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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 최종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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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 최종고/ 법학자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즉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상처를 입고 길에 죽게 버려져 있는데, 한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에서 구조해 주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누구나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수많은 크리스천과 지식인, 일반인들도 이 비유에 대하여 적어도 두 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오늘 나의 집 옆 골목이 곧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임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이 인간의 실존적 사건에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2천년 전의 우화의 세계를 동경하는 복고주의적 오류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선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낭만주의적 오류이다.


  과연 이 사마리인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현실적 의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만일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부당한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도 될 것인가? 세계의 선진국 법률들은 이에 대하여 형법전 속에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설치하여 놓고, 불구조자(不救助者) 혹은 구조 불이행에 대하여 법적 제재를 가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형법 제 63조 2항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의(自意)로 구조해 주지 않은 자는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프랑 이상 15,00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 형법에도 제 330조 C항에 "도움이 필수적이고 상당히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특히 현저한 단 하나의 위협도 없이 그리고 다른 더욱 중요한 의무를 위배하지 않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고나 공공의 위험 혹은 위기에 처해 있는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자는 징역 1 년 이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독일 외에도 포루투갈,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등 자유 진영 국가들의 대부분이 이런 조항을 채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형법(1960) 제 127조는 "만약 도움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위험이 없는데도,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하거나 즉시 분명하게 요구되는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나 혹은 관계기관이나 도움을 제공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6개월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의 징계 노동을 하거나 사회적 비난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며, 또는 사회적 압력 조치의 적용 대상이 될 것이다. "고 규정하고 있다. 폴란드 형법(1932) 제 247조 는 "개인적인 위험에 닥쳐 그 자신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노출시키지 않고 구조할 수 있는데도 그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급히 구조하지 않은 자는 3 년 이하의 금고나 징역형에 의하여 처벌된다. "고 규정하였다.


  우리 나라와 가까운 중화 민국 형법(1929)은 재 15조에서 "만약 그 행위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하고 위험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손해의 한계를 초과하지 않는다면,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신체, 자유, 혹은 재산에 위험이 되는 임박한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손해 배상의 의무가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위험의 발생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 그는 손해 배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형법에서는 이것을 유기죄(遺棄罪)로 취급하여 구조 의무가 있는 자가 구조를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구조 의무가 없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위난에 처해 있는 자에 대한 구조와 유기가 성질상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일본 형법도 이 문제에 대하여 입법적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입법의 이론적 근거                                

  이처럼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설치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을 저버리는 사람에 대하여 윤리적으로만 아무리 비난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요, 따라서 그러한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팽배하여 현대 사회가 점점 냉혹하게 되고 흉폭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현대 문명 사회라는 이름의 뒷면에는 대낮에 행길에서 강도를 당해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구경만 하지 구조해 주지도 않고 경찰에 (증인으로 소환당하기가 귀찮다고) 신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비인간화, 비윤리화된 사회와 법에 대한 '새로운 윤리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유 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이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법 문화의 전통상 개인주의적 성격을 자랑하는 영미법(英美法) 계통의 영국과 미국에서는 '네 할 일이나 상관하라(Mind your own business).'라는 전통 때문에 이런 사회 연대적 발상에 대하여 다소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렇지만 근년에 이를수록 영미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이 채택되는 수가 늘어가고 있다.


