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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 줄거리 및 해설 / 황석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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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 황석영

 

 요점 정리

 

 지은이 : 황석영

 갈래 : 단편 소설, 전쟁소설

 성격 : 사실적, 비판적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구성 : 5단 구성

 배경 : 치열한 공방전이 한창이던 베트남, R포인트로 명명된 버려진 보급대대 앞 불탑 부근, 1960년대 월남전

 문체 : 사실적

 제재 : 전쟁의 공포와 인간성 파괴

 주제 :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 무의미하고 더러운 전쟁의 추악한 본질, 전쟁의 공포와 전장에서의 인간성 파괴.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의 부조리와 무의미함

 출전 : 황석영, 『객지』, 창작과 비평사, 1992,  p.326-357  

 줄거리 : 나는 보충병으로 차출되어 본대로부터 작전 지역인 R.POINT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나이 어린 하사관 지휘 아래 아홉 명의 병사가 맡은 일이란 게 오래된 탑을 지니는 것이라는 무모한 임무를 듣게 된다.

 

월남인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징적인 물건인 탑을 적이 옮겨가지 못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병력 보충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 임무를 지속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적은 탑과 생포한 한 명의 게릴라 인질 때문에 함부로 포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밤만 되면 대통과 목탁 두드리는 소리, 호각소리, 고함 소리 등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근처 B교량 쪽에서 미군들이 경기관총을 볶아 대기 시작하고 건십은 중기관포로 대지공격을 하였으나 폭음과 흰 연기와 함께 교량은 파괴되었따. 교량의 파괴는 우리의 철수가 지연된다는 의미였다. 굵은 빗줄기가 철모를 때리면서 샌드백 방벽 너머 부대의 폐허 쪽으로부터 적이 한명 나타난다. 소총수는 무장을 끌러놓고 그를 생포하기 위해 나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를 인질로 삼기 위해 유인한 것이었다.

 

다음 날 교각을 지키던 양키는 철수하에 R에는 우리만 남게 되고 중대장으로부터의 철수 명령은 내려지질 않았다. 마을 수색 중 어젯밤 포격으로 부상당한 적을 한 명 처치한 대신 적의 저격으로 문상병이 죽었다.

 

그날 저녁 작전이 변경되어 오늘밤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고 우리는 초소 주위의 배수로를 최후 저항선으로 삼아 적의 기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쯤 적의 사격으로 시작된 격렬한 전투 속에서 적의 인질이 된 소총수와 통신병과 나이 어린 분대장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부대원은 탈진하여 굳어진 시체 사이에 넘어져 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시체와 장비를 싣고 R을 나는 우리 뒤로 미군은 캠프와 토치카를 지을 요량으로 불도저 한 대 바나나 밭을 밀어버리며 탑마저 무너뜨렸다.

 

 

 이해와 감상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 소설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탑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한국군이 철수하자 미군은 즉시 그 탑을 곧 부수어 버리고 만다. 전쟁의 목적과 명분이 뚜렷하지도 못한 채 무의미한 죽음만을 낳는 베트남전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과 긴장감 있는 상황 묘사가 뛰어나다. 

 

 이 작품은 작가의 월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 소설로, 전쟁의 공포와 소외된 인간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고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제 3세계(베트남) 문제를 다룬 소설로서 우리 소설의 지평을 세계사 차원으로 넓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화 자료

 황석영(1943 - )

   만주 신경 출생. 동국대 철학과 졸업. 1962년 《사상계》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으로 입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이 당선되어 등단.

 

   황석영은 70년대 <객지>와 <삼포 가는 길>, 80년대의 <무기의그늘> <장길산>을 남긴 문제의 작가다. <객지>가 보여주는 문학적 중요성은 그것이 부랑 노동자가 지니는 사회적 관계의 핵심을 포착했다는 점에 있다. <삼포 가는 길> 역시 <객지>가 제기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서 삼포라는 고유 명사는 이내 산업화에 의해 해체되고 있던 고향이라는 보통 명사로 확장되며, 다시 70년대 한국사회 일반으로 읽혀질 수 있다. 장편 <무기의 그늘>은 월남전을 통해 분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룬 역작이며,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은 십년 여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조선시대 민중들의 힘없는 삶과 그 안에 미륵신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던 유토피아적 의식을 치밀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기타 주요 작품으로는 <한씨연대기>, ,<섬섬옥수> 등이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74년), 민중문화운동연합(84년), 민족문학작가회의(87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88년)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1989년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 1993년 4월 귀국, 방북 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면.

 

  황석영이 북한에 갔다 와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자,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학적 천재가 썩는 것을 아까워했다. 상당수 문인들은 `살아 있는 국보를 내놓으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했으며, `그를 가둬두는 일은 생동하는 모국어를 가두는 일`이라고도 했다.

