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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壬辰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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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壬辰錄)

각설, 이때 조선 대왕께옵서 몽사(夢事)를 얻었으니, 어떠한 계집이 기장을 자루에 넣어 이고 완연히 들어와 내려놓거늘, 상이 놀라 깨달으시니 일장춘몽이라. 상이 제신을 불러 몽사를 설화하고 제신을 돌아보아 왈,

"경등은 이 몽사를 해득하라."

하시니, 영의정 최일령이 주 왈,

"신이 해득하오니, 가장 불길하여지이다."

하니 상이 가라사대

"길흉간에 설화하라."

하시니, 일령이 복지 주 왈,

"신이 잠간 해득하오니, 인 변에 벼화하고 그 애 계집여자 하였으니 이 글자는 왜(倭)지어메. 아마도 왜놈들이 들어올 듯하여이다."

하니, 상이 대로하사 꾸짖어 왈,

"시절이 태평하거늘, 경은 어찌 요망한 말을 하여 인심을 요란케 하고, 짐의 마음을 불안케 하느뇨. "

하시며

"일령을 원찬(遠竄)하라."

하시니, 일령이 복지 사죄 왈,

"소인이 지식이 없사와 요망한 말을 하였사오니, 그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오나 복원 폐하는 죄를 용서‥…"

하며 돈수애걸하니, 상이 대로하사 왈,

"잔말 말고 바삐 적소로 가라."

하시니, 일령이 할 일없어 적소로 가서 주야로 임군과 처자를 생각하고 탄식을 마치지 아니하더니, 이때는 임진년 춘삼월이라. 백화는 만발하고 방초는 요요한데 고향을 생각하고 마음이 산란하여 누각에 올라 산천을 구경하더니, 문득 광풍이 일어나며 삼척 돛대 단 배 천여 척이 해상에 떠 들어오거늘, 일령 대경하여 동래 부사를 불러 왈,

"적선이 들어오니, 그대는 바삐 군사를 거두어 도적을 막으라."

 

(중략)

이순신

이때 퇴재상 이순신이 이런 변고를 당할 줄 알고 거북배 수천 척을 물에 띄우고, 그 안에 수 만여 군사를 용납케 하고 배 위로 구녁을 무수히 뚫고 배안에서 밥을 지어 먹게 하고 연기는 배 입으로 나오게 하니, 완연한 큰 거북이 몸에서 떠 다니며 흡사한 안개를 토하게 하였거늘, 왜장 등이 바라보고 대경하여 활과 총으로 무수히 쏘니, 거북등에 살이 무수히 박혔으되, 안은 뚫지 못하는 지라.

(중략)

정출남

(중략)

이때 도적은 조선 왕이 피난한 줄 모르고 도성만 지키고 둘러싸고 크게 외어 왈,

"조선 왕은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는 소리 도성이 무너지는 듯하니, 성중에 있는 사람이야 그 아니 망극할까.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물끓듯하더니, 문득 남대문으로 오색 구름이 일어나며 일원(一員) 대장이 억만 대병을 거느리고 왜진을 헤쳐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며 청정을 불러 왈,

"우리 조선국 사직이 사백 년이 넉넉하거늘 너는 방자히 천운(天運)을 모르고 불쌍한 백성만 죽여 시절을 요란케 하느뇨? 바삐 물러가라. 나는 삼국 적 관운장이라."

하거늘, 청정이 대경하여 바라보니 일원 대장이 적토마를 타고 삼각수를 거느리고 봉의눈을 부릅뜨고 청룡도를 비껴들고 천병 만마를 거느리고 섰으니 완연한 관운장(關雲長)이라. 황급하여 말게 날려 평안도로 행하니라.

김덕령

이때 평안도 평강(平康 ; 사실은 평강은 강원도에 있음) 땅에 김덕령(원문에는 김덕양으로 표기됨)이라 하는 가람이 있으되, 연광(年光) 이십오 세요, 힘은 능히 천 근을 들고 일 두(斗) 밥을 먹고 둔갑 장신(遁甲藏身)은 삼국 적 제갈량(諸葛亮)에 더한다 하되, 시절이 태평하기로 농사를 일삼더니 기운이 불행하여 부친 상사를 당하매 애통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뜻밖에 왜적이 조선을 둘러싼단 말을 듣고 모친 앞에 나가 여짜오되,

 

"소자가 듣사오니 왜적이 가까이 왔다 하오니 복원 모친은 허락하옵소서. 부친 상복을 벗어 상문에 사르고 왜적을 쳐 물리치고 국가의 근심을 덜고, 시절이 태평하오면 소자의 일흠이 죽백(竹帛)에 올라 부모에 영화를 뵈옵고 복록(輻祿)을 받을 듯하오니, 모친은 허락하옵소서."

 

하되, 모친이 꾸짖어 왈,

 

"우리 집 사람은 너 하나뿐이라. 선영(先塋) 향화(香火)를 받들 것이거늘, 어찌 이런 말을 하느뇨? 옛날 명나라 호왕(胡王)이 둔갑을 이루어 소대성(蘇大成 ; 군담 소설 <소대성전>의 주인공)을 유인하여 강운동에 불을 질렀으되, 소대성을 잡지 못하고 도리어 대성의 칼을 면치 못하여 죽고, 초패왕(楚覇王 ; 항우)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로도 오강(五江)을 못 건너서 머리를 버혀 정장(亭長 ; 유방)을 주었으니, 너 무슨 재조로 왜적을 물리치리오. 속절없이 전장 백골이 될 것이니 이런 말 내지말고 농업이나 힘쓰라."

 

하니 덕령이 모친의 영을 거역치 못하여 탄식만 하더니, 도적이 가까이 왔단 말을 듣고 모친 모르게 상복을 벗어 상문에 걸고 집을 떠나 순식간에 왜진에 들어가니, 청정이 김덕령을 보고 놀래어 수문장을 불러 호령 왈,

"진문(陳門)을 허수히 하여 조선 사람을 들어오게 하느뇨?"

군중에 하령 왈,

"활과 총으로 쏘아 잡으라."

하니 활과 총이 비오듯 하거늘, 김덕령이 몸을 피하였다가 총과 화살이 그친 후에 다시 진중에 들어가 청정을 보고 불러 왈,

"나는 평안도 평강 땅에 사는 김덕령일러니, 네가 천운을 모르고 외람한 뜻을 가져 의기양양하기로 내 왔으니, 내 재조를 보라. 내일 오시(午時)에 내 수만 명 군사 머리에 백지 일 장씩을 붙일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문득 간데 없거늘, 청정이 괴이 여겨 제장에서 부분 왈,

"내일 총과 활을 많이 준비하였다가 사시(巳時) 말, 오시 초 되거든 짐승이라도 일시에 쏘아 죽이라."

하더니, 그 이튿날 사시 오시 초 녘 되어 사면에서 채색 구름이 일어나며 지척을 분별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더니, 이윽고 하늘이 청명하며 덕령이 들어와 청정을 불러 꾸짖어 왈,

"나의 재조를 보라."

하고 백지를 던지니 억만 군사 머리에 올라 감기거늘 억만 군사가 백화(百花)밭이 되었는지라.

청정이 그 재조를 보고 크게 질색하여 왈,

"내 제조를 팔 년을 공부하였으되 저러한 제조를 배우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리오. 아마 저 사람을 유인하여 선봉을 삼으며 염려없이 대사를 이루리라."

하고 자탄하더니, 덕령이 머리에 달린 백지를 일시에 걷어 치우고 청정을 불러 왈,

"나도 운수 불길하기로 재조만 뵈었으니 빨리 돌아가라. 만일 듣지 아니하면 부친 상옷을 상문에 사르고 너희를 한칼로 무찌를 것이니, 부디 잔명(殘命)을 보전하여 급히 돌아가라."

하고 간데 없거늘, 청정이 의심하여 급히 성중으로 돌아가니라.

각설, 이 때 전하께옵서 영의정 정현덕을 데리시고 평안도로 행하시더라. 이때 소서가 평양(平壤) 성중을 함몰시키고 근처에 온단말을 들으시고 평안도 토곡 성중에 유하시더니, 십구 세 된 아이가 있으되 천 근을 들고 재조와 용맹이 무궁하나 기개가 없기로 소서를 대적치 못하였더니, 일일은 한 양반이 들어와 그 아이를 보며 왈,

"네 기상을 보니 재조를 미간(眉間)에 나타낸지라. 군사를 거느려 도적을 멸하고 대공을 세움이 네 마음에 어떠하뇨?"

그 아이 생각하되,

'이 양반이 혹시 누구신가?'

하고 복지 주 왈,

"소신이 재조는 없사오나 국병(國柄)이 이러하온데 어찌 노약(老弱)한들 도적을 치지 아니하리까?"

하매, 전하 가라사대,

"네 성명은 뉘라 하느뇨?"

그 아이 주 왈,

"소신의 성은 김이요, 명은 고원이로소이다."

상이 즉시 편지를 써 주며 왈,

"내 말을 타고 곧 관에 가 부윤(府尹) 한성록을 주라."

하시되, 고원이 봉명(奉命)하고 곧 관에 가 부윤을 보고 편지를 드리니, 부윤이 대경황망(大慶遑忙)하여 즉시 떠나 평안도 토곡 성중으로 들어와 복지 사배하되, 상이 반기사 용안(龍顔)에 용루(龍淚)를 흘리시며 탄식하며 가라사대,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이 헤어 짓치니 선조 대왕의 종묘를 어찌 안보하리오. 평양으로 향하였으되, 소서자 평양 성중에 웅거(雄據)하였기로 이곳에 유한다."

하고 통곡하시더니, 한성록이 복지 주 왈,

"소신은 국변(國變)이 이러하였으되, 대왕께옵서 이리와 계신 줄 아지 못하옵고 태만히 있삽다가 조서(詔書)를 받자와 왔사오니, 신의 죄는 만사무석(萬死無惜)이로소이다. 복원 전하는 근심치 말으소서."

하되, 상이 눈물을 거두시고 한성록에게 장계하사,

"군가 모아 도적을 막으라."

