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by 송화은율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유득공
落日扶蘇數點烽 낙일부소수점봉
天寒白馬怒濤洶 천한백마노도흉
奈何不用成忠策 내하불용성충책
却恃江中護國龍 각시강중호국용
부소산 해 지자 봉화 오르고
찬 날씨 백마강 물결 드높네
성충의 계책 어찌 버려두고
도리어 호국의 용만 믿었나
요점 정리
지은이 : 유득공
주제 : 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질책
내용 연구
부소산(扶蘇山) :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산. 백마강 기슭에 있으며, 백제의 옛 궁터
영월대·낙화암·고란사·사비루(泗沘樓) 따위의 고적이 있다.
성충 : 백제의 충신 (? - 656)으로 일명 정충(淨忠). 의자왕(義慈王) 때 좌평(佐平)을 지내면서 왕이 주색에 바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국운을 염려하여 극간(極諫)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656년(의자왕 16) 옥중에서 외적의 침입을 예언하며 육로는 탄현(炭峴: 혹은 沈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 白江口)에서 적을 막으라는 유서를 의자왕에게 남기고 죽었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단군 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역대 왕조의 고도를 돌아보고 지난 날을 회고한 작품으로 백제의 옛도읍인 부여를 찾아가서 지은 시이다. 다른 회고시들과는 달리, 나라를 잃어 버린 슬픔을 안타까워 하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충신이었던 성충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어 역사적인 교훈을 찾게 하는 작품이다.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성충의 적극적인 방어 계책을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호국의 용만 의지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질책하고 있다.
이 장편의 회고시는 그가 연경에 출입할 때, 그곳 문사들의 호평을 입어 거기서 발간되기까지 했던 작품이다. 그의 지기인 이덕무는 그의 시를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심화 자료
유득공 (1749-1807)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4검서(檢書)의 한 사람으로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도 4가(家)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관 문화(文化). 자 혜풍(惠風)·혜보(惠甫). 호 영재(죡齋)·영암(죡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1779년(정조 3)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司오寺)주부 ·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 ·평양 ·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첫째, 시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s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둘째,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1777)이 있으니, 나중에 《병세집(竝世集)》(1796)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가 《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회회(回回)·안남(安南:베트남)·남장(南掌:라오스)·면전(緬甸:미얀마)·타이완 ·일본 ·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동아대백과사전)
용(龍)
상상의 동물 가운데 하나. 몸은 거대한 뱀과 비슷한데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지며 뿔은 사슴에, 귀는 소에 가깝다고 한다. 깊은 못이나 늪, 호수, 바다 등 물속에서 사는데 때로는 하늘로 올라가 풍운을 일으킨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서 천자에 견주며, 인도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 반드시 같이 다녀서 둘이 서로 떠나지 아니할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범 가는 데 바람 간다‧용 가는 데 구름 간다.용 가는 데 구름 간다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용 될 고기는 모이 철부터 안다 후에 훌륭하게 될 사람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다는 말.용 못 된 이무기 의리나 인정은 찾아볼 수 없고 심술만 남아 있어 남에게 손해만 입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용 못 된 이무기 방천 낸다 못된 사람은 못된 짓만 한다는 말.용의 알을 얻은 것 같다 아주 귀중한 보배를 얻은 것처럼 좋아서 아끼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용이 개천에 빠지면 모기붙이 새끼가 엉겨 붙는다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를 한다.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를 한다 아무리 좋은 처지에 있던 사람이라도 불행한 경우나 환경에 빠지게 되면 하찮은 사람에게서까지 모욕을 당하고 괄시를 받게 된다는 말. ≒용이 개천에 빠지면 모기붙이 새끼가 엉겨 붙는다.용이 물을 잃은 듯 용이 물을 잃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처지가 매우 궁박하여 살길이 끊어진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용이 여의주를 얻고 범이 바람을 탐과 같다 무슨 일이나 뜻한 바를 다 이루어, 두려운 것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용이 여의주를 얻으면 하늘로 올라가고야 만다 무엇이나 어떤 단계에 이르면 최종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용을 낳다 : 훌륭한 인물을 낳다. 우리 아들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대학 교수가 되다니, 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용을 낳았구먼.
용의 초리 : ①폭포에서 내리 쏟아지는 물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예전에, 처녀나 총각이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용(이) 되다 : 변변하지 못하던 것이 크게 좋아지다. 어렵게 살더니 자식 덕분에 용 됐구먼.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