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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초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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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초월

 

1, 사회적 삶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

종교는 원시 신앙의 형태에서 오늘의 고등 종교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해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사회 현상이자 문화 양태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제반 현상들 중에서 그 사회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유형화된 삶의 양태를 보편적 사회 현상이라 일컫는다면, 종교는 분명 중요한 보편적 사회 현상이다. 종교는 인간 삶의 구조 속에서 이미 확고하게 그 틀을 잡고 있는 사회적 실재이다. 그러나 종교는 권력의 분배나 통치에 관심을 두는 정치제도와도 다르고 성(性)과 세대 또는 혈연 관계를 규정 짓는 가족제도와도 다르다.


종교는 사회적 실재이면서도 이른바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실제적인 사회적 삶의 현상들과 중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실제적, 사회적 삶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종교에 대한 우리 탐문의 핵심적인 과제임을 일깨워 준다. 왜 인간들은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가 ?


파킨스의 말을 빌리면,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 즉 '초월적 관계'를 인간은 왜 필요로 하는가 ? 왜 사회는 그것을 구현하고  유지할 그러한 신앙과 의식과 제도들을 필요로 하는가 ? 종교와 사회에 관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러한 욕구가 인간 실존의 세가지 기능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첫째,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실존은 우연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인간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예측을 무너뜨리고 비록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노련하게 실천한 것이라 할지라도 종종 기대를 빗나가게 한다. 그러한 실망은 인간에게 심한 상처를 가져다 준다. 선진 과학 기술 사회에서도 운명은 변덕스럽고도 불확실한 여신에게 달려 있으며, '쥐나 인간이 세워 놓은 최선의 계획은 종종 수포로 돌아간다'는 말은 여전히 사실이다.


둘째, 삶의 조건들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은 비록 증대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어느 면에서 인간의 상황은 그의 욕구와 환경 사이의 알력에 대해서 무력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무력성 또는 '불가능한 상황'은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 고통, 강압 등은 우리의 실존을 특징짓는 다. 우리의 육체가 강요함으로써 생기는  일들은 우리의 실존을 손상시키고 우리에게서 만족과 행복을 빼앗아 간다. 인간 조건의 선천적 특징으로서 우연성과 무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는 데 현존하는 기술과 규범들이 전적으로 불충분함을 드러내는 상황, 즉 '한계점'에 직면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점에 대한 의식과 현존하는 불안은 스스로를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초월' 그 자체로 육박하게 하고, 그로부터 대답될 수 있는 물음들을 제기하게 하며, 그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해답들을 온 영육으로 다가가서 끌어안게 만든다.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 왜 병에 걸려야 하는가 ? 왜 나는 당하기만 하는가?


셋째 인간은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좌절과 상실과 결핍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 또한 인간 실존의 또 다른 기본적인 특징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지배와 피지배가 있다. 더욱이 지배를 위한 질서는 권위를 내포하고 권위는 복종을 요구하며 통제와 감독은 강압과 고통을 낳고, 향기와 저항은 종종 좌절과 절망을 낳는다. 우리의 진정하고도 의로운 소망은 왜 불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 왜 선하고 정직한 자가 불행하며, 약하고 탐욕스런 자가 행복을 누리는가 ? 경험적 현실 세계에서 가르치고 요구되는 규범과 덕목들은 그러한 물음 앞에 거의 좌절하기 일쑤이다. 이러한 현세의 한계 상황은 급기야 초월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하고, 인간은 그러한 의존적 연관을 통해 그 위기를 돌파하거나, 또는 초월자의 자애로운 섭리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자기 적응기제를 통해 현실의 의미를 순응적으로 회복한다. 실로 산타야나가 말하듯, "우리의 지식은 길을 비춰주는 연기 나는 소나무 횃불이다. 그러나 한 발짝 앞에는 신비와 불안의 공허가 덮여 있다".
  
2. 왜 믿는가 ? 왜 믿어지는가 ? - 종교 체험의 구조와 본질.