하시더라

이때 조선의 삼백 육십 주에 삼백 주는 왜놈의 땅이 되고 육십 주만 남았으되, 함경도 천북 군사만 남았으니 길이 막혀 왕래치 못하고, 황해도 군사는 산곡으로 피난 하고 경기도 군사 팔십 명은 도성을 지키게 하고 다만 평인도 군사만 거두니 겨우 일만 명 일러라.

상이 가라사대,

"군사도 부족하거니와 장수도 없으니 도적을 어찌 막으리오?"

하시며 최일령을 생각하시며, 제신을 둘러보시고 탄식하더라.

각설, 이때 귀양 갔던 최일령이 동래 적소에서 생각하되,

'이제 왜적이 사방에 헤어졌으니 어찌 길을 통하며 왕명을 구하리오.'

하고 즉일 길을 떠나 몸을 감추어 경성으로 향할 새, 도적에게 잡힐까하여 낮이며 숨어가고 밤이며 행하여 십여 일만에 도성에 득달하니, 대왕은 피난하시고 장안에 들어선즉 장안이 적적하고 국궐(國闕)이 소슬하매, 문득 전하께옵서 복지 통곡하니, 상이 대경대희 하사 일령의 손을 잡으시고 눈물을 흘려 왈,

"짐이 경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환(患)을 아니 당할 것을 도시 짐이 불명하여 경을 원찬하였더니, 경은 옛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지금 짐을 찾아오니, 더욱 불인(不忍)하도다."

하시며,

"경은 연전사를 생각치 말고 선조 공 창건하신 나라를 위하여 도적 막을 모책(謀策)을 가르치라."

하시니 최일령이 복지 주 왈,

"본도에 김응서라 하는 사람이 있으되, 힘은 삼천 근을 들고 재조와 용맹은 삼국 적 조자룡을 압도한다 하오니, 급히 그 사람을 명초(命招)하여 도적을 막으소서."

하니 전하 기꺼하사 사신을 보내시더라.

김응서

각설, 이때 김응서는 본도에 있어 왜란을 당하여도 왕명이 없기로 사직을 받들지 못하여 탄식을 마지 않더니, 일일은 사신이 와서 왕명을 받자와 전하거늘, 김응서 즉시 갑주(甲胄)를 갖추고 천리 준총마를 달려 토곡성에 득달하여 전하께 뵈오니, 상이 대희하사 바라보니 눈은 소상강 물결 같고 신장은 팔 척이요, 황금 투구에 순금 갑을 입고 구십 근 장창을 좌수에 팔십 근 철추를 우수에 들었으니, 짐짓 영웅이라.

 

상이 만심 화이하사 또 대희하여 일령더러 왈,

"이제 명장을 얻었거니와 군사가 부족하니 어찌하리오?"

일령이 주 왈,

"조선 군사로서는 당치 못할 것이옵고 조선 장수 김응서는 왜적을 당치 못할 것이오니 복원 전하는 중국 청병을 보내옵소서."

상이 옳게 여겨서 청병 사신(使臣)을 택출하라 하실 즈음에 병조 판서 유성룡이 복지 주 왈,

"신이 청병 사신으로 가리이다."

하니 상이 대희(大喜)하사 즉시 유성룡으로 청병 사신을 정하여 보내더라.

일령이 응서더러 왈,

"왜적 소서가 평양 기생 월천을 첩으로 삼았다 하오니, 월천과 약속을 하면 소서를 죽이기는 그대 장중(掌中)에 있거니와, 연관정 높은 뜰에 방울로 진을 쳤으니 소리 막을 재조 있느뇨?"

응서 대 왈,

"방울 소리는 둔갑으로 막으려니와 월천과 약속할 묘책을 가르치소서."

일령 왈,

"당태(중국에서 나는 솜) 한 근과 독한 술 백여 병을 가지고 십오 장성을 넘어가서 당태로 방울 소리를 막은 후에 연관정에 들어가면 자시(子時)초가 되어 월천이 나올 것이니, 월천의 손을 잡고 입을 귀에 대고 일일이 약속을 단단히 정하고 술을 먹인 후에 장군이 조심하여 소서를 버히고 즉시 정하에 엎드려서 소서에게 죽기를 면하라." 하되, 응서 대답하고 당태 한 근과 독 한 술 백여 병을 가지고 평양 팔십 리를 진시 초에 떠나 유시 말에 득달하여 말을 문외에 매고 밤을 살펴보니 초경이 되었는지라.

 

몸을 날려 십오 장 성을 뛰어 넘어 가서 신장을 불러 당태를 주며 왈,

"방울 소리를 막으라."

하고 연관정에 들어가니 소서가 등촉을 밟히고 월펀을 데리고 노래도 부르며 이렇듯이 희롱하거늘, 응서 몸을 날려 감추고 월천이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자시 초는 하여 월천이 나오거늘 응서 월천의 손을 잡고 왈,

"너는 비록 기생이나 조선 국록을 먹고 왜놈을 섬겨 부부지례를 행하는가? 나는 왕명을 받자와 소서를 죽이러 왔으니 너의 뜻이 어떠하뇨?"

월천이 왈,

"소녀는 비록 계집이오며 소서의 첩이 되었사오나 장군같은 영웅을 만나지 못하여 주야로 원이 되옵더니, 명천이 감동하사 장군님을 만났사오니 어찌 반갑지 아니하리오. 장군님의 약속을 가르쳐 주옵소서."

응서 대희하여 독한 술병을 내오 주며 왈,

"이리이리 하라."

하고 소서의 거동을 낱낱이 물으니 월천이 대답하여 왈,

"소서가 반잠 들면 한 눈만 뜨고 잠이 다 들면 두 눈을 다 뜹니다."

하고 방으로 들어가 소서더러 말하여 왈,

"소녀의 오래비가 있삽더니, 지금 장군님을 뵈러 왔나이다. 문 밖에

있삽나이다."

소서가 반겨 왈,

"너의 오래비 왔다하니 나와 남매간이라 어찌 반갑지 아니하리오."

하되, 월천이 즉시 문밖에 나와 응서를 청하니, 응서 들어가 예필 좌정 후에 소서가 김응서의 상을 보고 대회 왈,

"재조 있고 여러 장수 죽일 재조 가졌으니 실로 영웅이로다. 그대가 나를 도우면 조선 장수 팔장을 버힌 후에 나는 청정의 부장이 되고 청정은 조선 왕 되고, 우리 둘이 대공을 이룬 후에 일등 공신이 되어 국록을 먹고 이름을 후세에 빛낼 것이니, 그대는 나를 도움이 어떠하뇨?"

응서 거짓 기꺼하며 허락하더라.

 

이때 월천이 주 왈,

"소녀의 오래비가 주효를 가지고 왔으니 장군님과 분배하여 잡수실까 바라나이다."

소서가 허락하여 왈,

"너의 오래비가 제 뉘를 위하여 주효를 가지고 왔다하니 더욱 반갑도다."

하며 잔 잡고,

"술 부어라."

하니 월천이 거동 보소. 홍상 치마 후리쳐 꿰고 술 부어 들어 두 손으로 한 잔 권코 두 잔 권코 일배 일배 부일배라. 한 병 술을 다먹으니 술이 대취하여 자리에 넘어지거늘, 응서가 월천을 데리고 문 외로 나와,

"다른 의심은 없느뇨?"

하니 월천 대 왈,

"다른 의심은 없사오니 급히 처치하옵소서."

응서 문을 열고 보니 소서가 눈을 부릅뜨고 이수(턱수염)를 거사리고 잠이 깊이 들었거늘, 응서 칼을 들고 칼춤 추며 들어가니, 소서의 칼 명천검 빛난 칼이 벽상에 걸렸다가 응서 들어옴을 보고 몸을 치려 하다가, 칼 임자가 잠이 깊이 들었기로 응서에게 월천이,

"입으로 침 세 번만 뱉고 달려들어 치소서."

하니 응서 그대로 시행하고 후리쳐 지니 소서의 머리 검광을 좇아 떨어지는지라. 응서 칼을 던지고 즉시 땅에 엎드려서 엿보더니, 문득 목 없는 소서가 일어나며 벽상에 걸린 칼을 들고 휘휘 두르며 한 번들어 연관정 대들보를 치고 넘어지거늘, 응서 그제야 소서의 목을 칼 끝에 꿰어 들고 월천을 옆에 끼고 십오 장 성을 넘어가 월천더러 왈,

"시운이 불행하여 너도 소서의 첩이 되었으나 잠시라도 부부지례는 일반이라. 너로 하여금 소서를 죽였으나 너를 살려 두면 나도 소서같이 환을 당하리라."

하고 마지못하여 월천의 머리를 버혀 가지고 통곡하며 토곡성에 득달하여 전하께 소서의 머리를 드린 후에 또 월천의 머리를 올리니, 상이 일변 대희 하시며 일변 애련히 여기사 응서의 손을 잡고 칭찬하여 가라사대,

"월천이 비록 미천한 계집이나 일단 충성만 생각하고 소서를 죽이고 또 저도 죽었으니 월천은 천추만대에 이름이 빛나리라."

하시더라.

 

각설, 이때 유성룡이 중국 청병 사신으로 들어가 황제께 뵈온대 황제문 왈,

"조선에 무슨 연고 있기로 짐의 나라에 들어왔느뇨?"

하시되 성룡이 복지 주 왈,

"소신 나라에 운수 불길하와 왜란을 당화와 종묘 사직이 조모에 위태하옵고 중지를 뺏기어 소신의 국왕이 평안도 토곡 성중으로 피난하옵고 적세가 위급하옵기에 들어왔나이다."

하고 패문을 올리거늘, 천자 보시고 대경하사 만조 제신을 모아 가라사대,

"조선 국왕이 왜란을 만나 구원병을 청하였으니 경 등의 뜻이 어떠하뇨?"

하신대, 좌승상 유필이 주 왈,

"하교 지당하오나 이때는 농절이오니 청병 보내기 불가하여이다."

하니 천자 혼자 임의로 결단치 못하여 허락지 아니하시거늘, 성룡이 그저 돌아와 그 연유를 상달하니 상이 일령을 불러 왈,

"청병 사신이 그냥 왔으니 어찌하리오?"

