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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준법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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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준법 / 차기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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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를 위하여 싸운다.'느니,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등의 주장은 우리가 늘 듣고 쓰고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정의'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새삼스레 따진다면 이것이라고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원래 인간은 나면서부터 사회 내에서 살게 마련이거니와 만일 사회 내의 개개인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그 사회는 엉망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행동에 한계를 정하는 일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불가결의 조건이 된다. 무릇 그런 한계를 정하는 것을 우리가 우선 습속(習俗)이라고 부른다면, 그와 같은 습속은 장구한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자연히 이룩된 길[道]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개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행동과 심정을 지배하여 선인(先人)들이 닦아 온 길에서 개인이 이탈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
다.

그러나 사회 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그런 습속만 가지고는 부족하여, 이에 도덕이니 법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도덕은 무의식 중에 개인을 지배하는 습속 가운데서 개인의 비판 정신에 비추어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은 따르려고 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며, 법은 질서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은 그 준수 여부가 각 개인의 주관적 양심에 따르는 임의적인 것인데 대하여 법은 개인의 주관 여하를 불문하고 외부로부터의 객관적인 힘에 의해서 그 준수가 강제된다.

국가는 가장 공고하고 통일된 결합체이지만, 그것은 구성원들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법을 돕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사실 권력의 뒷받침이 없는 법은 유명 무실하다. 따라서 국가는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개인을 초월하여 개인에게 두루 명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법은 도덕과 합치되어야만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국가는 국가대로 정의에 합당한 권력에 의거하지 않고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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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의에는 광의(廣義)와 협의(狹義)의 두 가지가 있지만, 광의의 정의란 도덕 일반과 같은 뜻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지혜와 용기 및 절제의 세 가지 덕 사이에 적절한 조화가 이룩될 때 정의가 성립한다고 했는데, 이 경우의 정의는 다름 아닌 도덕 그 자체이다. 협의의 정의란, 사회적인 덕(德)의 하나로 모든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서 취급하고, 그 법적 권리·명예·생명 및 재산 등을 존중함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 그 도덕적 권리나 구조를 받을 권리 등을 공평하게 존중함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정의를 '분배의 정의'와 '보상의 정의'로 구분하고, 전자는 복리를 모든 개인에게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요, 후자는 개인간의 매매 행위와 같은 합의적 관계와 절도나 훼상(毁傷) 등과 같은 비합의적(非合意的) 관계에 있어서 배상을 공평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정의란 그 개념의 광의, 협의를 불문하고 그 자체가 역사적 및 사회적 소산이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달리한다. 그러나 이것을 추상적인 표현으로 요약한다면, 광의의 정의는 개인이 각기 생래(生來)의 적성과 단련에 의하여 각자의 본분에 정려(精勵)하면서 조화된 사회 질서를 이룩함을 말함이요, 협의의 정의는 사회나 국가에 있어서 개인이 인격자로서 공정하게 인정되고 그 가치에 따라 대우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정의라고 할 때는 후자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 즉 '협의의 정의'에 한정해서 고찰하기로 하거니와 그와 같은 정의의 실현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에밀 브루너의 '소론(所論)'에 따라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무정부 상태하의 국가에 있어서는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한 이웃 때문에 정당한 일을 행할 수 없으므로, 먼저 질서 유지를 위하여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여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는 상태가 '정의 실현의 첫 단계'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 단계는 '법의 제정'이다. 제아무리 횡포(橫暴)한 전제군주라 할지라도 독점된 권력만 가지고는 오래도록 국민을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의적인 명령을 보편적이고 타당한 법으로 변형시키게 된다. 그러한 법이 비록 정의감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권세욕에서 나온 단순하고 형식적인 법일망정 그래도 그것은 보편화된 지구적(持久的)인 의사이니 만큼 자의적이며 즉흥적인 권력보다는 낫기 때문에 정의를 실현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정당한 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정당한 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정의에 합당하는 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법의 제정이 '정의 실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짐은 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정당한 법의 제정은 국가정체(國家政體)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  정체와 민주주의적 헌법만이 '법의 정의'를 보장 할 수 있다고 보는 주장은 현대인의 운명적인 편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정당한 법의 제정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어디까지나 현행(現行)하는 국가 권력이 정의를 체득하고 정의를 의욕(意慾)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행사되느냐
어떠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의의 실현은 결국 '실제적인 권력 행사'와 '국가 권력의 분배'라는 문제로 귀착되는데 이것이 넷째 단계이다.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에게 참정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그것은 정의 실현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이다. 그렇지만 국민들이 아직 민주주의에 익숙해 있지 못하거나 사회가 혼란에 빠져 강력한 국가 권력만이 무정부적인 사회를 구출할 수 있는 경우에는, 민주주의는 정의 실현을 위한 최선의 제도가 되지 못할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최악의 제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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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의 정의는 요컨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그러한 정의를 구현시키지 못하는 데서 국가 권력이 약화되고, 그 반동으로 오늘날 여러 유형의 독재가 발생하고 있다.

