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의 영웅(英雄) / 본문 일부 및 해설 / 심훈
by 송화은율조선(朝鮮)의 영웅(英雄) / 심훈
우리 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가는 소리와, 아홉 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 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틀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 남녀 아동들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5리밖에 있는 보통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步轎)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 푼 구경도 할 수 업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안 살림을 희생하고 하루 저녁도 빠지지 않고 와서는 교편을 잡고 아이들과 저녁내 입씨름을 한다. 그 중에는 겨울철에 보리밥을 먹고 보리도 떨어지면 시래기죽을 끓여 먹고 와서는 이밥이나 두둑이 먹고 온 듯이 목소리를 높여 글을 가르친다. 서너 시간 동안이나 칠판 밑에 꼿꼿이 서서 선머슴 아이들과 소견 좁은 계집애들과 아귀다툼을 하고 나면 상체의 피가 다리로 내려 몰리고 허기가 심해져서 나중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돋보기 안경을 쓰고 보는 듯하다고 한다. 그러한 술회를 들을 때, 그네들을 직접으로 도와 줄 시간과 자유가 아울러 없는 나로서는 양심의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
표면에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고 배후에서 동정자나 후원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곁의 사람이 엿보지 못할 고민이 있다. 그네들의 속으로 벗고 뛰어들어서 동고동락을 하지 못하는 곳에 시대의 기형아인 창백한 인텔리로서의 탄식이 있다.
나는 농촌을 제재(題材)로 한 작품을 두어 편이나 썼다. 그러나 나 자신은 농민도 아니요 농촌 운동자도 아니다. 이른바, 작가는 자연과 인물을 보고 느낀 대로 스케치 판에 옮기는 화가와 같이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처지에 몸을 두어 오직 관조(觀照)의 세계에만 살아야 하는 종류의 인간인지는 모른다. 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에 입각해서 전적 존재의 의의를 방불케 하는 재주가 예술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 위에 기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예술가의 무리는, 실사회에 있어서 한 군데도 쓸모가 없는 부유층(浮?層)에 속한다. 너무나 고답적이요 비생산적이어서 몹시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시각(視角)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호의로 바라본다면 세속의 누(累)를 떨어 버리고 오색 구름을 타고서 고왕독맥(孤往獨驀)하려는 기개가 부러울 것도 같으나 기실은 단 하루도 입에 거미줄을 치고는 살지 못하는 나약(懦弱)한 인간이다. "귀족들이 좀더 잰 체하고 뽐내지 못하는 것은 저희들도 측간(厠間)에 오르기 때문이다."라고 뾰족한 소리를 한 아구다가와(芥川)의 말이 생각나거니와 예술가라고 결코 특수 부락의 백성도 아니요, 태평성대(泰平聖大)의 일민(逸民)도 아닌 것이다.
적지 않이 탈선이 되었지만 백 가지 천 가지 골이 아픈 이론보다도 한 가지나마 실행하는 사람을 숭앙하고 싶다. 살살 입술발림만 하고 턱 밑의 먼지만 톡톡 털고 앉은 백 명의 이론가, 천 명의 예술가보다도 우리에게는 단 한 사람의 농촌 청년이 소중하다. 시래기죽을 먹고 겨우내 '가갸 거겨'를 가르치는 것을 천직이나 의무로 여기는 순진한 계몽 운동자는 히틀러, 뭇솔리니만 못지 않은 조선의 영웅이다.
나는 영웅을 숭배하기는커녕 그 얼굴에 침을 뱉고자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농촌의 소영웅들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그네들을 쳐다볼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작자 : 심훈(沈熏)
형식 : 수필
성격 : 교훈적, 예찬적, 사실적
주제 : 진정한 영웅은 바로 문맹을 깨우치는 이름 없는 청년들임을 일깨우고 있음,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과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유층(浮유層) : 하루살이와 같은 계층
고왕독맥(孤往獨驀)외로이 가고 홀로 달림
측간(厠間) : 화장실
일민(逸民) :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묻혀 사는 사람.
야학당의 시작종과 끝종이 자신의 집으로 들려 온다는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이 글은 야학의 실상을 꾸밈없이 제시함으로써 힘겹게 농촌을 계몽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열의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함께 가난한 강학들의 모습을 연민과 비애의 느낌을 가진 채 선명하게 묘사하고, 이어서 자신이 지식인으로서의, 혹은 관망자로서의 자괴감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그 역할이란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고통 속에서 미래를 일구어 가는 농촌 청년에 비해 한없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는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필자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작은 실천이 가장 소중함을 역설함으로써 글을 맺고 있다. 이들이 곧 야학당의 강학들, 곧 선생들인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소영웅들이야말로 조선의 미래를 꾸려가는 동력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의 진정한 영웅은 바로 말없이 문맹을 깨우치고 있는 이름 없는 청년들임을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성을 하고 있는 글이다. 그리고 여기서 당시의 영웅이 히틀러나 뭇솔리니로 심훈에게 인식되었다는 점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는 것으로 외국 관련 정보의 부재에서 오는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싶다.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시인·영화인.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상정(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 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 ( 李守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 ( 京城放送局 )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 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 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新文學思潮史(白鐵, 首善社, 1948), 韓國文學史(金允植·김현, 民音社, 1973), 民族主義文學과 啓蒙小說(吳養鎬, 國語國文學硏究, 嶺南大學校國語國文學會, 1973), 日帝時代 韓國農民小說硏究(林永煥, 서울대학교碩士學位論文, 1976), 韓國農民小說硏究(申春浩, 高麗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나로드(v narod)
‘민중 속으로’를 뜻하는 말. 공동체 미르(mir:러시아의 독자적인 농민자치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지식계층이 민중계몽을 위해 농촌으로 파고들었을 때에 내세운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 아래 1873년에서 74년을 정점으로 하여 약 2,500명에 달하는 러시아의 진취적인 젊은 지식인층이 교사·의사·점원·노동자가 되어 농민에게 나로드니키(Narodniki)의 혁명사상을 선전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74년 가을까지 많은 선동자들이 검거되어 이른바 ‘193인 재판’에서 처벌을 받았다. 이 운동은 농본주의적 급진사상으로 발전하는 1870년대의 혁명적 나로드니키의 출발점이 되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나로드니키(Narodniki)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운동을 실천한 세력. 인민주의자(人民主義者)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1861년 농노해방을 에워싸고, 농노소유자로부터의 인신해방(人身解放)과 봉건성(封建性)의 타도를 위하여 발생한 이 이데올로기는 서유럽 부르주아체제의 실태를 봄으로써 충격을 받았으며,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에 이를 것을 꿈꾸고 러시아 후진성의 상징이었던 농촌공동체를 그 기반으로 삼았다. A.I.게르첸과 N.G.체르니셰프스키는 비밀결사 ‘토지와 자유파’를 만들어 활약하였다. 그들은 “인민 속으로(브나로드:V narod)”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농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다. 74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이루어진 이 운동이 탄압으로 분쇄된 후 혁명노선을 두고 대립이 생겼으며, 79년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와 ‘흑토(黑土)재분할파(Chyornyi peredel)’로 분열하였다.
