ac.kr/~tal/talchum/tal12.html

 

. 양반 과장과 민중 의식

 

탈춤의 춤꾼이나 구경꾼은 지배 계급이 아닌 피지배 계급이다. 따라서 거기에서 전개되는 내용도 피지배 계급의 사고나 삶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억눌림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 계층이었다. 불만이 있더라도 맞부딪칠 힘이 없었기에 그들은 곧바로 바깥에 드러내기를 꺼렸고, 탈은 바로 그러한 바깥에 드러내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 주는 도구였다. 이러한 보호장치(?) 덕택에 탈춤의 춤꾼들은 다른 어떤 문학 형태보다도 더욱더 날카롭게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퍼부을 수 있었다.

 

농촌 탈춤의 경우 양반의 실수를 들어 양반을 풍자하는 데 그치고, 양반과 맞서는 민중의 전형은 뚜렷한 성장의 자취를 보여 주지 않는데, 도시 탈춤에 두루 등장하는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이면서도 양반을 풍자하는 주체이며, 양반은 말뚝이와의 싸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에 이른다.

 

(1) 하회 별신굿 대사

: 첫째 학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을 다 읽었네.

: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데 있으며, 대관절 육경은 뭐냐?

초랭이 : 나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몰라요. 팔만대장경, 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국의 질경, 처녀 월경, 머슴 쇄경

: 그것 맞다 맞어.

: 이것들도 아는 육경을 소위 선비라는 자가 몰라.

 

(2) 봉산탈춤 대사

말뚝이:…… 개잘량이라는 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말뚝이:…… 마구간에 들어가 노새 원님을 끌어다가 등에 솔질을 솰솰하여 말뚝이님 내가 타고. (중략) 참나무 결결이 다 찾아다녀도 샌님 비뚝한 놈도 없습니다.

말뚝이:…… 삼털 같은 칼담배를 저 평양 동푸루 선창에 돼지 똥물에다 축축 축여 놨습니다.

말뚝이:…… 마나님 혼자 계시기로 벙거지 쓴 채 이 채찍 천 채 감발한 채 두 무릎을 꿇고 하고 하고 재독으로 했습니다. 마나님이 …… (중략) …… 작년 팔월에 샌님댁에서 등산갔다 남아온 좆대갱이 하나 줍디다. (교과서 생략)

말뚝이:…… (취바리 엉덩이를 양반 코 앞에 내밀게 하며) 그놈 잡아들였소.

 

에서 말뚝이는 양반들의 설명 방식인 ‘ -자에 -자 쓰는방식을 취하였으나, 실상 내용은 본래 양반이란 단어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양반이란 단어를 개가죽 방석과 개다리 소반에서 찾는다.

 

에서 노새 원님은 노새란 뜻뿐만 아니라 듣기에 따라서는 노 생원님으로 풀이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생원을 말뚝이 자신이 타고 다녔다고 했다. 또한 뒷부분에서는 샌님 비뚝한 놈이란 표현도 서슴지 않고 쓰고 있다. 여기에 와서 양반, 하인과의 신분 관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오히려 그 관계가 뒤집어져 나타나고 있다.

 

, , 에서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저항은 그 성격이 , 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며 비윤리적이다. 더 이상 말뚝이에게 양반은 상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기력하고 의식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 , 와 같은 표현은 유교 사회의 ()’을 금기시한 일종의 과잉 억압 상태로부터의 탈출과 반발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하회별신굿의 대사와 견주어 볼 때, 말뚝이의 대사는 농촌 탈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비판의 세기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하회별신굿의 경우 양반들의 자기 자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양반을 풍자하고 있다. 육경을 말하고 하인의 육경 설명이 맞다고 맞장구치는 양반의 모습에서 관중들은 양반의 무능과 그들의 신분적 허구성을 느끼게 되나, 봉산탈춤에서처럼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비판은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다.

 

말뚝이의 대사는 조선 왕조의 법률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마을 안의 사대부를 능욕하고, 혹은 도포를 입고, 혹은 생원이라 가리키고 상전에게 거역하는 것만 해도 먼 섬으로 귀양갈 죄이고, 더욱이 노비로서 가장을 때리거나, 노비로서 가장을 꾸짖는 자, 종이나 머슴으로 가장의 처나 딸을 간하는 자는 모두 목을 벤다고 했다. 하지만 말뚝이는 서슴없이 범법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며, 그런 내용을 담은 탈춤은 나날이 번창해 갔다. 심지어 해주 지방 감영에서는 탈춤 경연대회를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탈춤이 모두의 관심 속에서 크고, 양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가능했던 상황을 양반의 몰락과 상대적으로 키운 민중의 힘과 의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탈춤의 경우, 처음 생길 때부터 민중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해 왔고, 봉산탈춤과 같은 도시 탈춤이 양반의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상인, 이속 세력의 지원이 뒷받침되었다는 점도 탈춤으로 하여금 양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http://www.norimadang.or.kr/book/bongsan_teach.html

 

. 마당극의 공연학적 특성 - 몸 중심의 공연 텍스트 -

 