원래 권력은 아편과도 같은 것이어서, 권력을 장악하면 쉽게 도취되어 권력을 남용하려는 부단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 중에도 전체주의적 독재의 권력 남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를 가져오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브루너의 말대로 전체주의적 독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는 '민주주의'라고 보는 맹목적인 신앙은 커다란 착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사회적·경제적 영역에 있어서 절실히 요청되는 정의에 대하여 아무런 보장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비정의에 시달리는 사회 층은 정의의 실현을 희구하면서 형식적 민주주의보다는 전체주의적 독재를 택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자유 구속에 대하여 카뮈는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말없는 세계의 자유, 입을 틀어막힌 노예화된 정의는 연대성을 파괴하고 마침내는 정의라고 할 수 없게 된다.'라고. 그러나 그는 이어서 '20세기 혁명은 정복의 지나친 목적을 위하여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관념을 함부로 분리해 버렸다. 절대 자유는 정의를 비웃는다. 절대 정의는 자유를 부정한다. 이 두 관념이 훌륭한 열매 를 거두려면 각자 속에 한계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하였다. 몽테스키외 또한 '인간은 법과 함께 있으면서 자유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법 밖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주인의 집을 도망쳐 나온 정처없는 노예가 되고 말았다.'라고 하여 자유의 한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사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히 법은 자유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혐기(嫌忌)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만일 자유가 정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런 자유 상태의 유지는 정의를 실현하는 올바른 사회 질서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폐해가 사회 생활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게 되자, 법은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자본가와 권력층의 전횡(專橫)을 견제함으로써 정의에 입각한 사회 질서를 다시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듯 자유는 올바른 사회 질서에 의해서만 보장되고, 올바른 사회질서는 정의에 기초를 둔 법에 의해서만 수립되느니 만큼 자유는 법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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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인간은 사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자유로운 사회 생활은 법 없이는 영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거니와, 실제에 있어 법은 대체로 강제력을 발동할 필요가 없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누구에게나 법에 반항하는, 또는 준수치 않으려는 심리가 있다.

법에 대한 반항의 원인을 따져 보면, 첫째는 특정 법규가 정의감에 반대되는 경우이다. 정의에 합당하지 않은 이른바 악법에 대한 반항심은 모든 반항 원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것이다. 악법은 국민의 반항심을 환기하고 국가는 그 명령권을 세우고자 가일층 국민을 강압하게 되어 마침내 국민간에 법을 불신하고 혐기케 하는 감정을 부추기게 된다.

둘째는 특정 법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경우이다. 어느 법규를 막론하고 몇몇 개인에 의해 그 필요성이 부정되는 것은 사실상 면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특정 법규에 대한 필요성 부정의 감정이 일반화되면 그 법규의 힘이 마비될 뿐더러 몽테스키외의 말과 같이 불필요한 법규가 필요한 법규를 약화시키게 되고 만다.

셋째는 국가가 이미 제정한 법규와 상반 내지 모순되는 새 법규를 제정하거나 법을 조령 모개(朝令暮改)하는 경우, 또는 예외법으로서의 새로운 특별법을 남발할 때, 법은 그 위신을 상실하게 된다.

넷째는 국가 자신이나 특권층이 법을 준수치 않는 경우이다. 국가 기관 자신의 행위가 법에 위배(違背)될 때, 또는 법을 적용하지 아니하거나 법을 불공평하게 적용하는 경우에는 국민의 준법 의욕이 크게 약화된다.

이 밖에도 어떤 법규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그 적용 범위가 애매하여 귀걸이·코걸이식인 경우와, 그리고 제아무리 이념과 목적은 좋다 해도 입법하기에는 시기 상조인 법을 제정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법이 그대로 준수되려면 국가는 위에 든 반항 내지 위배의 여러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사실, 법이 명확하고 정의에 합당될 뿐더러 공정하게 적용되는 동시에 충분한 강제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국민은 법에 대한 반항심을 가지지 않거나 적어도 반항심을 버리게 된다. 반면 국민은 또 국민대로 사회 생활에 있어서 정당한 법은 도덕보다도 더 절실한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서 나왔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정의의 구체적 투영(投影)인 법을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정의야말로 국민을 단합시키는 유일한 유대(紐帶)임을 바로 인식하고 정의에 입각한 법을 제정하여 공정하게 적용시키는 한편, 국민은 또 국민대로 공민의식(公民意識)에 입각하여 '나만은 빼놓고'라는 사고 방식을 깨끗이 버릴 때에만 준법 정신이 왕성하게 될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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