‘인민의 의지파’는 ‘토지와 자유파’의 중앙집권적 음모집단의 원칙을 계속 지키면서 테러 중심의 전술을 썼으며, 차리즘(황제에 의한 전제적 정치체제)에 대해서 과감히 공격하여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 성공하였으나, 조직도 큰 손해를 입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지방활동에도 중점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자 계몽에도 착수하였다. 제랴보프·페로프스카야·피그네르·키바리티치 등이 중심이 되어 기관지 《인민의 의지》 등을 80년대까지 계속 간행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힘을 잃었으며 일부는 러시아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흑토 재분할파’에는 프레하노프·아크세리로드·데이치·자스리치 등이 가입하였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자 나로드니키는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해지고 혁명적 성질이 상실되었다. 농민 분여지(分與地)의 확대, 농민은행의 확대, 시민권의 보증 등을 요구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유주의적 나로드니키는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하였으며, 레닌은 이 경향과 정력적으로 싸워야 하였다. 1902년 이들 나로드니키파들이 러시아사회혁명당(SL)을 만들었으나, 볼셰비키혁명 후 내부분열이 일어나면서 혁명운동의 주류는 나로드니키에서 볼셰비키에게로 이행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볼셰비키(Bolsheviki)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의 별칭. 멘셰비키에 대립된 개념이며, 다수파(多數派)라는 뜻으로 과격한 혁명주의자 또는 과격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1898년 G.V.플레하노프를 중심으로 민스크에서 조직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여러 명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당대회에서 당원자격 및 투쟁방식을 둘러싸고, N.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인 의견과 L.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적인 의견이 대립하여 내적 갈등이 첨예화하였다. 이때 레닌파가 다수였으므로 볼셰비키라 하게 되었다. 그 뒤로 다수파인 볼셰비키의 이념적 입장은 볼셰비즘이란 개념으로 집약·표현되었다. 정통적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멘셰비키(소수파)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삼아 민주적 투쟁방식을 강조한 데 반하여 볼셰비키는 민주적 자유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적 정권탈취와 체제변혁을 위하여 혁명적 전략전술을 안출(案出)하였다.
볼셰비키는 무엇보다 의식 있는 소수정예의 직업적 혁명가들에 의한 중앙집권화된 당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들 첨병들로 구성된 혁명당에 의한 폭력혁명과 독재정치의 이론을 펼쳤다. 민주적 중앙집권제라 불리는 당조직 이론은 훗날 공산주의 체제의 관료독재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 이 볼셰비즘은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의 적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무엇보다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가혹성과 대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비민주적 엘리트주의, 인위적 폭력론 등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후에 그 외연(外延)을 확대하여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 과정을 밟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실제로 마르크스에게서 혁명운동을 정당화하는 신화(神話)를 취하였으나, 혁명의 전략·전술은 오히려 그의 활동무대였던 러시아의 암울한 사회와 무정부주의자 M.A.바쿠닌으로부터 습득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별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12년 프라하 당대회까지 같은 당내에 있었다. 그러다가 12년 마침내 조직적으로 독립한 정당이 되었다. 볼셰비키가 그들의 혁명원칙을 적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는 1904~05년 러·일전쟁에 수반하여 발생한 혼란기였다. 볼셰비키는 이때 최초로 ‘소비에트’라는 노동자평의회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산업도시에 조직하였다. 소비에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사상의 요람으로, 또 그 실천조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부르주아적 전제정부에 대한 국내전으로 변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17년 2월혁명 이후 차르의 퇴위가 몰고온 정치사회적 진공 속에서,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의 주도하에 역사적인 10월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인류 최초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하였고, 18년 3월 당대회에서 당명을 정식으로 러시아공산당이라 고쳤다.
소련의 건국과 더불어 볼셰비키의 주장은 거대한 일당독재체제를 정당화시키는 관제(官製) 이데올로기로 굳혀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혁명 이후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때문에 그 체제수립과정 속에서 당독재 이론을 더욱 무자비하게 적용시켰다. 세계 최초이자 최강의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은 그 뒤로 볼셰비즘을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세계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서유럽 등지의 공산당들은, 50년대 후반 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다(多)중심화현상이 나타나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이 모색될 때까지 볼셰비키의 폭력혁명 및 당독재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폐기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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