인간 실존의 특징들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태도는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모종의 지식과 세속의 규범과 법제가 보장하는 한계 너머의 안정성을 무제약적으로 욕구하고, 종교는 그러한 인간 삶의 욕구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 그 대답들은 과연 인간 실존의 기본요소, 즉 우연성, 무력성, 그리고 결핍에서 파생되는 문제, 예를 들어 인간의 운명, 욕망과 좌절, 정의와 죄악, 고통 및 죽음 등에 대해 진정 의미있는 대답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그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획득되는 근거와 통로, 이른바 종교 체험은 어떤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그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획득되는 근거와 통로, 이른바 종교 체험은 어떤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 인간은 누구나 절박한 문제에 부딪혔을 경우, 통상 관습적이고 경험적으로 가능한 해결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약적으로 그 해결 방안으로 여겨지는 일체의 것에 다가간다. 사실상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신비나 절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할 경우, 고독감과 무력감에 휩싸이며 압도적이고 위험하고 무관심한 세계에 나약한 존재로 내던져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의식은 유기체적 보존마저 위협당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면 주어진 제한성을 초월하는 반응 기제 또한 갖추고 있다. 종교적 체험의 단초는 이와 같이 의식 또는 삶의 극단적 위기점에서 작동하는 자기 보존 기제의 외화, 다시 말해 인간이 현실 삶의 사고와 사건을 돌파해서 한계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한계점에서의 경험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유기체는 말리노프스키가 언급했듯이 "이 한계점에 직면하면 자동적으로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연원하는 행위와 신념이 발생한다". 이 강렬한 반응은 비상하고 강력한 힘을 동반하며 임의적이고 신비로우며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념과 행위는 '절대적인 의존'과 '지극한 존경'과 '놀랄만한 경이감' 그리고 어마어마한 '자기 몰입'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곧 신성과 접촉하는 계기로서 초월성의 체험이자, 비록 경험 속에서 알어나지만 경험을 초월하는 반응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종교체험이다.


로크디유가 말했듯이 이와 같은 신성의 체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와 매혹, 두려움과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 자신 무언가 운명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파묻혀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줄 뿐더러, 베버가 언급하듯 신성에 대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의무감까지도 수반하는 카리스마 관계를 성립시킨다. 불치의 병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이라든지, 가뭄, 홍수, 태풍 등 자연의 비예측성 또는 무한한 우주 공간이 보여주는 장엄함과 신비로운 위압감 등은 평탄한 일상 생활의 배후에 강력한 힘의 대행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사회의 제도화된 관계와 문화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욕구에 차디차게도 무관심한 세계'와 그에 연원하는 비정함과 냉혹함 역시  경험적 세계 배후에 있는 신성하고도 자애로우며 위력적인 그 무엇과의 관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저히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궁극적인 무력성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급기야 자기 보존의 한계점을 인식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관습적인 대응 방식이나 경험적 합리성과 전혀 무관하게 그 절박한 희구의 체계를 신성하고도 위력적인 초월적 실재로 전화시켜 그 절박함에 상응하는 무제약적인 확신으로 그와의 관계 속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물론 한계 상황에서의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욕구 보상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념 무상의 해탈의 경지를 이야기 하는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라든지, 무위 자연을 이야기 하는 도교에서의 가르침 등은 소극적 욕구 보상의 측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 세계와 그 의미에 대한 높은 수준의 꺠달음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카뮈는 '이방인'에서 죽음의 저주를 받은 한 남성이 비인간적이며 무관심한 우주를 대면해서 평안의 느낌을 갖게 되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싸르트르는 저주스럽도록 허무에 둘러싸인 인간 존재의 실존 자체를 자유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 체험의 초월성의 이면에는 사회적 삶의 좌절과 결핍과 상실을 보상하고자 하는 일상적인 제반 욕망들이 자리잡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짐멜은 종교적인 관계 속에 들어감에 있어서조차 인간은 현재 이미 존재하는 정상적인 일상 관계에서의 태도와 느낌으로 그것을 표현하며 사회에서 이미 존재하는 사회 관계에서의 인간 관계를 모형으로 삼아 그들의 신 또는 초자연적인 세력, 혹은 초월적인 다른 개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말미암은 죽음, 이른바 순교조차 이 생에서의 사회적.생물학적 삶의 과정에서 인지된 가치와 생명의 영속적 존속에 대한 확신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순수한 자기 희생이라 불리는 죽음 조차도 삶의 과정에서 흡취된 사회적 가치감에 기초한 총체적 자기 보존 욕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광신적 종교 상황이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집단적이고도 탈사회적인 욕구 표현의 양태 역시, 개인적으로는 각각 심각하고 특수한 한계 상황을 방영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사회 병리적인 소외와 좌절에 대한 집단적. 유형적 아집의 반응 이외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 체험의 본질로서의 초월은 경험적. 현세적 욕구의 결핍을 '보상 의식 기제'를 통해 완전한 타자로부터 보충하여 자아의 욕망 구조상의 균형 상태를 보존하고자 하는 현세적 욕망의 또 다른 양태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뒤르켐은 초월자가 갖는 이른바 신성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물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대상물에 부여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초월자의 개념을 한계 상황에서 반응하고 발생하는 일종의 사회적 경험의 주관적 침전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이제 종교 체험의 대상으로서의 초월적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에 있어 '투사(投射)'개념을 핵심적으로 부각시킨다. 종교의 관념적인 내용을 인간의 투사로 파악하는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그는 주요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나 하나님의 개념 자체가 인간학적인 근원을 갖는 것으로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자기 지식의 간접적인 형태'라 주장하고, '인간은 -이것은 종교의 신비이다 - 그의 존재를 객관적인 것에 투사한다. 그런 다음에 주체로 전환된 자신의 투사된 이미지로 자신을 객체로 만든다 ---- 하나님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추상된 인간의 가장 고차원의 주체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투사의 관점을 누구보다도 심도있게 견지하고 체계화한 사람을 꼽는다면 프로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선 종교는 '인간이의 나약함을 참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그기고 그 반응하는 행위 양태 또한 과거 상황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배운 적절했던 방식을 현재 상황에서 재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유아기를 재연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유아기적 투사가 그 원형이다. 유아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 두려움으로부터 보호 또한 아버지를 통해 이루어짐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자연의 힘 또는 초월적 신성을 인간의 이미지로 만들어 내고 그것에 아버지의 특성을 부가시킨다. 신을 공포와 존경과 자애로움을 수반하는 '완전한 타자'로 창조하고, 그에 대한 확신과 의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력성은 그대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 확신의 내용과 실제와의 연관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에게 종교는 일종의 '환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부적응, 욕구 불만의 상황을 최소한 견딜만한 정도로 완화시킴으로써 사회적 통제를 도와주는 것이고, 그와 같은 측면에서 종교는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에 덧붙여서 '인간의 유아성의 운명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종교적 사고는 대부분 근거가 없으며 '진리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 또한 여전히 남는다.


