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해설 / 앙드레 지드
by 송화은율
좁은 문/ 해설 / 앙드레 지드 / 洪承完
너무나도 성스럽고 깨끗한 소녀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문자 그대로 순결무구한 것이다. 알리사는 사촌동생인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지상에서의 사랑을 피하고 남몰래 죽어간다. 알리사의 그러한 행위에는 불륜한 어머니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제롬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등 몇 가지의 원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다운 원인은 그녀의 신비적인 금욕주의에 있다.
자그마한 예배당에서 목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힘을 다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성구를 낭송한다.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의 결정 작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알리사의 명상에 잠긴 눈초리가 제롬에게는 성녀가 짓는 명상의 표시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몸짓도 그에게는 <덕>의 완성을 지표로 삼는 노력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를 단테의 베아트리체로 견주어 미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제롬의 노력의 목표는 오로지 알리사의 <덕>에 견줄 만한 청년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세의 온갖 즐거움을 내버리고 성서에서 가르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괴로움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짙은 것으로서, 장차 자기의 아내가 된 마늘렌느의 영상을 많이 엿보게 한다.
아무튼 이 작품의 여주인공 알리사는 천국에서의 영혼의 합일을 꿈꾸나,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한 절망감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제롬을 자기 여동생 쥘리에뜨가 사모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데서 자기 희생을 각오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것이어서, 그녀는 마침내 <덕>과 <천국>과 <신>에 대한 신앙마저 잃고 요양원에서 짧은 패배의 생애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연인을 읽고, 순애의 꿈이 깨어져 폐인이 되다시피 한 제롬에게 현실의 가정생활의 행복을 구축한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뜨가 "자아, 이제는 잠을 깨지 않으면 안 되요."하고 울면서 충고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충고의 이면에는 신랄한 야유가 뒤섞여 있지 않겠는가. 앞에서 지적한 결정 작용이란 스탕달의 《연애론》에서의 결정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의 모럴을 탐구한 위대한 지성
유럽이 위기에 처해 있던 시대, 바로 그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의 정신을 대표하는 작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는 1869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파리 법과대학의 교수로서 남프랑스 출신의 캘빈파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북프랑스 출신의 구교도인 카톨릭 신자였다. 이와 같이 그의 양친의 이질적인 성분은 지드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복잡성을 안겨 주었다. 양친이 지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상반되고 있다는 점은 곧 어떤 의미에서 모순을 띠고 있었다고 하겠다.
지드의 소년시절은 그가 51세 때인 1920년에 발표한 바 있는 《한 알의 밑알이 썩지 않으면 (Si le Grain ne meurt)》에서 솔직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것은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으로, 그후 1926년에 증보판으로 완간되었다.
그가 11세 되던 1880년 , 아버지가 장결핵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밑에서 엄격하기 그지없는 교육을 받았고. 그러기에 그는 가정의 분위기에 위화감마저 느꼈다. 그는 8세 때에 알사스 학원에 입학했으나 곧 휴학을 했고 그 후에도 몇 번인가 학교에 들락거렸다. 그는 병적인 겁쟁이였으며 한편으로는 성적인 본능이 조숙해서 이미 13세 때에는 사촌누인 마들렌느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마들렌느가 어머니의 정사에 충격을 받고 번민하는 데 대해 그는 가련한 사모의 정을 바치게 된 것이다.
1887년에 알사스 학원 수사학 학급에 편입한 그는 그때 피에르 루이즈 (뒷날 시인이 됨)와 한반에서 친구가 되었다. 루이즈는 지드에게 문학에 대한 자극을 주었고, 지드 자신도 갑자기 문학열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 지드의 나이 18세였다.
루이즈는 지드와 전혀 성격이 맞지 않는 기질의 청년이었으나, 그 당시 지드를 문학에 접촉시키는 구실을 했다. 학급에서는 지드와 르이즈가 서로 수위를 다툴 정도로 둘 다 성적이 뛰어나서 경쟁이 심하기도 했다. 바로 지드가 처녀작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Les Cqhieys d' Andre Walter)》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 무렵에 지드는 앙누시 호반에서 피아노에 앉아 쇼팽과 슈만의 곡을 쳐보면서 서정적인 고독에 잠겨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차단되어 버린 청춘의 꿈이며, 청년 지드의 뇌리에 끊임없이 일고 있는 인생의 문제, 이를테면 정신과 육체의 상극, 신교주의와 해방의 욕구, 행복의 탐구와 안일을 벗어난 파멸에 대한 의지 등, 아직까지는 뚜렷한 형태를 이루지 못한 채 혼돈 속에 묘사되어 있다. 여하간 온갖 것이 분열된 자아의 대화이며, 격한 긴장에 사로잡혀 있는 등 이 대화는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가공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쉽게 말해서 사촌누이 마들렌느에 대한 사랑을 주축으로 해서, 그 당시에 자신이 번민하고 있던 영혼과 육체의 다툼과 형이상학적인 번민을 일기체로 쓴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연인 마들렌느는 이 작품에서, 꿈에서 보는 환상의 아가씨와 전혀 별개의 인간인 것이다. 즉 사촌누이 마들렌느는 이 작품을 읽은 다음, 지드의 구혼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편지 왕래 마저 끊어버린 정도였다.