하시되, 일령이 주 왈,

"전하는 근심치 말으소서. 청병은 스스로 오리이다."

하니 상이 청병 오기만 기다리더라.

 

각설, 이때 왜장 평수길이 삼만 군졸을 거느려 경상 우도를 짓쳐 진주(원문에는 진주에 응거하였더니, 이때 본읍 기생 모란(이는 논개를 말함인 듯))이라 하는 기생 있으되, 한갓(단지) 충성만 생각하고 한 꾀를 내어, 왜장 평수길을 데리고 촉석루에 올라가 잔치를 배설하고 즐겨하니, 분분한 풍류 소리는 바람을 좇아 반공에 자자하고 불빛같은 홍상 치마는 누강에 비쳤는데 향기는 십 리에 진동하니, 왜장이 묘함을 탐하는 중에 술이 대취였는지라.

 

모란이 군졸없는 때를 승시하여 거문고를 놓고 섬섬옥수를 넌짓 들어 탁문군(한나라 때 여자로, 과부가 되었다가 사마상여와 다시 결혼함)의 봉이 황을 구하는 곡조를 타더니 춤추며 홍상 치마를 걷어쳐 안고 처량한 곡조와 슬픈 소리 부르니, 그 소리 처량하여 단산 불황이 우는 듯하더라. 모란이 한갓 충성만 생각하고 생사를 둘러보지 아니하고 일평생에 이름만 빛내고자 함을 뉘 알리오. 그 모란의 태도는 사람의 정신이 아득하고 간장이 녹는 듯 한지라.

 

평수길이 흥을 이기지 못하여 모란을 안고 칼춤 추며 즐길 즈음에 모란이 덥석 안고 촉석루 난간에 뚝 떨어져 만경창파 깊은 못에 속절없이 죽는지라. 왜장이 대경하여 즉시 평수길의 시체를 건지고 즉시 또 모란의 시체를 건져 놓고 군사를 몰아 즉시 청정의 진으로 가더라.

 

각설, 이때 대왕이 청병 오기만 기다리시더니, 진주 목사 장문이 왔거늘 즉시 개탄하니 하였으되, '퇴재상 이순신이 왜장을 대적할 새, 괴이한 묘책을 내어 한산도의 왜장을 무수히 죽이옵고 성공하여 돌아오다가 왜장 살에 맞아 죽삽고, 본읍의 모란이라 하는 기생이 있으되, 다만 충성만 생각하고 왜장을 데리고 촉석루에 올라 춤추다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사오니, 과연 이런 충성은 전고에 없을까 하낟이다.'

하였거늘, 상이 보시고 대경 칭찬 왈,

"시절이 태평하거든 순신은 충무공(원문에는 충렬공)을 봉하여 서원짓고 춘추로 제향을 받하고, 모란을 촉석루 앞에 비를 세워 충렬을 표하라,"

하시더라.

 

 

이여송

이때 대국 천자께옵서 청병 사신을 그냥 보내고 주야로 염려하시더라. 한날 밤에 동대(중국 태산의 딴 이름)에서 일원 대장이 내려와 탑전(임금의 자리 앞)에 복지 주 왈,

"형님은 어찌 청병을 보내지 아니하나이까?"

"그대가 귀신인가, 사람인가, 어찌 날더러 형님이라 하느뇨?"

장수 왈,

"소장은 삼국 적 관운장 이옵고, 형님은 유현덕이 환생하여 천자가 되고, 장비는 환생하여 조선 왕이 되고 소장은 미부인을 모시고 조조에게 갔삽다가 무죄한 사람을 죽이므로 환생치 못하옵고 조선 지경을 지키옵더니, 지금 왜적이 조선을 덮어 거의 땅을 다 뺏기옵고 종묘사직 조모간에 망케 되옵고 조선왕 명이시각에 있삽거늘, 형님은 어찌 청병을 아니 보내시니이까?" 천자 그 말을 들으시고 마음이 비창하여 대경통곡하시고 그 장수를 살펴보니 신자은 구척이요, 손에 청룡도를 비껴 들고 봉의눈을 부릅뜨고 삼각수를 거느리고 왔으니, 분명한 운장일러라. 천자 용상에 내려와 재배 왈,

"장군은 누구를 보내라 하시나이까?"

운장이 왈,

"청병은 팔십 만만 보내고 장수는 당나라 이여송을 보내시면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하고 오리이다."

뜰 아래 내려서 왈,

"형님이 내 말을 아니 들으면 무사치 못하리이다."

하고 문득 간데 없거늘, 천자 대경하여 공중을 향하여 재배하고 이튿날 조회에 백관 모아 의논 왈,

"짐이 간밤에 일몽을 얻으니, 조선 관운장이 와서 여차여차 하고 저리저리하고 청병을 보내라 하기로 청병은 못 보낸다 하였으나 제경들의 뜻이 어떠하뇨?"

제신이 주 왈,

"운장은 본디 충절이 이시는 장수오니 지휘대로 하옵소서."

천자 즉시 조서를 하여 익중에 내리사,

"군사 팔십 만 명을 거두라."

하시고 당나라 이여송을 명초하사 왈,

"짐이 경의 재조를 아는지라, 조선에 나가 왜놈을 물리치고 공을 세워 이름을 빛내고 들어오면 이름을 죽백에 올려 대국의 일등 공신이 되리라."

하시되 이여송이 복지 주 왈,

"소신이 재조 없사오나 동국(조선)에 나가 왜적을 함몰시키고 들어오리이다."

천자 대희하사 대원수에 대장절월(특별히 임명하는 자에게 지방 관리가 부임할 때 왕이 내주던 절과 부월)을 주더라.

이여송이 하직 숙배하고 행할 새 만조 백관이 사십 리에 나와 전송 왈,

"장군이 만리 밖의 동국에 나가 대공을 세우고 들어오면 그 공을 치사 하리이다."

하니 이여송이 왈,

"조고마한 왜놈을 어찌 근심하리오."

하고 익주로 행하여 팔십만 대병을 거느려 제장을 불러 소임을 맡길 새, 그 아우 이여백으로 선봉을 삼고 이여월(이여오인듯)로 후군장을 삼고, 호령하여 왈,

"만일 군중에 태만한 자 있으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하고 처리 준총마를 타고, 머리에는 구룡군관이요, 몸에는 홍황단 전복이요, 우수에 팔각도를 들고 좌수에는 우모 단수기(새깃으로 짠 기)를 들었으니 황금 대자로 썻으되, '대사마 대장군 당나라 이여송'이라 하였더라.

즉시 발행하여 조선으로 향하니 기치창검은 일월을 가리웠고 고각함성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하여, 물결은 출렁출렁 압록강 건너와서 탐지를 보내니, 조선 왕이 제신을 거느려 백리밖에 나와 맞을 새, 상이 두 번 절하고 좌정 후 가라사대,

"장군님이 황상의 명을 받자와 원로에 수고를 하시니 과인의 마음이 불안하여이다."

하시니 이여송이 두 번 절하고 가로되,

"대왕은 뜻밖에 왜난을 당하오니 오죽 근심하시리까. 황상의 명을 받자와 왔사오되 대왕을 보오니 대왕의 지성이 없사오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도웁지 못하고 그저 돌아가겠나이다."

하거늘 상이 근심하사 일령더러 이여송의 하던 말을 낱낱이 이르시니, 일령이 주 왈,

"전하는 근심치 말으소서. 당장 있는 뒤에 칠성단을 모시고 독을 머리에 쓰고 축문을 읽으시고 우시면 당장이 듣고 용서할 도리가 있사오니 그대로 하사이다."

상이 즉시 영을 나려,

"단을 모으라."

하시고 단에 올라 독을 쓰고 슬피 통곡하시니, 이여송이 듣고 문왈,

"우는 소리 어디서 나느뇨?"

 

군사 고하되,

"조선 왕이 이장군님이 그저 회군사신단 말을 들으시고 우시나이다."

하거늘 이여송이 탄식하여 왈,

"슬프다. 상을 보니 왕후의 기상이 이니옵더니, 울음 소리를 들으니 용의 울음 소리 분명하도다. 사백 년 사직이 넉넉하다,"

하고 즉시 제장을 불러 소임을 맡길 새, 조선 장수 구름 모이듯 하더라.

평안도 평강 땅에 사는 김응서와 전라도 전주 사는 강홍엽, 황해도 사는 김승태와 함경도 사는 유홍수, 강원도 사는 백철남과 경기도 사는 문두황, 이 여러 사람들이.......범 같은 장수라, 각각 갑주를 같추고 이여송을 뵈온대 이여송이 보시고 칭

찬 왈,

"조선 같은 편소지국에 저러한 영웅호걸이 많거든 어찌 요란치 아니하리오."

하고 그 중에 재조를 보려하고 높은 깃대 끝에 황금 일만 냥을 달고 일러 왈,

"제장 중에 저기 달리 황금을 떼어 오는 자 있으면 선봉을 삼으리라."

하니 제장이 영을 듣고 한 장수 내달아 춤추며 몸을 날려 솟구어 황금을 철추로 치니 황금이 떨어지는지라 또 한 장수 내달아 몸을 솟구어 남은 황금을 떼어 가지고 들어왔거늘, 이여송이 문 왈,

"그대는 성명을 뉘라 하느뇨? 또 먼저 뗀 장수도 뉘라 하느뇨?"

 

장졸이 대 왈,

"먼저 장수는 김응서요, 두 번째 뗀 장수는 강홍엽이로소이다.

하니 응서로 선봉을 삼고 홍엽으로 후선봉을 삼고, 유홍수로 좌익장을 삼고 백철남으로 우익장을 삼고, 김일관으로 군량장(軍糧將)을 삼고 그 남은 제장은 다 후군장을 삼을 새, 제장이 군사를 몰아 강원도 왜당 청정의 진으로 행하니라. 이때 대왕께옵서 유성룡을 불러 가라사대,

"조선 군사와 대국 군사의 군량장을 맡아 수운하라."

하시더라.

 

각설, 이때 이여송이 왈,

"좋은 술 천 독만 내일 식전에 대령하라."