'아무 것도 없다'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종국의 해답이라고 하기에는 삶의 상태는 너무도 무기력하다. '진리성이 희박한' 종교의 의미와 영향은 학문적 설명으로 단정 내리기에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너무도 깊고 넓으며 여전히 그 문제의 성격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신성이 단순히 부모와의 체험으로부터 생기는 유아적 투사기에는 욕구의 충족 기제 이상의 너무도 고귀하고 복잡하고, 심오한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도덕적. 금욕적. 심미적 가치 내지 가치 지향성을 포함하고 있다. 성프란체스코의 하나님이 그렇고 테레사 수녀의 하나님이 그렇고 한용운의 '님'이 그렇고 심지어 그 존재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던 칸트의 하나님도 그렇다. 기독교의 경우, 종교체험은 현세에서의 한계 상황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간 주체에 의해 신성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성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그것이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다녀가신 후 이 현세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 주장의 근거는 관습적.경험적 설명 조건을 넘어선 '믿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어지는 일련의 아포리아는 그 믿음이 오히려 유일무이한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서 인간의 인지적 체험 구조 속에서 끝없이 되살아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재현된 체험 속의 신성과 그에 수반된 이른바 가르침이 사회적 삶의 과정 속에서 이미 신성하고 초경험적인 은사이자 진정한 구원의 실재로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의 심대한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종교 체험은 대체로 다음의 중요한 요소들, 즉 한계 상황, 초월자와의 관계, 관계의 초경험적인 성격, 그리고 초월자의 성스러운 성격 및 의무를 수반하는 체험의 카리스마적 성격, 그리고 그 근거의 취약성과 모호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주목할 것은 초월적 신성에 흔히들 결합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완전 선의 개념은 종교 체험에 관한 일련의 경험적 연구 성과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토에 의하면 신성과 절대 선의 개념은 종교적 반응과 관련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현세의 행위에 대한 내세에서의 응보와 관련되면서 줄곧 혼동되어 온 것으로서, 비록 그 과정에서 병립적인 결과도 빚긴 하였지만, 신성이란 원천적으로 윤리적인 개념에 중립적이거나 별개의 개념이다. 아마도 이 점은 종교가 사회적 삶의 과정에 깊숙하고도 광범위하게 자리잡힌 사회가 반드시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 또한 '일반적으로 인간이 현재보다 종교적 교리가 무한정 강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볼 수 없으며 더 도덕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3. 종교의 제도화 서클화 - 그 사회적 딜레마