 

  70~80년대 황석영이 이뤘던 문학적 성과는 빛나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소설과 희곡이 동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단했던 황석영은 1974년 첫 창작집 『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은 지금도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품들로 인정 받는다.

 

  같은 해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았던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의적 두목을 주인공 삼아 70~80년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작지만 시원스런 문학적 숨통을 틔워주었다.

 

  <객지>와 <장길산>에서 보여준, 서민 대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의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유신 시절 공장 견습공으로, 노가다꾼으로, 문화운동가로, 6·25 이후 최초의 농민운동가로 뛰어다니며 민중의 삶을 배우던 그는, 1980년 5월을 광주에서 겪고, 80년대 내내 진보적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급기야 1989년에는 통일운동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수 차례 면담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발표하여 그 편집자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역시 독일과 미국을 유랑하다 1993년 귀국과 함께 체포·수감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침없이 실천하며 살아온 황석영의 `싹수`는 명문고교를 중퇴하고 머리를 깎겠다고 산사를 찾아 들어갔을 때부터 분명했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에 뛰어든 것도 그렇고, 그 베트남 전장에서 방금 터진 포탄 구덩이 속으로 몸을 처박으면서 `이번에 살아남기만 한다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것도 황석영 다운 일이었다.

 

  황석영은 입심과 노래솜씨, 친화력으로도 `국보급`이라 한다. 교도소에서 그의 별칭이 교도소 `소장`보다도 높은 `총장`이었던 것도, 특유의 친화력과 입심으로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이 청산유수라 창작의 고통도 별로 겪지 않는 타고난 필력이 아닐까 상상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비록 `외다리 타법`으로나마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파지를 양산할 일도 없어졌지만, 한 장의 원고지를 채우기 위해 100장의 파지를 양산하는 각고의 시간과 결벽에 가까운 완벽성의 추구는 황석영의 또 다른 면모다.

 

  이제 황석영은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객지>와 같은 `메마르고 딱딱한 리얼리즘`으론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동아시아적 형식에 현실주의적 내용을 담고, 마르케스와 아스투리아스 등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참조항 삼아 새로운 문학적 변신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관심을 끌어,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 소설선집>(1988)이 각각 번역·간행되었다. (출처 : 알라딘 홈페이지 작가파일) 

 

 베트남 가까이서 보기

 

 1. 18세기 이전 베트남역사(Lich su Viet Nam)

 

   <고대국가 발생기>(BC 690∼BC 111)

   BC 690년 경 부족국가인 반랑국, 어우락국(BC 257), 남비엣국(BC 207) 등이 차례로 건국되었다가, BC 111년에 한 무제에 의해 정복당한 이래 약 천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설에는 비엣(Viet)족이 중국 전국시대 월국의 유민이라고 주장하나, 베트남인들은 BC 3000년 경 동산 문화를 이루었던 락비엣(Lac Viet)족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복속시대>(BC 111∼AD 972)

   유에족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중국 한족은 락비엣족의 영토를 침범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BC 207년에는 한(漢)제국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이 된다. 그러다가 BC 111년 완전히 중국에 병합되고 그 후 938년까지 거의 1천년 동안 베트남은 중국 지배권에 놓인다.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지배 시절 민족 의식을 싹 틔우기 시작했으며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전파 받게 되었다.

 

  베트남인들은 중국화 정책과 중앙 집권적 정치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봉기와 반란을 일으켰다. 40∼43년에 있었던 쭝(Trung)자매의 항쟁은 유명하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3년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냈다는 데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리남데(Ly Nam De)장군의 활약으로 544∼602년간 자치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베트남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938년 응오퀴엔(Ngo Quyen)장군의 박당(Bach Dang)강 전투 승리로 천년 중국 지배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972년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도 현재 베트남의 중부, 남부지방에는 침략의 손길을 뻗치지 못했다. 그래서 베트남 중남부 지방은 인도문화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힌두교 참(Cham)족의 참파왕국이 출현했다. 이 참족은 7세기경 크메르로부터 침략을 받아 계속 남진하다가 결국 15세기 북부 레(Le)왕조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다.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 리(Ly)왕조>(972∼1225)

   응오퀴엔 장군이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왕조인 응오(Ngo)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응오를 뒤이은 딘(Dinh)왕조는 주권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을 자처하게 된다. 이후 레(Le)왕조의 집권이 있게 되고 1010년에 리(Ly: 李)왕조가 출현한다. 리타이또(Ly Thai To)가 세운 리왕조는 국호를 다이비엣(Dai Viet: 大越)으로 정하고 북으로는 송나라, 남으로는 크메르, 참족과 맞서 싸우며 독립을 유지시켜 나갔다. 자주통치를 확고히 한 200여간 행정, 조세 체제가 정비되고 농업이 육성되는 등 문인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 하노이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 반미에우(Van Mieu)가 생겨 유교교육제도로 관리를 뽑게 되었다.