하니 응서 대답하고 나와 군중에 전령하되, 땅 밑을 깊이 파고 술 천 독을 묻고 그 위에 백탄 숯을 피워 밤새 그렇게 하고 그 이튿날 술 천 독을 대령하니, 이여송이 보고 칭찬 왈,

"조선에도 명인이 있도다."

하고 또 분부하여 왈,

"내일 조시(潮時)에 용탕(龍湯)을 대령하라."

하니 응서 능히 대답하고 나와 서천(西天)을 바라보고 슬피 우니 어떠한 용이 시냇가에 죽었거늘 즉시 용탕을 지어 올리니, 이여송이 또 가로되,

"소상반죽(瀟湘斑竹 : 중국 소상 지방에서 나는 아롱진 무늬가 있는 대) 젓갈을 들이라."

하니 응서 능히 대답하고 나와 전하께 상달하니 상이 가라사대,

"그 전 선조 시에 신하 어떠한 양반이 일후에 써 먹을 일이 있다 하고 전하여 온 것이 있으니 급히 가져가라."

하시되 응서 반겨 듣고 젓갈을 갖다 올리니, 이여송이 칭찬 왈,

"천재로다, 천재로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없도다."

하고 또 분부왈,

"내일 조시 초에 백마(白馬) 백 필을 대령하라."

하니 응서 능히 대답하고 군중에 전령하되,

"분칠도 하고 흰 가루칠도 하여 백마 백필을 대령하라."

하니 이여송이 대소(大笑) 왈,

"임시 체면이라도 저렇듯 하니 어찌 그대의 재조 없으리오."

하고 인하여 유성룡으로 군량장을 삼아 군량 수운하게 하고 청정의 진으로 향하더라.

이때 청정이 강원도 원주 성중에 웅거하였더니 군사가 고하되,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려 오고 있습니다."

하거늘 청정이 대경하여 각 도에 헤어진 장졸을 거두니 명장이 팔 백여요, 정병이 십만여 명이라. 청정이 북을 울리며 방포 일성에 팔만 군사 진을 치는지라.

 

이여송이 원주에 득달하여 적진을 살펴보니, 전세를 가리 알더라. 이여송이 북을 치며 싸움을 돋우니 적진에서 한 장수 내달아 외어 왈,

"당장(唐將) 이여송은 들으라. 우리 대왕께옵서 조선을 거의 다 얻었거늘, 너는 무삼 재조 있건데 망케된 조선을 구하고자 하여 우리를 치려 하느냐, 네 진중에 내 적수 있거든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하거늘 선봉 김응서 병창 출마하여 크게 외어 왈,

"우리 진중에 영웅호걸이 구름 모이듯 하였거늘, 너는 어찌 죽기를 재촉하는가?"

하고 싸워 삼십여 합에 이르러 응서의 칼이 번뜻하며 왜장 마원태(馬元台)의 머리 땅에 떨어지는 지라. 응서가 칼 끝에 꿰어 들고 좌충우돌하니 적진에서 마원태 죽음을 보고 번개같이 날랜 오장(五蔣)이 내달아 외어 왈,

"조선 장수 김응서는 어찌 우리 장수를 죽이는가?"

하며 천둥같이 달려오거늘, 응서 말 머리를 돌려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며 한칼로 오장을 대적하여 십여 합에 이르러 기운이 쇠진하여 본진으로 돌아오고자 하더니, 이때 청정이 오장이 응서를 잡지 못함을 보고 분기충천하여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방포 소리나며 방패를 같고 명천검을 들어 응서의 말 머리를 깨치니 말이 엎드려지는지라, 응서의 급함이 경각에 있는지라.

 

이여송이 보고 대경하여 당장 삼 인을 명하여 응서를 급히 구하니 응서 본진으로 와 이 여송께 치하하여 왈,

"장군의 명 곧 아니면 어찌 소장의 잔 명을 보전하였으리이까?"

하고 이여송의 말을 얻어 타고 급히 들어가 싸우니, 당장(唐蔣)은 구인이요, 왜장(倭將)은 오 인이라. 양진의 고각 함성은 천지 진동하고 분분한 칼빛은 하늘에 덮었는지라. 산중 맹호가 밥을 다투는 듯하고 벽해수(碧海水) 잠긴 용이 구비를 치는 듯한지라.

 

십여 합에 이르러 적장의 칼이 번뜻하며 당장 이여월의 머리가 떨어지고, 선장 강홍엽의 칼이 번뜩하며 왜장 한업(韓業)의 머리 떨어지고, 김승태의 칼이 번뜻하며 왜장 문경의 머리 떨어지니, 청정이 오장의 죽음을 보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며 말게 올라 나는 듯이 내달아 우레같이 소리를 질러 왈,

"당장은 무삼 일로 나의 아장(亞將)을 다 죽였는가?"

하며 달려들거늘, 바라보니 신장이 구 척이요, 일백 근 투구를 쓰고 몸에 구리 갑을 입고 우수에 일백 근 철추를 들고 좌수에 일백 근 명천검을 들고, 한 자 입을 벌리고 달려들어 삼십합에 청정의 칼이 번뜻하며 태경의 머리 떨어지거늘,

이여송이 당장의 죽음을 보고 병창 출마하여 왈,

"적장 청정은 어찌 나의 아장을 죽였는가? 너의 근본을 들으라. 너희 놈이 옛날 진시황을 속이고 동남(童男) 동녀(童女) 오백 인을 거느리고 들어가 나오지 아니하여 씨를 퍼뜨려 자칭 황제라 하고 강폭(江暴)만 믿고 조선국 같은 예의지국을 침범하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너는 나를 당치 못하거든 내 칼을 받으라."

하는 소리 천지가 진동하더라.

 

청정이 듣고 대로하여 왈,

"조선을 거의 다 얻었거늘, 너는 청병으로 와서 어찌 나를 당하리오."

하고 명천검으로 이여송을 대적코자 하니, 고각 함성은 천지 진동하여 천붕지탁하는 듯하여, 십여 합에 승부를 결단치 못하고 청정이 기운이 진하여 말 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들어가거늘, 명장 칠인이 합세하여 청정을 쫓아가며 호통하는 중에, 청정이 전면을 바라보니 억만 대병이 내달아 길을 막으며 일원 대장이 외어 왈,

"망발생의(妄發生意), 어찌 천신(天神)인들 무심하랴. 청정은 닫지 말고 내 칼을 받으라."

하거늘 청정이 눈을 들어보니 일전 보던 바 관운장이라.

 

대경하여 운장과 더불어 십여 합에 기운이 쇠진하여 칼빛이 점점 둔한지라. 명장 칠인이 달려들어 싸우니, 청정은 그물에 든 고기요, 쏘아 놓은 범이라. 이여송의 칼이 공중에 번개되어 운무(雲舞) 중에 빛나더니, 청정의 머리 검광을 좇아 떨어지는지라. 슬프다, 청정의 용맹이 속절없이 죽으니, 천신도 애닮도다. 응서 달려들어 칼끝에 꿰어 들고 본진으로 들어와 춤추며 이여송에게 치하하여 왈,

"장군의 용맹은 왜국에 진동하고 천추에 유전(流轉)하리이다."

하더라.

 

 

각설, 이때 전라도 갔던 동철이 일시에 진을 파하고 청정의 진에 합세코자 하다가, 청정이 죽었단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일시에 달려들어 외어 왈,

“당장 이여송과 조선 장수 김응서와 강홍엽은 어찌 우리 대장을 죽였는가? 우리 등이 네 머리를 버혀 우리 대왕께 원수를 갚으리라. 닫지 말고 내 칼을 받으라.”

하니 이여송이 듣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칼을 들고 내닫고자 하거늘, 김응서와 강홍엽이 만류 왈,

“장군은 노함을 참으소서. 소장 등이 나가 왜장을 버혀 장군의 노함을 풀리라.”

하고 일시에 병창 출마하여 벽력같이 외어 왈,

“너는 김응서와 강홍엽을 아는가, 모르는가? 두렵지 아니하면 빨리나와 우리 칼을 받으라.”

하되, 왜장이 일시에 달려들어 십이 합에 응서의 칼이 반공 중에 번개되어 마웅태를 치니 그 머리 땅에 떨어지니, 문경이 대경하여 크게 외어 왈,

“적장은 어찌 우리 장수를 해하는가? 내 명심코 너를 죽여 우리 장수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십여 합에 거짓 패하여 응서와 홉엽이 본진으로 향하니, 문경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크게 외어 왈,

“너는 잔말 말고 내 칼을 받으라.”

하고 급히 쫓아오거늘, 응서와 홍엽이 본진에 들어와 방포 일서에 삼겹 오행진을 굳게 치니 나는 제비라도 벗어날 길이 없었는지라.

왜장 문경이 진중에 들어와 벗어날 길이 없어 하릴없이 주저하거늘, 응서 달려들어 문경의 말 머리를 깨치니 말이 엎드러지거늘, 문경을 사로잡아 장대 아래 앉히고…죄 왈,

“네가 감히 예의지국을 침범하느뇨?”

하되 문경이 살기를 원하여 항복 애걸하거늘 이여송이 호령하여 왈,

“네놈 천륜을 모르고 외람한 뜻을 두어 조선같은 예의지국을 침범하는가? 조선에 영웅호걸이 구름 모이듯 하여 너의 대장 청정과 소서, 평수길도 우리 칼에 혼백이 되었거든 너희놈은 방자하여 범람한 뜻을 두니 두렵지 아니하냐? 그럴수록 방자하여 감히 내 진중에 들어 왔는가? 이제 너희를 버힐 것이로되 이미 항복하기로 그냥 놓아 보내니 빨리 돌아가 차후는 다시 외람된 뜻을 두지 말라.”

하고 보내더라.

 

차설, 진을 파하매 왜인이 주검이 태산같고 피 흘러 강수되었더라.

이여송이 칭찬 왈,

“조선 대왕이 벌써 저러한 영웅을 두었도다.”

하고 탄식하더라.

각설, 이때 대왕이 전장 소식을 고대하던 차에 날로 기다리더니 승전 패문을 보시고 불승환희 하사 최일령을 불러 왈,

“군량이 진하여지니 어찌하리오.”