종교가 근본적으로 사회적 현상으로 문제되고 사회적 삶의 주요 주제로 드러나는 것은 종교가 그 사회내에서 이미 사회제도의 한 부분, 즉 종교적 조직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종교 조직체는 창시자와 제자들의 종교 체험으로부터 발달한다. 종교체험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일종의 카리스마 경험이다. 전율과 매혹으로 가득 찬 카리스마의 순간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보다 안정된 재현의 형태로 진전된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적 제도로서 종교결합체가 발생하는 배경이며,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의 관습화'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본래의 종교 체험을 새로운 상황에서 가능한 한 계속 체험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와 그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비상하고도 감동적인 체험이 예수 숭배의 첫 시발점이 되었고, 동시에 기독교의 의례적 조직체 발생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적인 관심은 날마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하루를 정해 예배를 거행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종교적인 교시, 설교, 기도 그리고 떡을 나누는 것을 거행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가까운 미래에 기대했었고, 그러한 기대의 정신이 그들의 모임을 고취시켰다.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재를 다시 한 번 실현한다고 믿는 식사의 한 부분이었고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리스도와 직접 친밀한 연합' 이루어짐을 믿었다. 이 예배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의 공동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지속적인 종교 체험의 재현을 담고 있는 이러한 초대 기독교회의 서술은 세 가지 측면에서 종교 체험이 서클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째, 종교 제도는 예배의 유형, 즉 의례로 발전한다. 둘째 종교 제도는 이념과 규정의 유형, 즉 신조로 발전한다. 셋째 종교 제도는 서클 혹은 조직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종교 역시 사회 제도의 일부로 편입되는 데 있어 의례와 격식의 조건, 이념과 그 이념의 합리화라는 지성적인 조건 그리고 구성원의 유대와 관계가 성립되는 조직체의 조건 등 사회적 관계의 일반적인 조건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의례란 종교적인 현상에서 중심적인 몸짓과 언어와 상징적 매체를 합한 것으로서 최초 본래의 체험을 재현하고 예배하는 자들이 신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의례는 신자들의 본래 주관적이고도 자연적인 종교 체험상의 태도를 유형화한 일정한 양식과 절차를 통해 다른 신자들과 서로 나누게 하고 객관화시킨다. 의례는 신성에 대한 '느낌'을 심리적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표현한다. 의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화'의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의례의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느낌의 언어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화는 궁극적으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이고 항구적인 태도를 형성시킨다. 즉 의례는 '끊임없는 감정의 반복'이자 '일정한 태도를 훈련하는 연습'으로서 집단의 유대성을 강화하고 자체의 가치를 재확인하며 자발적인 교의적 실천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원의 유대와 실천은 사회적 배타성과 포용성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수반하면서 여타의 사회 기능적인 집단과 제도와 중층적이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종교의 제도적 서클화, 사회화 과정은 종교적 의례의 성격에서도 드러나지만, 오히려 나머지 두 측면, 즉 신조나 교의의 측면 그리고 교회 또는 종단 등 조직체의 측면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파슨스의 말처럼 '신조는 인간 행위의 상황을 규정하는 데 적절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규정해 주며 그리하여 가장 다양한 일상생활의 실제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고, 종교 조직체는 일정한 조직과 직책, 일정한 교의와 규정 등을 통해 자체 내 가치와 카리스마를 보존하고 그와 함께 여타 사회 기능과의 필연적인 관계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대립, 공존과 협동, 타협과 적응 등 일반적인 삶의 관계 방식 일체가 종교의 제도적 서클화 과정에서도 발생하며, 그에 상응하는 세상과의 접촉 및 적응 관계, 즉 사회화. 