이러한 작품을 낳게 한 이면을 좀더 쉽게 살펴본다면, 그의 신교도적인 소년시대의 인습적인 좁은 환경, 그리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향해서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야 할 때 부딪친 비장한 투쟁 따위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아무튼 여성들의 사랑의 세계에서만 자랐던, 연약하고 열정적이고 병적인 소년 지드는 일찍부터 양심의 괴로움을 받았고, 욕망과 후회와 가책 속에서 내성적이고도 명상적인 소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앞에서도 말 한 것처럼 음악을 즐겨했고, 또한 독서와 식물학, 성서 같은 것을 벗삼아 호숫가와 숲 속과 언덕을 누비면서 홀로 미치지 못하는 젊음을 불사르곤 했다. 더구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는 신경병적인 괴로움을 받았으면서, 관능적인 정열과 신비로운 풍경을 조화시켜 보려고 무한히 애썼다.
그의 처녀작은 마들렌느를 크게 실망케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고답파 또는 상징파의 문인과 사귀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문인들이 이 작품을 묵살해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상징과 시인 말라르메를 사귀게 되어, 말라르메가 이끄는 <화요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당시 말라르메는 새로운 문학을 간절히 탐구하고 있었던 만큼, 청년 지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
지드는 이러한 자신의 상징주의 시대에, 즉1891년부터 97년 사이에 《나르시스론(Le Traite du Narcisse)》를 썼다. 《나르시스론》은 이 무렵 지드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눈으로 살필 수 있는 이른바 가시계에 매혹되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 지드는 현상을 통해 실존을 정열적으로 탐구하는 자신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렵에 지드는 그리스도교 문명이 휩쓴 세계, 즉 유럽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 아래 살아본다면 새로운 생명이 소생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퓨리탄의 도덕적인 구속에 지친 그는 그러한 생각에서 1893년 10월 친구인 뿔 아벨 로랑스와 함께 알제리를 향해서 여행을 떠났다. 사막, 낙타, 맹렬한 열기, 토인 소년 등등 이 모든 것이 욕망에 굶주렸던 지드의 욕정을 채워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여행 중에 병에 걸려서 정양을 하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는 1895년에 ≪팔뤼드(paludes)≫를 썼다. 이해 5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또한 그의 인생의 새로운 반려자로서 사촌누이인 두 살 손위의 마들렌느와 결혼했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어머니를 잃자, 그는 해방감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주를 잃은 것에 당황한 나머지, 어머니 대신으로 마들렌느에게 다시 구혼을 해서 이윽고 결혼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그의 특이한 양면성을 바탕 삼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양면성의 주인공은 한쪽의 극에 고정될 수는 없는 법이다. 시계추는 커다랗게 양쪽으로 진동하면서 움직였고, 그는 결혼을 하자 아내를 거느리고 다시 이교도의 터전인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무튼 그해에 발표된 ≪팔뤼드≫의 주인공은 모든 인간과 사건에서 떠나서 하루종일 연못가에서 벌레를 낚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주인공은 한결같은 넋두리를 한다.
"인생은 이다지도 창백하고, 권태롭고, 산문적이냐? 세계의 상태는 권태다. 탈출, 탈출만이 유일한 의무이다. 떠나가자! 어디든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눈뜰 줄 모르는 장님에게 비하면 어떠한 세계라도 가치가 있다."
이러한 권태감 속에서 그는 남부 이탈리아를 거쳐 아프리카 땅으로 갔다. 바로 그 여행에서 쓴 것이 《지상의 양식
"나따니엘아. 나의 노래를 부른 다음에는 모두 버려버려라. 지상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해야할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우리는 언제고 자유롭게 출발할 수 있는 마음만을 갖자. 지식이라는 것은 일체의 것을 메는 것이며, 특히 소유욕을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로 하자!"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땅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지드에게 어떠한 문학적 주제가 제시되었던가. 그는 자아의식에서가 아니라, 자아의 신앙을 노래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곧 《배덕자(L'lmmoraliste)》(1902)이다. 생명의 충실을 희구하여 도덕·인용·가정에 반역하고, 자아주의(自我主義)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주인공 미셸은 소생(蘇生)의 비방을 병든 아내에게 알려주려고 하지 않고, 순종만 하는 그녀를 작열하는 아프리카 땅으로 끌고 다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해방이며 자유였다는 말인가? 그의 마음의 고향은 아내로 화신한 유럽이 아니고, 정말 아프리카였다는 말인가? "여기서 끌어내 주게"하고 외치는 미셸은 아내의 죽음에 의해서 얻어진 자유에 결국 괴로워하는 것이다.