 

 <베트남 역사의 황금시대: 레(Le)왕조>(1427∼1764)

   리왕조 내정 혼란으로 인해 쩐(Tran)왕조가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되었다. 쩐왕조는 남부 참파왕국과 연합 당시 천하를 휩쓸던 원(元)나라 징지스칸의 침략을 막아냈다. 중국의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1368년) 통일을 이룬 뒤 베트남을 침략해 20년간 직접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레러이(Le Loi)와 응우엔짜이(Nguyen Trai)가 나타나 명과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명군을 물리치고 베트남에 새로운 레(Le)왕조를 세웠다. 레왕조는 중국의 명나라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중부 참파왕국을 무찔러 영토를 확장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하며 발굴하는 황금기였다.

 

 <떠이선(Tay Son)의 반란>(1765∼1801)

   그러나 17세기부터 레왕조는 퇴락하기 시작하여 북부에는 찐(Tring)家, 남부에는 응우엔(Nuyen)家가 새 군주로 세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이에 무력한 레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찐, 응우엔가문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세력을 등에 업게 된다. 남부 응우엔家는 프랑스와 북부 찐가는 덴마크와 손을 잡고 신부들을 통해 서방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다. 이 혼란한 가운데 베트남 중부 떠이선(Tay Son)家 출신의 응우엔락, 응우엔후에, 응우엔후 등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를 떠이선의 반란이라 말하며 억압받고 굶주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대거 합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남부지방을 계속 공격해 사이공에 근거를 둔 응우엔 군주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 후 응우엔후에(Nguyen Hue)는 북부지방 찐家을 쳐 제압하고 자신을 광쭝(Quang Trung)황제라 불렀다.

 

 <응우엔(Nguyen)왕조 시대>(1802∼1945)

   떠이선의 반란으로 남부 응우엔家가 몰살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응우엔안(Nguyen Anh)왕자는 프랑스 상인의 도움으로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 남부와 중부에서 떠이선군을 물리치고 다음해는 북부지역까지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수도를 훼(Hue)로 옮기고 유교를 숭상하고 프랑스 상인들에게 상업 이권을 양도하게 되었다. 아들 민망(Minh Mang)황제는 더욱더 유교를 숭상하여 베트남은 중국사상과 전통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국인에게 양도한 이권을 도로 빼앗고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탄압은 티에우찌(Thieu Tri)황제 때 극에 달해 많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고 추방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874년 군대를 파견, 다낭을 점령하고 이후 사이공, 메콩델타를 차례로 집어 삼키게 되었다.

 

 

 

 2.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

 

본명은 Nguyen Tht Thanh. Nguyen Ai Quoc이라고도 함.

 

1890. 5. 19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호앙트루~1969. 9. 2 하노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설자(1930), 베트민(Viet Minh:베트남 독립동맹)의 동맹원(1941), 베트남(북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대통령(1945~69).

 

거의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였던 호치민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인물로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초기생애

호치민은 지방의 가난한 학자인 구엔 신 후이의 아들로 태어나 킴리엔이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14~18세에 휴에 있는 문법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뒤에 판티에트에서 교사로 지냈고 이어 사이공에 있는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외국 여행과 공산주의 신조의 성숙

1911년 그는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 자리를 얻어 3년 이상을 선원으로 지내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 1915~17년 런던에서 생활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 중반에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로 일했다. 1917~ 23년 프랑스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그는 구엔 아이 쿠웍('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폈다.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모인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정권이 인도차이나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평화회의 중재자들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정치의식이 있는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1920년 12월에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담했다. 그후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 〈파리아 Le Paria〉('추방자')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의 해악을 고발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그곳에서 수년 간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 그는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감동적인 고별사를 실었다. 그뒤 그해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회에 제출한 그의 성명서 본문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압박받는 농민들(산업 노동자들과 대치되는 계층)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이 최초로 공식 표명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의 요새인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의 첫 간부 요원들을 모집하여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탄 니엔(Thanh Nie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협회의 회원들 거의 모두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로서 조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저우가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첫 본거지가 되었다. 중국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했다가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시암(지금의 태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2년 동안 지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 있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 시에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30년 2월 3일 호치민은 시암에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1930년 10월 이후 호치민은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여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이라는 이름을 수용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았고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볼 때 호치민은 주도적인 역할보다는 오히려 혁명활동의 조직을 생각하면서 여러 파당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그의 신중함,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별력, 모스크바를 멀리하지 않으려는 배려, 그리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이미 이룩한 그의 영향력 등을 엿볼 수 있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다. 호치민 자신도 부재중에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는 홍콩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호치민은 PCI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책인 인민전선(Popular Front: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이 전략에 맞추어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eon Blum)의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국가의 탄생

1938년에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2개월 정도 같이 지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했을 때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꾸몄다. 이무렵부터 그는 호치민('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인조·5인조 동지들이 1941년 1월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가 5월에 베트민이라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으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이 새 기구는 중국에서 장제스 정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믿지 않았고 그를 체포해버렸다. 따라서 호치민은 중국에서 18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비망록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시 모음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얻어냈다.