일령이 주 왈,

“신이 듣사오니 평안도 삭주 땅에 사는 김수업이라 하는 부자가 있으되, 곡식이 이십육만 석이 있다 하오니 수업을 명초하사 군량을 당케 하옵소서.”

하되 상이 수업을 패초하시되, 수업이 명을 받자와 복지 사배하니 상이 가라사대,

“군량이 진하였으니 너의 곡식을 취하여 쓰고 시절이 태평하거든 갚고자 하노라.”

하시되 수업이 주 왈,

“소신의 곡식이 전하의 곡식이오니 쓰실 대로 쓰기를 바라나이다.”

하거늘, 상이 즉시 수업으로 군량장을 삼아 군량을 수운하게 하고 단을 모으고 백리 외에 나와 이여송을 맞을 새, 이여송이 군사를 거두어 회군하고 중국의 군사를 점고하니, 삼십만 대병이 다 죽고 장수 백여 원이 또 죽었는지라. 이여송이 탄식하여 왈,

“부모처자, 일가친척 다 버리고 만리 타국에 나와 전장 고혼이 되었으니 가련하고 불쌍하다.”

하고 즉시 밥을 지어 모든 귀신을…할 새,

이때는 정유년 삼월이라. 이여송의 철비를 세워 천추에 유전케 하고, 홍비단 백필로 승전기를 만들어 세우고 승전고를 울리며 토곡성에 들어와 전하께 뵈오되, 전하 대희하사 대연을 배설하고 즐기실 새, 이때 친히 잔을 잡아 이여송에게 권하시니 이여송이 부복 칭찬하더라. 인하여 잔치를 파하고 이여송이 이여백으로 중군장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 읍으로 다니며 명산 대천 혈맥을 다 자르고,

“조선같은 편소지국에 영웅호걸이 많은 탓이라.”

하더라

김덕령

이때 대왕이 제신과 군사를 거느려 태평곡을 울리며 환궁하시고 문무 제신을 차례로 봉하실 새, 최일령으로 태부를 삼으시고 강홍엽으로 선봉을 삼으시고, 유성룡으로 우의정을 삼으시고 유홍수로 좌의금을 삼으시고, 문두황으로 부원수를 삼으시고 정태경으로 좌도령을 삼으시고, 한성록으로 판서를 삼으시고 김칠원으로 어영 대장을 삼으시고, 그 남은 제장은 각 도 각 읍의 방백·수령을 봉하시고 백성 조세를 삼 년을 탕감하시고 각 도에 학업과 검술을 숭상하니, 세화연풍하고 노소 백성이 처처에 격양가라. 인인 순시라. 정출남으로 충렬공을 삼으시고 서원을 사역하사 춘추로 제향을 받게 하시니라.

각설, 이때 무술년이라. 김덕령의 소문을 들으시고 금부 도사를 명령하여,

“덕령을 잡아 올리라.”

하시니 도사 수명하고 내려가 덕령을 보고 왕명을 전하니, 덕령이 보고 대경하여 모친께 들어가 그 연유를 고하니 그 모자지생의 거슬음을 어찌 다 측량하리오. 인하여 덕령이 하직하고 나오니 도사 철망으로 씌워 갈 새, 철원 땅에 이르러서 덕령이 도사더러 왈,

“여기 친한 사람이 있으니 잠깐 놓아주면 가서 보고감이 어떠하뇨?”

도사 왈,

“공에 사정이 없으니 어찌 잠시인들 놓아 보내리오.”

하거늘 덕령이 꾸짖어 왈,

“아무리 왕명이 지엄하신들 잠깐 사정이야 없으리오.”

하며 몸을 요동하니 철망이 썩은 새끼 떨어지듯 하거늘, 칼을 들고 공중에 솟아 십여 장이나 넘는 나무 끝을 번개같이 다니며 나무를 무수히 작벌하니, 도사가 아무 말도 못하고 구경만 할 뿐일러라.

문득 공중으로서 한 사람이 날알 와 덕령의 손을 잡고 왈,

"내 아니 그렇다더냐. ……환을 당하였으니, 바삐 가 천명을 순수하라. 뉘를 원망하며 뉘를 한하리오. 이제 운수 불길하여 이런 환을 당하였으니, 나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리라. 내 그대를 위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잤더니 성공치 못하고 비명에 죽게 되니, 내 마음이 도리어 슬프도다."

하고 간데 없거늘, 덕령이 도로 철망을 쓰고 전하께 뵈오매, 상이 가라사대

 

(중략)

김응서·강홍엽

(중략)

 

들어간들 불충(不忠)지죄를 어찌 면하리오."

하고,

"홍엽을 버힌 후에 후사를 보리라."

하고,

"만리 타국에 와서 죽으니 천지도 무심하다. 지하에 들어가서 우리 전하께 뵈옵고 설원하리라."

하고, 칼을 들어 홍엽을 치니 머리 땅에 떨어지는지라.

응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왈,

"명천은 살피소서. 조선 장구 김응서는 대왕의 명을 받자와 만리 타국에 와서 성공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사오니 명천은 살피소서."

하며 무수히 통곡하다가 제 칼로 목을 버히니, 응서의 말이 제 장수 죽음을 보고 달려들어 머리를 물고 비룡 같이 천리 해고를 건너와서 평양을 발보고 살같이 가는지라.

각설, 이때 응서의 부인이 낭군을 만리 타국에 보낸 지 이미 삼 년이 되도록 소식을 몰라 주야로 바라던 차에 문 밖에 난데없는 말방울 소리나거늘, 반겨 나가 보니 낭군의 말이 왔거늘 고삐를 잡고 보니...... 낭군은 어데가고 머리만 물고 왔느냐? 부인이 대경하여 왈,

"말은 비록 짐승이로되 만리 타국에서 집을 찾아왔거니와 낭군은 오시지 않고 어찌하여 머리만 왔는고!"

하며 슬피 통곡하니, 노소없이 뉘 아니 슬퍼하며 금수도 슬퍼하며 산천초목이라도 다 슬퍼하는 듯하더라.

부인이 낭군을 생각하며 슬피 통곡하다가 기절하더니, 양구(조금 있다가)에 정신을 진정하여 낭군의 머리를 옥함에 넣어 말 태우고 눈물을 흘리며 경성으로 올라갈 새 무지한 말이라도 눈물이 흐르고 몸에 땀이 나는지라. 말을 대궐 앞에 매고 탑전에 들어가 복지 주 왈,

"소녀의 지아비 머리를 말이 물고 왔사오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고 통곡하거늘, 전하 대경하사 옥함을 열고 보시고 용안에 용류를 흘리시며 축지어 제사할 새, 축문에 하였으되,

'유세차 모월 모일에 조선 국왕은 감소고우(감히 밝혀 알리건대) 경의 충성은 하늘이 도우신 충신이라. 김응서가 만리 타국에 들어간 지 삼 년이 되도록 소식이 돈절하매 때로 오기를 바라더니, 과인의 덕이 적어 만리 타국에 가 원혼이 되어 왔으니, 지하에 들어간들 어찌 경의 충성을 갚지 아니하리오. 타국에서 죽은 원혼이라도 짐의 지성을 감동히 여기어......"

하시고 제사를 파한 후에,

"장군의 머리를 채단으로 염습하여 옥함에 넣고 확실 흠향하라. 이 연유로 각 도 각 읍에 행관하라."

하시고 부인에 직첩(사령서)을 주시니, 부인이 천은을 축수하고 행장을 수운하고 고향에 돌아가 예를 마친 후에 삼 삭만에 선산에 안장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라.

각설, 이때 상이 타국에 가 죽은 장수를 위로하여 경상도 대동 만 석을 허급하시고 또 각읍에 모든 소를 잡기를 신칙하더라. 이때 전하 한 몽사를 얻으시니, 김응서 복지 주 왈,

"소신이 힘을 다하여 왜왕의 머리를 버혀 전하께 드리옵고 국은을 만분지 일이나 갚고자 하였삽더니, 홍엽이 소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서 중로에 이십만 대병을 함몰하옵고 그 길로 왜국에 들어가 왜왕의 머리를 버혀 가지고 돌아올까 하였삽더니, 강홍엽의 부귀만 생각하고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왜왕과 친근하기로 홍엽을 죽이고 신은 자사 하였사오니, 그 죄 만사무석이오나 신이 비록 황천에 돌아간들 원혼이..... 되었사오나 어찌 전하를 돕지 아니하리이까. 복원 전하는 만세무양 하옵소서. 소신은 어찌 원한을 다 풀리이까."

하고 간데 없거늘, 전하 깨달으시고 몽중에 용서하는 말이 귀에 쟁쟁한지라. 제신을 모아 몽사를 설화하시고 응서 충절을 못내 칭찬하시더라.

사명당

각설, 이때는 경자년 삼월일러라. 평안도 안빈낙사에 서산 대사라 하는 중이 있으되, 육도삼략과 천문지리와 오행 술법을 무불통달하기로 산중에 처하여 세상풍진을 모르더니, 일일은 청천명월이 밝았는데 자연 탄식 왈,

"왜인이 임진년 원수를 갚고자 하니 이제 왜인이 조선을 침범하면 종묘사직이 위태하고 우리 불도도 위태하리라."

하고,

"내가 산중에 있으나, 조선 수토를 먹으니 어찌 조선을 돕지 아니하리오."

하고 즉시 가사를 착복하고 육환장을 짚고 경성에 올라가 좌승상을 보고 전하께 뵈옵기를 청하니, 승상이 그 연유를 물은 후에 탑전에 들어가 아뢰되 즉시 명초하시니, 대사가 관내에 들어가 복지하되, 상이 문 왈,

"무삼 연고로 짐을 보고자 하느뇨?"

하시니 대사 주 왈,

"소승은 평안도 안빈낙사에 있삽더니, 임진년에 대왕께옵서 왜난을 당하였으되 진작 나와 도웁지 못한 죄는 만사무석(萬死無惜)이로소이다."

하니 상이 가라사대,

"노승은 국가를 생각하니 가장 반갑도다. 그러나 무삼 일이 있느뇨?"