  위난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는 구조 불이행자에 대한 처벌은 각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국가·사회가 갖고 있는 윤리관과 문화 전통 및 형사 정책에 관련되는 것이다.
  핀란드, 터키 같은 나라는 벌금을 내리고 덴마크,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같은 나라는 3개월 이하의 구류에 처하며 체코, 이디오피아는 6개월 이하의 구류, 독일, 그리스,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는 1년 이하의 징역,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프랑스에서는 최고 5년 이하의 징역에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을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 형벌이 각각 다르거나, 처벌하는 나라와 처벌하지 않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법학적 관점에서는 흥미있는 연구 테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1965년에 일찍이 미국의 시카고 법대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법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이 법을 시행하려면 간단치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점점 중요시되고 있고, 시행 과정에서 점점 세련된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의 주장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흔히들 법에는 눈물도 사랑도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은 독일에서는 '사랑 조항'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법이 사랑과 윤리를 외면하고 엉뚱한 규범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현황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현실이 어떠한가? 한마디로 우리 나라에는 형법에 이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 혹은 사랑의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동방 예의지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처벌 규정이 아예 불필요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비인간화와 윤리 기강의 파괴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말일까?
  우리 나라 형법에 왜 이 조항이 빠졌는가는 형법 제정 당시의 국회 속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원래 「법전 편찬 위원회」에서 엄상섭이 기초한 정부 원안에는 이 조항이 들어 있었는데, 1953년 7월 6일 16회 국회 제 17차 회의에서 삭제되었다. 삭제하는 이유에 대해 당시 윤길중 의원은 이렇게 발언하였다.

  이 유기죄에 관해서는 부양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유기를 해서 생명의 위태를 초래하였다 고 하는 그런 경우인데 이 의무라는 것은 법률상 의무, 계약상의 의무 혹은 사회 관습상의 의무 이러한 것이 늘 유기하는 범죄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 189조 이런 경우는 법률상 부양의 의무가 있다든지 계약상으로 부양의 의무가 있다든지 해서 확실하게 그 의무가 드러난 때이고, 지금 통과된 293조 이것을 삭제하기로 하는 것은 이러한 법률상이나 계약상 또는 사회 관습상으로 당연한 의무가 있다는 것보다도 숭고한 도의적 의무에서 자기 문전에 가령 거지가 병들어 누워 있거나 혹은 길을 걸어가는데 아주 용이하게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이 물에 빠져 있거나 그런 것을 그냥 보고 지나갔다, 이런 것을 부작위로 그 사람을 죽게 했다든지 그런 것을 그냥 보고 지나갔다. 이런 것을 부작위로 그 사람을 죽게 했다든지 그런 것을 방치했다, 그런 의미로서 이것을 처벌하자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려워서 보통 범죄 구성을 이렇게 막연하게 해 놓을 것 같으면 도의적으로는 대단히 좋은 일이나 이것을 법률적으로 범죄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 조문은 삭제를 해가지고는 지극히 불가한 경우 이런 것은 조례로서도 289조에 의해 가지고 그것을 하는 동시에 작위범이냐 부작위범이냐에 대해 지극히 부당한 경우는 289조를 가지고서도 이것을 처벌할 수 있는 까닭으로 해서, 이러한 293조 이것을 두어 둘 것 같으면 대단히 막연하니깐 이 조문은 삭제하자 그런 것입니다.
                                                                               (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 편, 『형법』, 1990, 475쪽 수록)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 형법이 6·25 피난 중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눈앞에 거지가 죽어 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은 자를 일일이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급박한 처지에서 이루어진 입법 논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오늘날 한국 사회도 어느 면에서는 서양 못지 않게 냉혹하고 비인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힘들게 되었고, 급기야 '범죄와의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 것이다. 동방 예의지국이란 말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신중히 검토해 볼 일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법과 윤리에 대하여 갖고 있는 선입견에 가까운 가치 판단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해서도 세계 각국의 입법 추세를 아무리 얘기해 봐야 한국인의 이러한 법의식 내지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

