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해설 / 톨스토이
by 송화은율
전쟁과 평화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는 《안나 까레니나》와 함께 똘스또이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일대 걸작으로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그리고 재재의 스케일에 있어서도 세계 문학 가운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나 견줄, 러시아 문학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전소설계에 군림하고 있는 거대한 기념탑이자 근대의 《일리아스》이다>라고 로망 롤랑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럽의 근대 문학 가운데서 최대의 예술작품으로 헤아려지고도 남을 일대 서사시적 대하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의 제1차 나뽈레옹 전쟁 직전부터 1812년의 대 나뽈레옹 조국 전쟁, 1825년의 이른바 제까브리스뜨 <12월당원>들의 혁명 운동을 낳게 한 자유주의적 사회기운이 팽배하기 시작한 1820년까지의 15년 동안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재현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보로지노 벌판에서의 노·불 양군의 대회전, 나뽈레옹의모스크바 점령,모스크바의 대화재, 프랑스군의 퇴각 등 러시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대사건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르 1세와 나뽈레옹의 노·불 두 황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상의 실제 인물과 모델에 따른 작중 인물, 완전히 창작된 인물들이 등장하여 독자의 눈앞에서 활약하는 등, 그 규모의 웅대함은 참으로 세계 문학 가운데서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찾아 낼 수 없을 만큼, 또 재래의 장편 스타일을 깨고 역사 소설과 가정 소설,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을 한데 시도한, 전혀 전래 없는 장려한 문학 형식을 창조하여, 그 당시 평자들이 이것을 어느 장르에다 들어맞추어야 할지 몹시 당황했을 정도였다.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똘스또이가 오랫동안 친히 알고 지내던 모스크바의 궁정의 베르스의 열 여섯 살난 둘째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한 이듬해인 1863년 2월로, 자기네 소유지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신접 살림을 차리고 완전한 행복과 찬란한 희망, 그리고 밝고 편안한 심정을 즐기던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살 때였다.
이리하여 《전쟁과 평화》 집필에 착수한 똘스또이는 한편 새로운 호메로스가 되어 보겠다는 의욕으로 이 대작의 창작에 골몰했다. 그 사이에는 1864년 9월, 사냥을 나갔다 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목숨을 빼앗길 뻔한 사건 등 온갖 장애와 어려운 일들이 있었으나 그의 왕성한 창작의욕은 그러한 것 때문에 오는 창작의 침체 없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로 하여금 예술 창작에 완전히 몰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65년 2월에 끝마친 첫 부분 제1권 제1편이 당시 평론가인 까뜨꼬프가 발행하던 《러시아 통보》지에 《1805년》이라는 표제로 발표되고, 뒤에 《전쟁과 평화》로 제목을 바꿔 꼬박 여섯 해 동안의 보단한 정진을 거친 1869년 말에야 비로소 전펴능ㄹ 완결지었다.
그러나 이 대작 《전쟁과 평화》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태어났다.
그는 1860년 7월에 제 2차 외국 여행에 나섰다.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게르쩬에게 낸 편지 가운데서 <제까브리스뜨에 대하여 쓸 생각>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 똘스또이는 1856년에 시베리아의 유배지에서 사면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새로운 러시아에 자기의 엄중한, 얼마쯤 이상주의적인 눈초리를 돌리는 제까브리스뜨들의 활동 및 똘스또이의 외가 친척인 드루베스꼬이 공작네와 세르게이 , 그리고 리에비치 볼꼰스끼이 공작이 연좌했던 12월당원의 지난날의 혁명 활동에 관하여 같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주제로 <제까브리스뜨>라는 장편 소설을 계획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제까브리스뜨란 1825년 12월 14일 대 나뽈레옹 조국 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군을 추격, 서구의 해방자로 빠리에 입성하여 거기에서 서구의 진보적인 문명에 접하고 자유 사상을 흡수한 러시아 귀족 출심 청년 장교들이 니꼴라이 1세의 자유주의자 탄압에 반항하여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폐지를 내세우고 뻬쩨르부르그의 의료원 광장에서 반정부 혁명을 일으켜 시인 K.P.르일레예프 등 5명이 처형 당하고, 당시 러시아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약 100여 명의 청년들이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비밀 결사 12월당의 구성원을 말한다.
예술과 역사의 대합창
똘스또이의 내부에는 좌우 각각 직능을 달리하는 두 손이 있었다. 한 손은 지상의 것, 악의 유혹, 육의 생활을 찾았다. 그러나 또 한 손에는 선천적으로 천상의 것, 신의 세계, 영의 생활에 대한 순교자적 부단한 매진이 운명 지워져 있었다. 똘스또이의 생애는 이 좌우 두 손의 끊임없는 싸움이었고 그리고 이 전자에 대한 후자의 최후의 승리였다. 말하자면 그의 내적 실재로서의 좌우 두 손의 피투성이의 심각한 싸움의 역사이고 그리고 빛나는 역사의 개가였다.