세속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즉 어떤  형태건 본래의 종교 체험은 그 카리스마적 순간의 관습적 지속을 욕구하면서 필연적으로 카리스마의 관습화라는 제도화 과정을 겪게 되고, 그러한 제도화는 비록 구성원 각자가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신성한 대상과의 관계를 집단적으로 재현하는 회중성, 사회성을 성립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여러 사회 기능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종교 자체를사회적 삶의 과정과 분리되지도 무관할 수도 없는 사회적 실체로서 자리잡게 만든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종교의 제도화는 경험적 세계 안에서 언어, 상징 그리고 사회관계라는 현실 세계에서의 매체를 통해 인간 실존의 한계성을 집단적으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개인의 내면 세계에서의 신성과 집단의 사회적 세속성의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그 자신의 한계점에 대한 체험을 공유한다. 종교의 제도화가 불가피하게 가져다 주는 이러한 측면은 이제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발생시키면서 일종의 딜레마를 우리에게 던져주는데, 이 딜레마로부터 우리는 이제 종교가 사회적 삶과 관련하여 야기하는 문제들의 기본 성격들을 포착하게 된다. 즉 종교의 제도화 과정 그 자체의 딜레마가, 곧 종교가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우선 종교가 현실 세계에서 제도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종교 조직의 성립을 의미하는데, 종교 조직은 권리와 의무에 의해 규정된 일련의 권위와 역할을 동반한다. 이것은 제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일련의 경험 세계적 가치들, 즉 권력과 권력층,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명성과 존경, 가르침과 지도력 등이 그 종교의 안정적 유지에 중요한 동인으로 개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도로서의 현실 종교 내지 종교 지도자는 신성과 세속이라는 복합적인  동인에 근거를 둠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직체의 안정과 생존에 기여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조직체의 목적과 가치를 변질시키는 심각한 근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제도화된 현실 종교는 집단적인 의례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는데, 이 의례 자체로부터 종교와 사회적 삶 간의 긴장된 관계가 발생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 자체가 사회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례는 태도와 감정을 유발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상징의 객관적 질서이다. 그러나 같은 상징적 매개체를 계속 되풀이해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관습적 객관화는 주관적이며 본래의 뜻 있는 태도와의 접촉으로부터 점차 상징을 제거시킨다. 그리하여 상징과 본래 상징의 출처 사이에 괴리가 생기고, 그 괴리에 따른 소외의 증대는 연속성을 위한 객관화로서의 의례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면서 종교 결합체 자체의 안정성을 위협한다. 서구 사회 변화의  중요한 계기를 이룬 종교 개혁의 발단에는 맹렬하게 미사를 비난하며 제단과 성상을 교회에서 제거하고 폭력으로 성례전을 모독한 급진적 개신교 집단의 태도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셋째, 종교의 제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딜레마로서 우리는 종교 집단이 제시하는 종교적 규정의 배타성,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어떤 종교 집단이 그 종교의 통찰력 및 가치의 보존과 조직체의 통합을 위해 본래적인 종교 체험에 입각한 가르침을 규정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종종 이것은 종교 메시지의 본래적인  뜻을 상실하고 특정한 상황, 변화하는 일상적인 사회 관계 속에서 배타적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의례적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한 힌두교의 상세한 금지 사항이라든지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율법, 역사를 통해 나타난 제반 엄격주의적 신앙 형태 등이 빚어낸 본래적인 종교적 메시지와 구체적 규정과의 딜레마,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삶 속에서의 제반 윤리적 갈등 및 혼란은 과거는 물론 지금의 사회 병리적 종교 현실 속에서도 명백히 확인되는 것이다. 특히 정교가 분리된 이른바 종교 다원화 시대를 사는 현실에서, 원리적으로 삶의 총체적 전일성을 반영하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으로서 다른 종교, 다른 이념을 공유하고 관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딜레마인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메시지의 구체화 과정에서 이미 딜레마인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메시지의 구체화 과정에서 이미 경직될대로 경직된 교의의 배타성, 그것은 실로 심각한 '갈등'의 요인이 되었으면 되었지 '사랑'의 기초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성공회 신학자인 스위프트는 '우리는 우리를 싫어할 만큼의 종교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만큼의 충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사랑이야말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4.맺음말