하시니 대사 주 왈,

"소승이 천기를 보오니 왜놈이 임진년 원수를 생각하고 조선을 침노하코자 하기로 올라와 이 사연을 상달코자 하여 불원천리 왔사옵고, 이제 김응서, 강홍엽은 다 죽삽고 다른 장수 없사오니 뉘라서 왜놈을 당하리이까. 이제 왜놈을 나오지 못하게 할 묘책이 있삽나이다."

상이 놀래어 가라사대,

"그러면 어찌하리오."

하시되, 대사 주 왈,

"소승의 상좌 사명당(원문에는 사명당으로 표기됨)이라 하는 중이 있으되, 육도삼략을 통달하옵고 팔만 대장경과 둔갑 장신지술이 능통하오니, 그 중을 명추하사 왜국에 사신을 보내옵소서."

하거늘, 상이 즉시 유성룡으로 하여금 명초하시니, 사명당이 봉명하고 경성에 득달하여 전하께 뵈오매, 상이 가라사대,

"대사의 말을 들으니 그대가 측량치 못하는 재조를 가졌다 하니, 한번 수고를 아끼지 말고 일본국에 들어가 항복받아 후환이 없게 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노라."

하시니, 사명당이 주 왈,

"소승이 비록 산중에 있으나, 조선 수토를 먹사오니 어찌 그만한 수고를 아끼리까."

하되, 상이 대희하사 사명당으로 봉명 사신을 정하시니 사명당이 전로에 노문 놓고 탑전에 하직 숙배하니, 비록 중이라도 사신의 위의를 갖추고, 행장을 수습하여 십여 일만에 경상도 동래에 득달하여 삼일을 유하되, 동래 부사 송경이 나와보지 않고 가로되,

"조선 사람이 허다하거늘, 하필 중놈을 보내는고."

하며 나와 보지 않거늘, 사명당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무사를 명하여,

"부사를 나입(잡아들임)하라."

하니 무사가 일시에 부사를 난입하니 사명당이 꾸짖어 월,

"명색이 비록 중이려니와 왕명을 받자와 사생을 생각지 않고 만리 타국에 들어 가거늘, 너는 왕명을 생각지 아니하고 중이리 쉬이 여겨, 너는 근본만 생각하고 대령치 아니하니 국가의 만고 역적이라, 어찌 죄를 용서하리요."

하고 무사를 명하여,

"급히 처참해라."

하고 동래 부사 죄를 징계하여 전하께 상달하고 행군하여 배를 타고 일본에 득달 하여 패문 보내니라

왜왕이 개탁하니 하였으되

"조선 사명당 생불이 들어온다,"

하였거늘 왜왕이 대경하여 제신을 모아 의논 왈,

"조선 같은 편소지국에 어찌 생불이 있으리오만 생불이라 하였으니 어찌 하리오?"

제신이 주 왈,

" 좋은 묘책이 있으니 심려치 마사이다."

하고

"삼백육십 간 병풍을 만들어 일만일천구 글을 지어 병풍에 써서 남대문 밖에 동편을 두르고 사신을 청하여 천리마를 급히 몰아 사처에 오거든 글을 외라 하여 만일 외우지 못하거든 죽이사이다."

하고 즉시 실시하여 삼백육십 간 병풍에 일만 일천 구 글을 써서 동편에 두르고 사신을 청하니 말을 타고 급히 몰아오니 조선 생불이란 말을 듣고 남녀노소 없이 구경하는 사람이 백 리에 연하였더라.

사처에 좌천한 후에 왜왕이 예필 후에 가로되

"사신이 생불이라 하니 들어오는 길에 병풍의 글을 보았느뇨?"

사신이 왈

"보았노라."

왜왕이 왈,

" 글을 보았다 하니 외라."

하니 사신이 왈,

"어찌 그만한 글을 연송치 못하리요,"

하고 삼경에 시작하여 이튿날 오시까지 연속하니 일만 구백 구십 구를 연송하거늘 왜왕이 왈

"어찌 열 구는 연송치 아니하느뇨"

사명당이 왈

"없는 글도 외라 하느뇨"

왜왕이 괴히 여겨 사관으로 하여금

"가서 보라."

하니

" 과연 병풍이 두간 닫혔다"

하거늘 왜왕이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대답치 못하더라

사명당이 별당으로 나오니 왜왕이 밥을 지어 올리거늘 사명당이 왈

" 일본 음식을 먹지 못한다."

하거늘 왜왕이 제신을 모아 의논 왈

조선 사신이 생불이 분명하니 어찌 하리요

제신이 왈

"일백오십 자 구리 방석을 만들어 물에 띄우고 앉으라 하면 제 아무리 부처라도 죽사오리다."

하니 왜왕이 옳게 여겨 구리 방석을 만들어 물가에 나와 사신을 청하여 왈,

"그대가 생불이라 하니 방석을 타라"

하니 방석을 물에 띄우고 팔만 대장경을 외니 동풍이 불면서 서로 가고 서풍이 불면 동으로 가며 완연히 떠다니며 일엽주를 임의로 타고 만경창파 대해 중에 다니며,

"호사로다. 호사로다."

하거늘 왜왕이 보고 대경하여 제신께 의논 왈

" 조선 사신을 어찌 하리요"

하니, 한 신하 주 왈,

"내일은 잔치를 배설하고 채단방석을 놓고 오르라 하여 채단방석에 않으면 필연 오물이요 백목을 취하면 부처려니 와 그렇지 아니하옵거든 죽이사이다."

하고 이튿날 최단 방석을 놓고 사신을 청하여

"방석에 앉으라."

하니 사명당이 백팔염주를 손에 들고 백목에 앉거늘 왜왕이 왈

"그대가 부처면 어찌 비단을 취하지 아니하고 백목에 앉았느뇨?"

사명당이 왈

"부처가 백목을 취하느니 어찌 비단을 취하리요 백목은 목화나무에 핀 꽃이요,

비단은 버러지 집으로 나오는 것인 고로 취치 않노라."

하니 왜왕이 다시 말이 없이 잔치를 파하고 제신을 모아 의논 왈,

하되 제신이 주 왈

"내일은 구리로 한 간 집을 짓고 생불을 청하여 구리 집에 들어가거든 문을 잠그고 사면으로 숯을 피우면 제 아무리 생불이라도 그 안에서 죽으리라."

하니 왜왕이 옳게 여겨 구리 집을 짓고 사신을 청하여 방안에 앉힌 후 문을 잠그고 사면으로 숯을 쌓고 대 풀무를 놓아 부니 불꽃이 일어나며 겉으로 구리가 녹아 흐르니 아무리 술법 있는 생불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사명당이 그 간계를 알고 사면 백상에 서리상(霜)자를 써 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 빙(氷)자를 써놓고 팔만 대장경을 외니 방안이 빙고 같은지라 왜왕이 왈

"조선 생불의 혼백이라도 남지 못하였으리라."

하고 사관을 명하여 문을 열고 보니 생불이 앉았으되 눈썹에는 서리가 끼고 수염에는 고두래미(고드름의 방언)가 달렸는지라

사명당이 사관을 보고 꾸짖어 왈,

"왜국이 남방이라 덥다 하더니 어찌 이러하게 차냐?"

하되 사관이 혼이 나서 그 사연을 왕께 고하니 왜왕이 대경하여 왈

"분명한 생불을 죽이지 못하고 쓸데없이 재물만 허비하였노라."

하고 "달래어 화친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한 꾀를 생가하고 무쇠 말을 달궈 놓고 사신을 청하여 왈,

그대가 부처라 하니 저 쇠말(鐵馬)을 타고 다니라."

하니 사명당이 그 간계를 알고 밖에 나와 조선을 바라보며 팔만대장경을 외니

사방에서 난데없는 구름이 모여들어 뇌성이 진동하여 소나기가 끊이지 아니하고 오니,

성중이 물이 고여 여강여해하여 인민이 무수히 빠져 죽는지라.

사명당이 호령 왈

"간사한 왜왕은 종시 깨닫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나를 죽이려 하거니와 내 어찌 간계에 빠지리요. 이제 외국을 함몰하려 하니 만일 잔명을 보전하려거늘 급히 항서를 올리면 비를 그치게 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일본은 동해를 만들리라."

하고 삼룡을 불러,

"비를 주며 왜왕을 놀라게 하라."

하니 삼룡이 일시에 귀비(굽이)를 치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무너지는 듯 하거늘 왜왕이 대경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더라.

구중궁궐(九重宮闕)이 다 바다가 되어 물결이 태산같이 점점 뜰에 들어오니, 왜왕이 하릴없이 인끈을 목에 매고 용포를 벗어 땅에 깔고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두 손길을 마주 잡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늘을 우러러 조선 사신 사명당 전에 비나이다. 제발 적선(積善) 살려 주옵소서. 소왕의 나라 인민이 다 함몰하게 되니 살려 주옵소서. 부처님 전에 비나이다. 소왕이 무도하와 부처님인 줄 모르고 무수히 희롱하였사오니 그 죄는 죽어도 마땅하거니와 제발 적선 살려 주옵소서."

하며 부자지국 항서를 올리거늘,

사명당이 받지 아니하고 왈,

"너의 잔명을 보전하려거든 연년에 인피(人皮) 삼백 장씩 하여 바치되, 십오 세, 십육세 된 규녀(閨女) 가죽으로 바치고 또 불알 삼 두씩 바치되, 십오 세 십육 세 된 유아(幼兒)로 하라."

하니, 왜왕이 왈,

"부처님께 명을 바칠지라도 인피와 불알을 바칠 수 없나이다."

하니, 사명당이 왈,

"연년이 인피 삼백 장과 불알을 삼 두씩 바치는 항서와 부자지국 항서를 바삐 써 올리고 그렇지 아니하면 비를 더 주어 함몰케 하리라."

하고 삼룡을 호령하니, 비가 우박 퍼붓듯 하는지라.