서양 연극 이론에서 대사 중심의 텍스트를 연극 작품의 유일한 의미체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텍스트에 이미 훌륭한 연출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연극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이성 중심주의 연극의 지배적인 전제였다. 연극적 작업을 텍스트에 종속시키는 연극에 대해 경고한 아르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구 연극에서는 드라마의 본질을 텍스트에서 찾고자 했다. 아르또의 경고는 텍스트 중심의 서구 연극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었으며, 이성 중심 연극에 대한 이러한 도전이 동양 연극들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당극의 중심은 연극을 위해서 생산된 희곡 텍스트가 아니라, 연극의 공연 과정에서 생성되는 공연 텍스트이다. 그것은 텍스트로부터의 허구화 과정에서 마당극 공연의 본질적 의미를 찾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반서구적 연극, 반이성주의적 연극이다. 이런 점에서 마당극은 우선 언어 텍스트로부터 출발하는 전통적 서구 연극과 다르며, 오히려 문자 언어로 창작되고 기록된 희곡으로부터 출발한 연극만이 진정한 연극이라는 서구적 입장과 기록된 문학이나 읽히는 희곡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속성은 탈춤이나 판소리 등의 우리 전통 연희가 오랜 세월 구비 전승되다가, 그 전승력이 약화되어 의식적으로 전승을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활발하게 문자 텍스트로 기록되고 출판된 무당굿판소리탈춤꼭두각시놀음 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마당극의 경우도 어떤 개인이 주동이 되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는 대체로 공동 창작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며, 이런 창작과정과 공연과정이 먼저 선행되고 이 공연 과정이 어느 정도 끝난 다음에야 문자텍스트로 정리되고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대본들조차도 고정 불변한 판본이 아니라 공연장소상황관중의 개입 등에 따라 수시로 변화될 수 있는 가변적인 텍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연학의 힘을 빌려 텍스트의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공연학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구비적이거나 기록되었거나 몸짓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그 근본적인 공통 특징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뿐이다. 따라서 공연학적 의미에서의 텍스트는 언어적 구조를 가진 책희곡대본들뿐만 아니라, 의식(儀式)과 제의(祭儀) 등을 포함하는 데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동양의 전통 연극들은 동작학적관습들이 반복이 가능한 어떤 공통된 의미를 형성한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당극도, 인도의 무드라(mudras)’처럼 복잡한 신체적 문법에 의거하지는 않지만, 어떤 정형화된 동작언어가 공연 텍스트의 의미 형성에 있어서 구어적 대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당극은 탈놀이와 같은 전통적 양식에 근원을 두었기 때문에, /글의 연극보다도 몸/동작의 연극이기를 지향한다. 그것은 마당극이 추구하는 신명의 근원을 문자가 아니라 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당극이 언어 텍스트 자체를 불신하는 것은 아니며, 다층적인 텍스트들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공연이기를 지향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월덕, “마당극의 공연학적 특성과 문화적 의미”, 한국극예술연구 11

 

. 가면극의 주제와 사회 의식

 

양반은 모든 가면극에서 반드시 등장하는데, 양반에 대한 풍자의 방식이 다양하다. 우선, 양반의 가면이 이지러져 있거나 병신으로 되어 있어 부정적 인물임을 나타낸다. 특히, 야유와 오광대에서는 여러 가지 병신 모습의 양반들이 다수 등장하여 자기들끼리 지체를 다투면서 서로의 약점을 폭로한다. 그리고 영노라는 괴물()이 나와 양반을 잡아먹겠다고 덤비는데, 이 과정에서 양반은 더럽고 추악한 대상으로 비유되면서 권위와 체통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여러 가면극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효과적인 양반 풍자의 방식은 말뚝이라는 민중적 항거의 전형적 인물에 의하여 진행된다. 양반이 하는 일이라고는 심심풀이로 시를 짓거나, 지체를 자랑하거나, 하인인 말뚝이를 불러 꾸짖는 것밖에 없다. 양반은 위엄 있게 꾸짖고 철저히 억압한다. 말뚝이는 양반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실질적으로 양반들을 우스꽝스러운 바보로 비하시킨다. 말뚝이는 양반의 어법을 흉내내며 뜻을 뒤집는 희인(戱引: parody)을 자주 사용하기에 풍자는 더욱 효과적이다. 양반 과장은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비판하고, 말뚝이로 집약되는 민중의 활력을 개방하기 위해서 민중을 억압하는 봉건적 특권은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경욱, ‘민속극

 

. 봉산 탈춤의 전승 과정

 

봉산 탈춤은 황해도 지방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해서(海西) 탈춤 중에서 대표적인 탈춤으로 전승되어 왔다. 해서 탈춤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거나 대본을 채록(採錄)할 수 있는 것은 봉산 탈춤 이외에도 강령 탈춤(康翎 탈춤 : 중요 문화재 제 34)과 해주(海州) 탈춤이 더 있다.

 

봉산 탈춤은 원래 황해도 봉산 구읍(지금의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연희되었던 것이나, 1915년 행정기관의 이전과 함께 사리원으로 자리를 옮겨서 놀아지게 되었다.

 

이 탈춤이 황해도의 대표적 탈춤이 된 것은 18세기경이라고 하며, 당시의 주동적인 중흥자로서는 안초목(安草木, 또는 첫목[初目])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그는 전남의 어느 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으며, 또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吏屬)들이 단체를 만들어(봉산탈춤에는 어느 탈춤보다도 한시(漢詩) 구절의 인용과 반어(反語)등이 많은데 이것은 지방의 이속들이 세습적으로 전해 왔음을 암시한다.) 상인들의 후원 아래 전승되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놀이는 세시 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 이래의 일이며,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고려 시대의 연등(燃燈) 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또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 같은 관아의 경사나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 한다. 1930년대 말까지도 연희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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