《지상의 양식》에서의 생의 찬가는 《배덕자》의 패배의 비탄으로 끝나고, 1903년에서부터 1908년경까지 지드에게는 슬럼프에 빠진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리나 마침내 1909년, 지드가 슬럼프에 벗어나는 새로운 전기가 이룩되었다. 즉 그는 그 해에 《좁은 문(La Porte etroite)》을 발표해서 지금까지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좁은 문》은 《배덕자》의 음화(陰畵)이다. 여주인공 알리사는 미셸과는 반대로 청교도적 신비주의를 신봉하고 자기희생의 계율 속에 살려고 한다. 그녀는 제롬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고 신의 사랑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신마저 잃게 되는 위기에 이르러 자연으로부터 복수당하고 만다. 여기에도 패배가 있다. 즉 지드는 제롬도 알리사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작품의 배후로 후퇴해서 문제의 행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대가 큰 변동을 일으킨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이 해에 《교황청의 지하도(Les Caves du Vaticon)》가 출간되어 지드는 새로운 국면을 타개했다. 이 새로운 작품은 지드의 비극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즉, 만약 인간에게 순수한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도덕에도 구속되지 않는 무동기의 무상의 행위리라. 라프까디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메데를 기차 밖으로 밀어뜨려 죽이듯이, 마침내 지드는 온갖 도덕적 구속을 깨뜨리고 만 것이다. 말기 증세를 보이고 있던 19세기적 합리주의에 이 작품은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으며, 이윽고 세계대전 후 문학의 복음서가 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1919년에 《전원교향악(La Symphonie pastorale)》과 1926년에 그의 자서전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을 발표한 뒤, 1926년에 그가 말하는 로망(소설)을 묘사하기에 이른다. 주관이라는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종래의 작품에서 그는 현실의 객관적인 인식으로 옮겨 보려는 시도로서 자기 스스로 <로망>이라고 정의한 작품 《사전꾼들(Les Faux Monnayeurs)》를 출판한다. 이 작품은 당연한 것이지만, 19세기의 사실주의 소설처럼 단선적이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인물과 인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 이야기의 줄거리는 무한히 늘어나가고, 확산되어 작품의 양상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을 통해서 지드는 유한한 개체를 전체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윤리적인 간접적 표명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사전꾼들》을 탈고하여 이듬해에 출판했는데, 그는 1925년, 탈고하자 곧 콩코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처럼 자연의 미에 도취하거나 하지 않고, 식민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에 희생되고 있는 원주민들의 상태를 보고, 그것을 크게 사회문제화시켰다. 그러기에 그가 쓴 《콩고 기행(Voyage au Congo)》이 큰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니 그것은 1927년의 일이었다.
1936년 6월에 지드는 병상의 고리끼를 문병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갔고 돌아온 뒤에는 곧 《소련 기행》을 발표했다. 이것은 지드의 소련에 대한 비판으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지드를 격심하게 비난하는 반대문을 실었다.
그의 나이 69세 되는 1938년, 마늘렌느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머지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찌 독일에 의해 파리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는 남프랑스 깐느 근처의 한 촌락에 한때 숨어 살다가 1942년 5월에 마르세이유에서 북아프리카로 떠나갔다. 그는 그러한 피난생활 속에서 분노와 슬픔의 나날을 보냈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파리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귀환했을 때는 이미 그는 74세의 고령으로서 그의 시대는 끝나 있었으며, 그의 가까운 벗인 폴 발레리도 그 해에 그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나는 지상의 좋은 것을 다 맛보았다. 내 다음 세대가 나의 덕분에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고 보다 훌륭하고 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내 마음은 아늑해진다. 미래의 인류의 복지를 위해 나는 나의 일을 하였다. 나는 나의 생애를 다했다."
이렇게 지드는 1946년에 간행한 희곡 《테제(Thesee)》에서 유언이 될 만한 말을 했다.
1947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노벨문학상이 그의 전작품에 대해 수여되었다. 그러나 만년이 되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집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6일 전까지도 《아멘(Amen)》이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로 노익장이었다. 드디어 1951년 2월 19일에 그는 파리의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의 숨결을 이 세상에 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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