왜왕이 하릴없이 급히 써 올리거늘 사명당이 항서를 받은 후에 왜왕을 꾸짖어 왈,

"너는 무삼 욕심으로 청정과 소서와 평수길을 내보내어 우리 조선을 요란하게 한 죄목을 묻고자 하사 전하께옵서 나를 보내시니, 아무리 한들 우리 예의지국을 해하리오. 그 죄를 생각하고 씨없이 다 죽이고자 하였더니 인명이 지중하기로 십분 용서하였거니와, 차후는 다시 외람된 마음을 두지 말고 조선을 잘 섬기라. 우리나라에 영웅호걸이 구름 모이듯 하고 나라가 비록 편소지국이나 천하에 제일이요, 남경 천자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타국이 다 범람한 뜻을 내지 못하고 각보일우(各保一隅)하느니, 우리나라에 나 같은 생불이 연년 수천여 명이라. 이번에 나를 보내시며 그대 나라에 들어가 부자지국 항서를 받으라 하시기로 왔느니, 일후에는 다시 범람한 뜻을 두면 우리 일천 부처가 일시에 들어와 너희 일본은 동해를 만들 것이니, 차후는 반(反)치 말라." 하되, 왜왕이 고두 사죄 왈,

"소왕이 아무리 무지하온들 부처님 가르치시는 걸 어찌 거역하리이까. 지위(知委)하시는 대로 시행하리이다."

하고 즉시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다가 이튿날 사명당이 회환(回還)할 새, 일본 인민은 조선 생불이 환기고국한단 말을 듣고 다투어 구경하더라.

왜왕이 백리 밖에 나와 전송하여 진보(珍寶)를 무수히 드리거늘, 사명당이 본래 탐욕이 없는지라 진보를 물리치고 왈,

"불알 삼 두씩, 인피 삼백 장씩 바치되, 연년이 삼백장 내에 일 개, 일 장이라도 덜 바치면 또 건너와 일본을 함몰시킬 것이니 각별 조심하라."

하고 길을 떠나 물가에 다다르니, 삼룡이 배를 대이고 순식간에 건너서 삼일 만에 조선 지경에 득달하여, 왜왕에게서 받은 항서를 봉하여 경성으로 보내고 인하여 길을 떠나니, 위풍과 이름이 일국에 진동하더라.

각설, 이때 대왕이 일본 항서를 보시고 대희하사 왈,

"사명당의 공로는 천추에 제일이로다."

못내 칭찬하시며 들어오기를 고대하던 차에 사명당이 경성에 득달하여 탑전에 복지 사배하되 왕이 손을 잡고 칭찬불이(稱讚不已)하사 왈, "그대가 만리 타국에 들어가 빛난 이름을 세우고 무사히 들어오니 그 공로는 천추에 없도다."

하시고 사명당과 서산 대사를 벼슬을 주실 새, 서산 대사는 병조 판서 호위 대장을 삼으시고, 사명당은 금부 도사를 삼으시니, 두 대사 복지주 왈,

"비록 조고마한 공로가 있사오나 중대한 벼슬을 주시니 국은이 망극하여이다."

하고 벼슬에 있을 제 칠 삭 만에 두 대사 복지 주 왈,

"승 등의 벼슬을 갈아 주시면 산중에 들어가 불도를 숭상하여지이다."

하거늘, 상이 창연함을 마지못하여 가라사대,

"경의 소원이 그러할진대 임의로 하라."

하시고 벼슬을 갈아 주시니, 두 대사 숙배하고 물러 나오니 만조 백관이 멀리 나와 전송하더라.

이때 왜왕이 인피 삼백 장과 불알 삼 두씩을 연년에 바치니, 이로 당치 못하여 동래 땅에 왜관(倭館)을 짓고 구리쇠 삼백육십 근과 주석쇠 삼만 육천 근, 통쇠 삼만 육천 근과 사우쇠 삼만 육천근을 연년이 조공(朝貢)…… 부자지국 조공을 연년이 하더라.

이때 대명(大明) 천자, 조선의 일왕(一王)께 금자 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 가자(加資)를 보내서 덕택(德澤)을 사해에 빛나게 하시더라.

 

 

요점 정리

 

연대 : 미상

작자 : 미상

형식 : 국문소설, 군담소설, 전쟁 소설, 역사 소설

표현 : 문어체, 역어체, 도술적인 표현

주제 : 민족적 자부심 고취, 민족적 응전(應戰) 의지(意志)

구성 :

발단

최일경이 왜의 침입 징후를 해몽 풀이로 말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당함

전개

이순신은 왜군이 파죽시세로 침입하자 수군으로 출정하여 왜군을 물리치다가 왜장 마홍에게 죽는다.

강홍립이 적장 마홍을 죽이고 대승을 거둔다.

정충남이 출진하여 전사(戰死)하자 왕이 피난길에 오른다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켜 도술로 왜군을 격파한다.

전환

최일경이 돌아와 왕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명에 구원병을 청하게 한다.

관운장이 현신하여 도성을 점령한 왜적을 물리친다.

김응서가 기생 월선과 공모하여 왜장 조섭을 살해한다.

절정

이여송이 구원병을 이끌고 와서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장수들과 함께 왜진을 공격하여 물리친다.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원통하게 죽는다.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혈맥을 끊다가 신령에게 봉변을 당한다.

결말

강홍립과 김응서가 일본 원정에 나서 승리하지만, 강흥립의 배신으로 둘 다 죽고 만다.

사명당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술로 왜왕을 혼내주고 귀국한다

줄거리 : 하루는 선조가 꿈을 꾸었는데 신하들로 하여금 그 꿈을 해몽하라고 했더니, 우의정 최일경이 선조 대왕의 꿈을 최일경이 해몽한 결과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에 임금은 태평 성대에 요망스런 말을 한다고 동래로 귀양을 보내 버렸는데 귀양지에서 왜침을 목도한 최일경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드디어 임진년 3월에 청정, 소서, 평수길 등이 대군을 이끌어 침공하게 되자, 이 때, 이순신이 국난을 예측하고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지휘하여 싸우다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왜군이 서울을 침공하게 되자, 선조 대왕은 김도경이란 소년이 말고삐를 잡아 줌으로써 간신히 의주로 피난하였다. 왜군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소서는 월선이란 기생을 첩으로 삼았다. 그 사이에 최일경이 의주로 와서 왕과 의논한 결과, 유성룡을 명나라 조정에 보내어 구원군 파견을 요청하도록 결정지었다. 그리고 관운장이나 나타나 청정(淸正)을 꾸짖고, 김덕령이 도술을 부려 청정을 곤욕 치르게 하였다.

한편, 최일경은 김응서를 시켜 월선으로 하여금 소서를 암살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 파견 요청이 실패하자, 관운장이 나타나서 명나라 천자로 하여금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게 하였다. 이여송이 압록강에 이르러 물 때문에 건너갈 수 없다고 핑계대자, 도술로 강을 육지로 만들어 용탕(龍湯)을 먹이어 의주로 안내하였다. 이여송이 선조 대왕을 알현하고 드디어 줄전하였다. 이여송이 선조 대왕을 알현하고 드디어 출전하였다. 이여송과 청정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데, 관운장이 나타나 청정에게 호통하자, 이 틈에 청정의 머리를 베었다. 대장을 잃은 왜군은 대패하게 되었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김응서와 강홍립을 대장으로 내세워 왜국의 항서(降書)를 받게 하였다. 두 장군이 가서 도술로 많은 장군을 죽이자 왜왕은 하는 수 없이 화친을 청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지 13년 만에 서산 대사가 꿈을 꾸고 상경하여 선조 대왕을 뵙고, 왜구의 재침략을 막고 묘책을 논의한 끝에 자기의 제자 사명당을 왜국에 보내 강화하게 하였다. 사명당이 생불이라는 소문을 들은 왜왕은 여러 차례로 그를 죽이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는 하는 수 없이 항서를 올렸다. 사명당은 형제지국의 항서를 받고 일 년간 수자리 설 사람 300명을 조공하라는 조약을 맺은 뒤 무사히 귀국하였다.

내용 연구

각설 : 화제를 바꿀 때 쓰는 말

시년 : 그때의 나이

시호시호 : 좋은 때를 만나 기뻐 감탄하는 소리

억조 창생 : 수많은 백성

군량 마초 : 군대의 식량과 말먹이 풀

동독 : 감동

편만 : 꽉참

장계 : 지방의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명초 : 임금의 명령으로 신하를 부름

우금 : 지금까지

군정 : 군적(軍籍)에 있는 지방 장정

점고 : 명부에 하나하나 점을 찍어 가며 사람 수효를 조사함.

운량장 : 군량을 운반하는 장수

남호 : 호남의 남쪽

짓쳐 : 함부로 마구쳐

격서: 특별한 경우에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회유·힐책하기 위하여 발표하는 글

만성갑 : 갑옷의 일종

호달마 : 몽고말 (본문에 생략된 부분임)

이해와 감상

 

'임진록'은 작자 연대 미상의 고소설로 목판본, 한글본, 필사본 등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작품이 전한다. 성격상 역사소설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 사실상 참담한 패배로 끝난 것이지만 당시 전란을 체험했던 민중들이나 그 의식을 계승한 후손들이 밖으로는 왜적의 침략을 자초했던 뼈아픈 참회가 담겨 있다.

최위공의 부인이 남방으로 큰 별이 떨어져 광채를 발하는 태몽을 얻고 관운장의 꿈으로 일경을 낳는다. 최일경은 점점 자라 벼슬에 올라 선조의 꿈을 해몽하다가 동래로 귀양을 간다. 이때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순신이 왜장 마홍에게 죽고, 마홍이 강홍립에게 죽고, 천동이 정충남에게 죽고, 충남은 가토에게 죽고, 가토는 이여송에게 죽는 정연한 전쟁사가 서술된다.

 

유성룡이 이여송군을 청병해 올때 압록강 가에서 재주겨룸을 한다든가,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지맥을 끊으려다 태백산신의 질책을 받고 본국으로 도주한다든가 하는 장면은 명나라 원군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의 의식과 배일사상은 물론 배명사상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종전 후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맥을 끊으려다 노인의 인도로 태백산에 들어가 청의동자를 만나고 크게 질책 당하는 구성은 민중 속에 배명의식의 뿌리가 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러 이본들에 나타난 설화들은 사명대사가 일본국에 가서 항복을 받는 설화, 김응서, 강홍립이 일본 정벌에 나서는 설화, 이여송군의 원병에 따르는 설화 관운장이 조선군을 도와주는 설화, 최일경의 꿈풀이의 충고 설화 등과 함께 민족적 분노와 반성의 역사의식을 표출해 내고 있다.