법 제도와 법 의식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법과 도덕의 한계에 관한 논의로 연결된다. 법과 도덕에 관해서는 한편에서는 둘 다 모두 바른 것을 지향하는 동일한 성질의 규범이라고 보는 일원론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덕은 자율적 임의 규범인데 법은 타율적 강제 규범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라는 이원론이 주장되기도 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도덕이 무력할 때 강제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법은 '도덕의 최대한' 이라는 주장도 있다. 법과 도덕은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견해에서는 되도록 법은 도덕의 영역에 간섭이나 참여하지 말고 각각의 자율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법과 도덕의 일원론에서는 도덕에 따라서는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이른바 '도덕의 강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지배적인 이론은 법은 사회의 도덕화를 주목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때에 따라서는 주요한 도덕적 덕목을 법률을 통해 강제할 수 있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어느 나라의 법에나 도덕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고, 특히 형법이나 가족법 같은 분야에서는 강한 윤리적 색채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형법의 존속친 살해나 상해에 대한 가중처벌을 비롯하여 가족법의 동성 동본 불혼의 조항 같은 것은 다분히 유교 윤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근년에 이러한 윤리적 배경에 대하여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여 새로운 사회 현실에 맞도록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부분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형법에서는 다시 '형법의 최후 수단성'을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서는 법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이른바 형법의 비윤리화 내지 탈 윤리화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간통죄 같은 것은 형법에서 폐지하고 순전히 민사적 손해 배상 관계로 처리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사회의 법이 정하는 범죄라는 것이 얼마나 가변적인 것인가를 보게 된다. 간통죄와 같은 범죄가 아니게 되는가 하면 컴퓨터 범죄 같은 신존 현상들이 범죄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리적인 관점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고, 어느 면에서는 기술적인 조작을 넘어서 법과 형벌의 권위를 위하여 윤리적 근거에 새롭게 관심 두지 않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위에 언급한 시카고 대학 심포지엄에서 자이젤 교수는 흥미 있는 국제적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설문을 조사하였다. 1) 불타고 있는 마을에 물을 운반할 것을 거절한 젊은이 2)고속도로에서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간 운전자, 3)길에서 강도 당해 다친 사람을 집에 들이길 거부한 부인, 4) 노파가 길에 넘어져 정신을 잃고 있는데 그냥 지나간 사람, 5) 여자가 몇 명의 남자에게 잡혀 자동차로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못 본 체 지나간 사람.


   이러한 상황을 꼭 같이 설문화하여 필자가 최근 한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즉 1)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조를 기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독일 37%, 오스트리아 39%. 미국 44%, 한국 35%, 답을 했다. 2) '구조 기피자에게 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양심에 맡긴다.), ② 손해의 일부를 배상케 한다, ③ 벌금형에 처한다, ④ 징역에 처한다.


  이 4개 방안에 대해, [도표 1]과 같은 반응이 나왔다. 3)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법적 의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대답이 독일 86%, 오스트리아 26% 미국 16%, 한국 12%,로 나왔다. 한스 자이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대체로 사람들은 도와 주는 행동이 법적 의무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다. 또 법이 있건 없건 개인의 행동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법이 있는 나라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구조 불이행자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표 1]

                  ①    ②    ③     ④
독일           42%  16%  20%  22%
오스트리아  62%   5%  18%  15%
미국           75%   8%  18%  15%
한국           63%  18%  10%   9%

이러한 관점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즉 한국의 대학생들은 윤리 의식에 강하고 구조에 상당히 잘 대응한다고 볼 수 있으나 표본을 다양화하고 확대한 결과 외국과 별로 큰 차이가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사회가 확대 다양화되고 서구화되면서 전통적인 상부 상조의 정신이 흐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처벌 방식에 대하여 법적인 처벌에 대해서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우선 우리 나라에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 조항이 없어서 평소에 이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전통적으로 법은 도덕과 다른 것,다시 말하면 법과는 상관 없는 인륜 질서라는 관념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처럼 법적 강제 없이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대학생 층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된 조사였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법 사회학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다소 예견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일반이 대체로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여, 새로운 것에 대해 일단 부정적인 심리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맺는 말

  필자는 법학자로서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를 신봉하고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법적으로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법에 못지 않게 윤리와 도덕, 종교와 신앙의 세계도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어느새 전통 윤리로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렇다고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법 윤리와도 연결되지 않는 사각 지대 내지 망각의 외딴 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편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고 범죄를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모든 것이 법과 공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형법 개정 논의에서 간통죄 폐지 같은 데는 열을 올리면서 이 사회의 깨어진 연대성을 복구하는 데에는 무관심한 것 같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법률가들도 허다한 것 같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반드시 형법에 삽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다만 되도록 많은 법학자와 법률가뿐만 아니라 종교인과 지성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 사회의 윤리 기강을 재건하는 데에 필요한 규범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정신적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법은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빛난다/철학과 현실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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