다양한 나라, 다양한 민족들이 다양한 문화를 이루며 다양한 인간적 삶의 가치를 꽃피우는 평화 공존적 질서와, 안녕의 꿈은 이른바 양극 체제를 깨는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함께  한걸음 그 실현의 장으로 다가설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새로운 질서 속에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의 전일적인 관철로서 '국경없는 무한 경쟁' 원리가 '냉전의 위협'을 대신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아마도 금세기가 가기 전에 우리는 세계가 어느 한구석 예외 없이 '정글화'되는 것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통신과 교통의 발달, 정보의 무한 보전 가능성은 세계 모든 국가와 민족과 지역을 '경쟁'으로 끌어들일 것이고 또 '경쟁'으로 달려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일정한 단위를 이루고 있는 국가나 사회 내부에서도 그대로 재연될 것이다. 물론 정글에도 강자와 약자가 먹이 사슬을 이루는 질서가 있듯이 세계도 언젠가는 '잘난 나라 잘난 대로 살고, 못난 나라 못난 대로 사는 일련의 질서가 형성될 것이고, 사회 역시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형국이 될 것이다.


세계라는 단일 질서 안에서 초강대국을 영주로 받들고 제 분수를 알면서 자족해 가며 사는 이른바 '신봉건주의적' 국제 질서가 구축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고정화된 정해진 종들의 싸움판인 정글과 달리, 반전과 변화의 가능성을 갖는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판에 안정된 질서가 자리잡히기란 거의 난망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그때까지 강자가 되기 위한, 아니면 최소한 강자에 빌붙어 중간이라도 가기 위한 피나는 경쟁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건 개인적으로건 낡은 기존의 비효율적인 전통과 문화와 가치와 규범들을 하나 둘, 급기야는 송두리째 대던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될 한계 상황,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것이다.


사회적 개인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던 연대성과 합의의 상실, 즉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공하는 가치와 규범에 대한 체험적 동의가 붕괴되면 그로부터 오는 혼란과 근심, 불안정은 개인들로 하여금 관습적 해결조건의 '한계점' 바깥의 수단으로 내닫게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풀 수 없는 '신비'를 풀 수 있는 '문제'로 반전시킨 오늘의 인간에게 이 한계점 바깥의 대안으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다름아닌 알코올 중독과 마약과 성적 쾌락 그리고 정신분열뿐이다. 이러한 금세기의 문명 상황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삶의 한계점에 대한 경험 역시 심화될 것이다. 한계점의 경험은 좌절과 회피, 나아가 또 다른 갈망과 초월을 통해 필연적이고도 역설적으로 현대인으로 하여금 종교적 정황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 병리적 현상은 우리의 근현대사가 갖는 급격한 사회 변동과 오늘날의 세계 질서의 재편 및 그에 따른 우리 사회의 변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현상을 더더욱 심각한 문제로서 확대시키게 될 것이다.


흔히들 인간사 모든 일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개인적인 신앙차원에서는 한계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마음 상태에 따라 때로는 다른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이고 객관적인 한계 상황을 집단적인 마음 다지기를 통해  다른 상황으로 여겨지게 한다는 것은 소규모 사교 집단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설사 온 나라가 그 마음 다지는 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타내는 사회 경제적 대응의 양태는 완전한 종속의 합리화가 아니면 폐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의 처절한 자구적 결사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가 사회 관계에 미치는 이와 같은 중층적이고도 양면적인 성격은 종교에 대한 보다 사회 과학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종교를 단지 개인의 영혼과 정신을 위로하거나 고양시키는 비과학적인 인간 의식의 한 양태 정도로 보는 왜곡된 관점은  종교가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과 작용하여 얼마나 터무니 없을 정도로 사회 관계에 영향을 미쳐 왔는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그래 왔듯이 종교는 앞으로도 가장 간절하고도 절박한 인간의 소망과 관련하면서 때로는 공공 질서와 인간 내면의 평화의 원천인 도덕의 방파제로서 인류를 문명화시키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발전을 저해하는 완강한 장애물이자 광신과 불관용, 무지와 미신 그리고 반계몽주의의 화신으로 비난받기도 할 것이며, 독일의 농민 전쟁처럼 심각한 혁명의 동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언제나 그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측면을 함께 가지면서 이 과학의 시대에서도, 이 세속화된 현실에서도 때론 성자로서 때론 공룡같은 괴물로서 부단히 사회 체제의 유지 또는 변화에 심대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미 종교는 환상으로서건 의미있는 신념 체계로서건  우리의 문화 양태 속에서 여타의 사회 제도 및 기능과 복잡하고도 유기적인 상호 의존 관게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삶에 심각하고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실재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므로 종교가  사회적 삶의 한 형태이고 인간의 사회적 삶의 목표가 다름아닌 인간 개체의 욕구실현과 공동체적 안녕의 보존이라면, 이제 우리는 종교가 사회적, 역사적 삶의 과정에서 어떠한 위상과 기능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인간 삶의 의미와 목표와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의 종국적. 총체적. 사회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부단히 탐문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혹자는 종교에 관한 우리의 그러한 논의는 그것이 종교에 관한 것인한 궁극적으로 순환적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초월자에게로 비약함으로써만 그 탐문의 진정한 의미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의심의 가능성을 내포함으로써 성립하는 한, 지성적 탐문에서의 의심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대하고도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제까지의 모든 논의도 이런 의미에서 종교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지적 탐문이자, 언제나 또 다른 그 의심을 향해 열려 있는 하나의 지적 논구일 뿐이다.


[열림논술원 자료실 http://www.jakga21.in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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