야스나야 뽈랴나의 세습 귀족의 집에서 고고의 소리를 올린 뒤 줄기찬 열정과 의지로써 진리의 탐구와 자기 완성의 고행을 거쳐 마침내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표연히 진리와 실생활과의 최후의 대조화를 향하여 재산을 버리고, 가정을 박차고,사랑하는 가족을 떨쳐버리고 유랑의 길에 올랐다.눈이 덮인 아스따뽀보의 시골 역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의 똘스또이의 지상 82년의 생애는 곧 어디까지나 전인류를 위해서, 전인류와 함께, 전인류 속에서 살려고 했던 그의 숭고한 내적 생활의 역사이며 전인류의 역사이였다.그는 자기의 생활 경험과 넋의 편력을 자전적 3부작《유년시절》《소년시절》《청년시절》의 일쩨네프를 비롯하여 《까자흐 사람들》의 올레닌,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와 삐예르, 《안나 까레니나》의 레빈, 《부활》의 네흘류도프 등과 같은 인물에 많거나 적거나 자전적 요소를 담았고 그러한 그의 대부분 작품 가운데 불멸의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구체화함으로써 기적적인 예술을 창조하였고 또한 현대 문명을 비판한 많은 종교적 및 사상적 저작을 통하여 기독교적 아나키즘과 자본주의 및 국가에 입각한 문명 부정의 심원한 사상을 확립했다. 이같이 실로 그의 예술적 창조와 심원한 사상은 그저 머리로만 쓰고 단순히 사색의 유희가 낳은 것에 불가한 허구적인 것이 결코 아니고, 어디까지나 몸소 신에게로의 험난한 길을 향하여 전인류의 괴로움을 괴로워했던 자기의 생활과 구도자적 고행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과 몸으로써 기록한 방황과 고뇌의 내적 생활의 고백이기 때문에, 빛을 잃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에게 영원히 남겨진 공동의 귀중한 유산으로 언제까지나 불멸의 빛을 뿜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이자 사상가인 똘스또이의 영과 육의 피나는 싸움의 생활이자 내부 갈등과 파탄의 역사인 한평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우리들은 거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류 최대의 문제에 대한 무한한 교훈, 아니 적어도 그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게 된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는 1828년 8월 28일 러시아의 중앙부 뚤리스까야현의 소유지 야스나야 뽈라냐(밝은 숲 속에 빈땅이란 뜻)에서 태어나 그는 여기에서 한평생의 태반을 보냈다. 그는 두 살에 어머니를,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들의 손에 의하여 양육을 받았다. 처녀작《유년시절》과 《소년시절》그리고 그로부터 한 6년 뒤에 씌어진 《청년시절》은 그의 생애의 이 시기의 생활을 전하고 있다. 그는 열여섯살 때 까자니 대학교 철학부 동양어학과 아랍·터어키어학 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2학기 진급시험에 떨어져 법학대학으로 옮겼다. 그 뒤 가까스로 1849년 뻬쩨르부르그 대학교의 학사 시험에 붙었다. 1847년부터 1851년까지 똘스또이는 다시 야스나야 뽈랴나에 살면서 전원에서의 새로운 조직의 농사 관리, 소작 대 지주의 친화, 농민 생활의 개선 등에 전념했으나 그의 피나는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 뒤 견습 사관으로서 포병 연대에 들어가 연대와 함께 4년 동안을 까프까즈에서 보냈다. 위에서 든 《유년시절》과《소년시절》그리고 《지주의 아침》과 《까자희 사람들》은 이곳에서 씌어진 것이다.
1853년 끄르임 전쟁이 일어나고 똘스또이는 이듬해 끄르임 파견군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토대로 3편의 스케치 《12월 세바스또뽈리》《5월의 세바스또뽈리》《8월의 세바스또뽈리》를 저술했다. 이것은 애국적인 경향과 로맨틱한 영웅 숭배가 전연 없는 순수한 사실적인 전쟁묘사로써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최초의 것이다. 1856년 러시아 ·터어키 전쟁의 화평이 맺어지자 군무를 떠나 먼저 뻬쩨르브르그에 와서 당시의 러시아 문단의 거장들 ―뚜르게네프·곤차로프·네끄라소프―과 개인적인 우의를 맺었다. 여기서는 또 단편<눈보라> <두 경기병>이 나왔다.