 

1945년에 베트남 혁명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연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점령한 뒤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둘째, 6개월 후에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은 이로 인해 철저히 패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베트남 독립동맹과 호치민의 가장 강력한 두 적이 무너진 것이다. 호치민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개월이 못 되어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미국의 첩보기관)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적과 싸웠다. 그와 동시에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가 호치민의 지휘를 받으며 1945년 봄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인 8월 19일에 그들은 하노이에 들어갔다. 마침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묘하게도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키는 말을 사용하여 베트남이 독립되었음을 공표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자유·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의 협정조항에 따르면 중국의 장제스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당시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해방된 프랑스가 독립 베트남이라는 기정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 든 점이다. 10월 6일 자크 르클레르 장군이 사이공에 내린 뒤 2~3일이 지나자 중무장한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3개월도 안 되어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워야 할지 협상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했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로 하여금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말에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3월이 되어서야 교착상태가 풀렸다.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이런 조처가 취해지고 나서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호치민은 3월 6일에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12일 후 르클레르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호치민은 일련의 회의(1946. 6~9)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1946. 11. 20~23)로 깨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000명에 가까운 베트남인이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병든 몸에 환멸을 느낀 호치민으로서도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후 북베트남의 한쪽 구석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해보려고 했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프랑스군은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前) 안남인(베트남인) 황제 바오 다이를 다시 제자리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조건은 2년 전 호치민에게 제안했던 것보다는 유리했다. 이때 프랑스가 이런 조건을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베트민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가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 다이의 군대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1953년말 대부분의 베트남 지방이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게 되자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

 

제네바 협정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 즉 호치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과 바오 다이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그 협정의 내용은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상에서 호치민이 행사한 역할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대신하여 충실한 친구인 팜 반 동이 대표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국토의 분할이라는 조건과 자기들이 전쟁중에 정복했던 것보다 작은 영토를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 독립동맹이 보여준 온건함은 일찍이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세운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융통성 있는 이런 태도는 실상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베트남 독립동맹이 모든 면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장할 수 있었던 선거가 미국과, 그당시 실제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남베트남에 의해 무기한 연기되자 하노이 쪽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자원이 빈약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영토가 더 넓은 동맹국들인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의 통치는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55 ~56년 농업개혁은 무지에서 나온 만행·탄압과 함께 시행되었다.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졌듯이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45~46년에 행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전의 혁명활동들을 돋보이게 했던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했다. 이 늙은 정치가는 외교분야에서는 그래도 나은 행운을 누렸다. 그는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1955), 뉴델리와 자카르타(1958)를 오갔다. 심지어 1960년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는 동맹국 사이에 중재자 역할까지 했다. 호치민은 경력으로나 선호도로나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한편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노련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양의 원조를 받았다.

 

1959년경부터 북베트남은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 베트콩으로 알려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9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이 통일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라오동(노동자의 당)의 입장표명이 있었으며, 그후 호치민은 정계의 제1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계속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의 표어가 된,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1967년 2월 1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는 긴 협상의 초반에 죽었고 그럼으로써 신속한 타협의 기회는 분명 감소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통킹만 사건'  -灣事件  Gulf of Tonkin Resolution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발생한 미국과 북베트남의 군사충돌.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공군이 북베트남의 연안기지를 폭격하고 미국 L.존슨대통령은 전쟁 수행 권한을 의회에 요구, 의회는 압도적 다수로 이것을 승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국내적으로는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는 대의명분을 얻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지상군을 대량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미국 국방부는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와 터너 조이호가 각각 64년 8월 2일과 4일에 통킹만 공해상에서 초계(哨戒) 중 각각 북베트남의 어뢰정 3척으로부터 공격받았다고 발표하였다. 북베트남 외무부는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영해 내에서 북베트남 초계정을 포격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나중에 폭로된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비밀보고(펜타곤페이퍼)에 의하면, 이미 64년 2월 1일부터 사이공의 미군사 원조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34-A작전계획이라는 북베트남에 대한 광범위한 비밀작전이 발동되고 있었다. 이것은 정보수집·파괴활동·연안시설의 포격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는 북베트남 경제의 핵심부를 파괴한다는 선전포고 없는 공격을 하려는 기만 작전이었다. 통킹만 사건은 이와 같은 작전의 일환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출처 : http://home.tinc.co.kr/~kwon01/main/star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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