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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유감(臨津有感)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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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유감(臨津有感)

 

 

 

가을 바람 산들산들 강물은 넘실넘실

고개 돌려 하늘 보니 생각 아득하여라.

쓸쓸하다, 나의 임 멀리 떨어졌으니

강가의 난초는 누구 위한 향기뇨.

요점 정리

 

지은이 : 김부식(金富軾)

갈래 : 한시. 칠언절구

성격 : 낭만적. 애상적

어조 : 삶에 대한 달관(達觀)과 긍정의 목소리

제재 : 가을날의 외로움

주제 : 가을날 강가에서 느끼는 외로움

내용 연구

넘실넘실 : 호수나 큰 강물이 넘칠 듯이 가득한 모양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강가에서 가을날의 외로움을 노래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이다. 가을날 느끼는 애상적 정조를 바탕으로 임과 헤어진 외로운 심정을 읊고 있다. 1구와 4구에 강가의 정경을 제시하고, 2구와 3구에서 화자의 심경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특수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유교 문화적 요소 속에서 허용되는 의례적이고 관용인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심화 자료

김부식

 

1075(문종 29)∼1151(의종 5).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문학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미상,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계의 후예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은 태조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 때부터였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가 되었으나 중견 관료인 예부시랑 좌간의대부에 이르러 젊은 나이에 죽었다.

김부식은 13,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를 포함해 4형제의 이름은 송나라 문호인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의 4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해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여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매년 정기적으로 임금이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부식과 둘째형 부일(富佾), 동생 부철(富轍, 뒤에 富儀로 개명함)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고,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어머니는 아들들이 임금의 은총을 받아 이미 녹을 받고 있음도 감사한데 그 위에 포상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해 받지 않았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해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추밀원 승선 위계정(魏繼廷)의 천거로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 예종·인종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였다.

1116년(예종 11) 7월에 문한관으로써 추밀원 지주사(知奏事) 이자량(李資諒)을 따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6개월간 송나라 휘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오는 길에 사마광의 자치통감 한 질을 가지고 왔다.

인종이 1122년 즉위하자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은 한안인(韓安仁) 일파를 제거한 후 정권을 잡고 국왕의 외조로써 국왕에게 칭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처와 집안 행사에 궁중의 음악을 사용하려 하였다. 그 때마다 중국고사의 예를 들어 부당함을 논해 이를 저지시켰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 추밀원부사에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때에는 침묵을 지킨 듯하다. 이듬해 송나라에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러 갔으나 금나라 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남천을 하였으므로 수도에 가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사신 파견의 목적은 송나라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수의 목적이 곁들여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가 정계에서 축출되자 이로 말미암아 승진이 용이해져 1130년(인종 8) 12월에는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修國史)로 승진되어 재상직에 오른 후 다음해 9월에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1132년(인종 10)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하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자 묘청(妙淸) 일파가 서경천도설을 주장해 서경에 궁궐을 새로 짓고 왕이 자주 행차하였다. 그러나 개경 유신들의 반대에 부닥치어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 1월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 때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었는데,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그 진압을 담당하였다.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해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개경의 재상들과 부하 장군들이 그에게 조속한 반란진압을 독촉하고 건의하였으나, 완공책을 펴서 관군의 피해가 없이 이를 진압하였다.

묘청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조광은 묘청·유감 등의 목을 베어 윤첨으로 하여금 개경정부에 바쳤다. 이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그들을 관대하게 처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개경 재신들은 이를 듣지 않고 윤첨을 가두고 극형에 처하자 반군의 재결전이 시도되었다. 1년 2개월만에 반란군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개경에 돌아오기도 전에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에 승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上柱國太子太保)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서경에서 개선한 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때 자신의 막료로서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蓬)를 포상하지 않고, 도리어 탄핵해 양주방어사(梁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윤언이가 이전에 주장했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 묘청의 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경의 재신 중 그의 건의에 비협조적이었던 추밀원 부사 한유충(韓惟忠)을 좌천시켰다. 그러나 인종은 1140년(인종 18) 김부식 등 재신과 대간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 결과 윤언이·한유충이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적 보복을 염려해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 무렵 형제들도 죽었으며, 자신의 우익 세력이었던 정습명(鄭襲明)이 대간직에서 탄핵을 받아 퇴임하였으므로 그는 정치적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퇴임하자 동덕찬화(同德贊化)공신호를 가하여 주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은 그를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인종이 죽기 직전 인종 23년(1145)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해 바쳤다. ≪삼국사기≫의 편찬체재를 스스로 정하였고, 이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 정리시켰으며, 사론은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 ≪인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에 봉해졌다.

또한, 문학가인 그는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인 김황원(金黃元)과 이궤(李櫃)와 함께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으며, 많은 글이 ≪동문수 東文粹≫와 ≪동문선≫에 전하는데, 우리 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의 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을 만나보기도 하였고, 윤관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문이 잘못되었다고 문도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자 다시 지었다.

만년에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로 세워 불교수행을 닦기도 하였다. 의종이 자기의 아들 김돈중을 2등의 자리에서 장원 급제자로 고침에 동의하였고, 김돈중이 상장군 정중부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였다가 구타를 당하자 그 처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153년(의종 7)에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尹彦蓬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三國史記硏究(申瀅植, 一潮閣, 1981). 삼국사기 해제(鄭求福, 譯註三國史記 1-감교원문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7), 韓國中世史學史1(鄭求福, 集文堂, 1999), 金富軾(鄭求福, 한국사시민강좌 9, 一潮閣, 199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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