1857년 그는 유럽 여행을 떠났다. 서구 문명은 물론 그에게 큰 감명의 주지 못했다. 허위와 부정의 횡행은 러시아에서보다 외국에서 한결 심한 것처럼 그에게는 여겨졌다. 그때의 인상을 그는 단편 <류쩨른>가운데서 자신의 분신인 네흘류도프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다. <류쩨른>에 이어 1858년에는 음악가를 다룬 이야기 <알리베르뜨>가 나왔다. 이 작품 가운데서 똘스또이는 사실적인 분석의 수법을 써 음악이 인간의 넋에 미치는 작용을 그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단편<세 죽음>그리고 중편<가정의 행복>을 내놓았다. 또한 1863년에는 단편 <홀스또메르><뽈리꾸쉬까>가 발표 되었다.
1862년 서른 네 살 때 그는 모스크바의 궁정전의 딸인 열 여섯 살인 소피아 안드레 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여 야스나야 뽈랴나의 향리로 돌아왔다.
이곳은 그 뒤부터 그의 정착지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한 평생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세월 이었다. 그 동안 그는 많은 자녀를 두고 소유지를 열심히 관리하며 전원 생활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렸다. 이같은 행복한 생활 속에 묻혀 그는 《전쟁과 평화》《안나 까레니나》등 걸작을 썼다. 대 장편 《전쟁과 평화》는 1863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869년에 완결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창작중 최고 수준을 뜻하며, 러시아 문학 가운데서 어떤 작품보다도 널리 외국에 알려진 것이다.
70년대 초 《전쟁과 평화》가 나온 뒤 똘스또이는 국민 교육의 문제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커다란 정신적 위기가 그를 덮쳤다. 그는 자기의 작가적 활동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신화과 철학상의 여러 문제의 연구와 순박한 민중과의 접촉에 의하여 인생에 의의를 찾았다.
그는 모든 진보, 예술과 과학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예술작품―장편《안나 까레니나》구상에 정력을 쏟고 있었다. 이 작품은 1875∼76년에 상재되었다. 이 작품도 또한 다분히 자전적인 데가 있었다.
《안나 까레니나》 뒤, 그러니까 1880년대, 나이로는 50대에 그 유명한 정신적 위기를 겪고 난 뒤 똘스또이는 이른바 <똘스또이즘>의 기초를 이루는 일련의 사상적, 교화적 저술 ― 《고백》《독단적 신학비판》《나의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인생에 대하여》등 ―을 발표했다. 그가 주장하는 요지는 곧 악에 대한 무저항과, 온갖 문화, 문명, 과학과 예술의 폐기, 국가와 그 모든 제도,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교회의 기피이다.
그는 또 배움이 없는 몽매한 민중을 교화할 양으로 1881년 이후 많은 민화를 썼다. 그 가운데의 몇 편을 들자면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두 늙은이> <바보 이반의 이야기> <사람에게는 땅이 많이 필요한가?>같은 것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성서 가운데의 전설과도 견줄 만하다. 같은 무렵 그 리얼함에 있어서 놀랄 만한 예술작품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이, 그리고 1891년에는 유명한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나왔다. 이 후자는 아마 세계 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작품이고, 결혼의, 더구나 모든 결혼의 가차없는 학살이며 완벽한 심리 묘사의 걸작이다. 이 시기의 것으로는 또 농민 생활에서 소재를 얻은 사실적 희곡 <암흑의 힘>이 있다. 이것은 러시아의 희곡 중에서 손꼽히는 작품이다. 1897년에는 예술 공리주의를 내세운 논저<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1899년에는 새로운 장편 《부활》로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무렵 또 그는 단편<하지무라뜨>를 쓰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까프까즈 시절의 회상을 바탕삼은 것으로 그가 죽고나서야 비로서 발표 되었다.
이처럼 똘스또이는 80년대에 전환기를 겪고 나서도 계속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그 전환은 그가 활동의 중심을 옮겨 그 합리주의적이고 반교회적이며 반국가적인 주장을 편 많은 논저에 발표에 중점을 두기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10년 10월 28일 미명, 드디어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 똘스또이는 아내 소피아 안드레 예브나에게 마지막 쪽지를 적어놓고 의사 마꼬베쓰끼이만을 데리고 야스나야 뽈랴나의 정든 집과 향리를 버리고 전인류의 박애의 길을 향하여 표연히 집을 떠났다. 그러나 죽음은 그가 떠난 뒤 이내 그를 덮쳤다.
1910년 11월 7일 랴자니― 우랄 철도가 통과하는 아스따뽀보의 촌역에서 그는 여든 두 살을 일기로 진리와 생활과의 마지막 대 조화를 온 세계의 형제들에게 몸으로써 보이면서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의 정교회는 이미 1910년에 그를 파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의 찬가가 없이 야스나야 뽈랴나에 묻혔다. 그것은 러시아에 있어서는 최초의 시민장이었다. 똘스또이는 지상의 가장 위대한 한 인간으로써의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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