 

특히 우리 민중은 '임진록'을 통하여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였는데,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정문부, 조헌, 영규, 김응서, 논개, 계월향 등의 부각과 숭앙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그 후 임진왜란의 뒤를 잇는 병자호란의 의식과도 이어져 잇달은 군담소설의 출현을 낳았다

 

하여간 이 소설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전쟁 소설로서 설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유전된 많은 배왜적인 전쟁 설화가 훗일 문자로 정착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수록된 사람들은 최일경, 이순신, 정출남, 김덕령, 김응서, 이여송, 사명당 등인데, 이 중 사명당의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련을 안겨 준 전란이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록은 우리 민족이 왜적에게 비참하게 패배한 나머지 그들에 대한 울분과 복수심을 표현해 보고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처절하게 당한 패전을 현실과 달리 승전사로 허구화한 것에서 우리는 저상(沮喪: 기운을 잃음)된 민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패전으로 인한 수모를 정신적으로 보상해 보고자 하던 민족적 설욕의 정신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심화 자료

 

'임진록'의 여러 이본(異本)

이 소설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 연대 미상의 군담소설로서 한글본과 한문본이 있으며, '임진록','님진록', '흑룡록', '흑룡일기'등의 표제로 된 국문본이 필사본 또는 판본으로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이 소설들은 당시 유전(流轉)되어오던 반왜적(反倭賊)인 전쟁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한글본과 한문본의 내용이 다른 것으로 보아 문자로 정착되면서부터 이본을 낳게 된 것으로 본다.

 

군담 소설의 유형

군담소설은 크게 역사(歷史) 군담소설과 창작(創作) 군담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1) 역사 군담소설 : 임진록, 임경업전(林慶業傳), 박씨전(朴氏傳) 등

(2) 창작 군담 소설 : 소대성전(蘇大成傳), 유충렬전, 장백전(張伯傳) 등

 

임진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실제 행적

김덕령

본관 광산. 자 경수(景樹). 시호 충장(忠壯). 광주(光州) 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義烈祠)에 형 덕홍(德弘) ·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傳記)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강홍립

본관 진주(晋州),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 참판 신(紳)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 ·검열 등을 거쳐 1605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지낸 뒤 18년 진녕군(晋寧君)에 봉해졌다. 그 해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새로 일어난 후금이 두려웠으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온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하고,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투항한 이듬해인 1620년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和議)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 뒤 복관되었다

이순신

본관 덕수(德水).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서울 출생.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 이듬해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고, 1589년(선조 22) 선전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난민구제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 ·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란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함으로써 한국 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 ·한시(漢詩)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되었으며, 좌의정(左議政)이 추증, 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葬地)는 아산(牙山)의 어라산(於羅山)이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忠武)의 충렬사(忠烈祠), 여수(麗水)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이 중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전시관 등을 건립,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저서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다.

사명당

속성 임(任). 본관 풍천(佯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密陽)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이여송

자 자무(子茂). 호 앙성(仰城).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 1592년 닝샤[寧夏]에 발배(틋拜)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독(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하였다. 같은 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2차 원군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벽제관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패한 후로는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해 말에 철군하였다. 1597년 요동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토번(土蕃)의 침범을 받아 반격 중에 전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 사람으로 성주(星州) 이씨(李氏)의 후예라 하며, 당시 조선 주둔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지금도 경상남도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임진록(壬辰錄)

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한글본으로는 경판본 ( 京板本 ) · 완판본 ( 完板本 )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 · 흑룡록(黑龍錄 : 李明善本) · 흑룡일기(黑龍日記 : 白淳在本) · 한남대학교(구 숭전대학교) 도서관본(3책)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창서관의 구활자본 〈 임진록 〉 도 전하고 있다.

한문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이 역사적 사실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장서각도서의 〈 임진록 〉 (6책, 단실거사편)과 계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명선본(國際文化館, 김진태 역)은 고려대학교 도서관본(壬辰錄合綴 痒 公傳) · 경북대학교 도서관본(번역)과 계맥을 같이하고 있다.

 

〈 임진록 〉 은 성격상으로 볼 때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임진왜란이 사실상 참담한 패배로 끝을 맺자 당시 전란을 체험했던 민중들이나 그 의식을 계승한 후손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밖으로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강토와 민족을 수호하려는 분노를 고취시킴과 아울러, 안으로는 당쟁으로 허점을 드러내 외적의 침략을 자초한 뼈아픈 참회의 뉘우침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전란을 계기로 뒤돌아본 분노와 자성의 민중사(民衆史)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인 만큼 거의 모든 이본들이 역사적 사실을 의도에 따라 크게 허구화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현실적으로 패배한 패전의 역사를 허구적 승전사로 꾸며놓음으로써 쓰라린 패배에 대한 정신적 보상을 얻으려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므로 〈 임진록 〉 은 임진왜란을 통해 체험하고 전승된 배왜적(排倭的)인 전쟁설화가 오랜 구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문자로 정착되고 다시 그것이 전사과정을 거듭하면서 여러 이본들을 낳은 것이다.

즉, 마치 중국의 〈 홍루몽 紅樓夢 〉 처럼 커다란 임진록군(壬辰錄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 임진록 〉 은 일제치하에서는 금서로서 대부분 소실되고 오늘날에는 희구서의 하나가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임진록 〉 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위공의 부인이 남방으로 큰 별이 떨어져 광채를 발하는 태몽을 꾸고 관운장(關雲長)의 꿈으로 일경(日景)을 낳는 데서 비롯하여, 나중 선조의 꿈을 최일경이 해몽하다가 동래로 귀양가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 뒤 이순신 ( 李舜臣 )이 왜장 마홍에게 죽고, 마홍이 강홍립 ( 姜弘立 )에게 죽고, 천동이 정충남(鄭忠男)에게 죽고, 충남은 가토(加藤淸正)에게 죽고, 가토는 이여송(李如松)에게 죽는 정연한 전쟁사가 눈을 끈다.

 

특히 유성룡 ( 柳成龍 )이 이여송군을 청병해올 때 압록강에서 벌인 재주 겨룸이라든가,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지맥을 끊으려다 태백산신의 질책을 받고 본국으로 도주하는 대목이 눈을 끈다.

 

이는 〈 징비록 懲毖錄 〉 에서 ‘ 명군이 토해낸 음식을 조선군이 거두어 먹는다. ’ 는 기록처럼, 당시 청원군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의 의식과, 배일사상 및 배명사상까지 함께 보여주고 있다.

 

종전 후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맥을 끊으려다 노인의 인도로 태백산에 들어가 청의동자(靑衣童子)를 만나고 크게 질책당하는 구성은, 한문본 계통의 작품에 더 강화되어 있어 민중 속의 배명의식의 뿌리가 깊음을 말해 준다. 이본들 가운데 나타난 임진록 속의 가장 대표적 설화는 다음과 같다.

① 사명당(泗溟堂)이 일본국을 항복받는 설화, ② 김응서(金應瑞) · 강홍립이 일본정벌에 나서는 설화, ③ 이여송군의 원병에 따르는 설화, ④ 관운장이 조선군을 음조(陰助)하는 설화, ⑤ 최일경의 꿈풀이에서의 충고설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민족적 분노와 반성의 역사적 의식을 표출해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민족적 영웅을 갈망하는 사상이 싹트고 있다. 이순신 · 곽재우 ( 郭再祐 ) · 김덕령 ( 金德齡 ) · 정문부 ( 鄭文孚 ) · 조헌 ( 趙憲 ) · 영규 ( 靈圭 ) · 김응서 · 논개 ( 論介 ) · 계월향(桂月香) 등의 부각과 숭앙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경판본 · 한남대본 등을 중심으로 볼 때 이순신의 활약상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임진왜란의 뒤를 잇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의식과도 이어져 잇달은 군담소설 ( 軍談小說 )을 배태시켰다.

≪ 참고문헌 ≫ 壬辰亂과 朝鮮文化의 東漸(金泰俊, 韓國硏究院, 1977), 壬丙兩亂과 文學意識(蘇在英, 韓國硏究院, 1980), 韓國古典小說硏究(金起東, 敎學社, 1981), 임진록 이본연구 Ⅰ ∼ Ⅳ (임철호, 전주대학교출판부, 1996), 壬辰錄攷(金淳休, 東岳語文論集 4집, 1966), 古典文學에 나타난 對日感情(張德順, 東亞文化 4집, 서울大學校東亞文化硏究所, 1967), 壬辰錄硏究(蘇在英, 崇田語文學 1, 崇田語文學會, 1972), 壬辰錄에 나타난 金德齡(趙東一, 李在秀博士還曆論文集, 1972), 壬辰錄漢文本論攷(蘇在英, 檀國大學校國文學論集 5 · 6, 1972), 壬辰錄說話의 한 硏究(蘇在英, 朝鮮學報 89, 朝鮮學會, 1978).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전쟁이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른다. 그외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의 조선·중국·일본 각 나라는 14세기에 다같이 새 국가와 정권이 등장한 이후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명나라가 동요되고 이웃한 여러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나라는 16세기경에 환관(宦官)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도 향리재주(鄕吏在主)의 관리나 과거급제자층이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반(反)환관운동·반(反)해금정책 등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농민봉기와 종실간의 반란이 잦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이 자주 침입해왔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영국경영(領國經營)에 기반하여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정권이 전국통일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로 철포대 등 총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토[關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 검지(檢地)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더욱이 삼포왜란(三浦倭亂),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唐入: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변혁전쟁'(體制變革戰爭)을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나, 15세기말부터 정치의 실권을 가진 훈척(勳戚)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정파정치(政派政治)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심의겸(沈義謙) 문제로 인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고, 이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서 퇴계(退溪) 문하가 남인(南人)으로 분립하는 등 중앙정치세력의 알력 및 개편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권세가들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의 해택(海澤)·노전(蘆田)의 강점, 군역의 포납화(布納化), 수령·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상납물의 강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군제도 병농일치의 개병제 원칙이 붕괴되고, 각급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는 기능을 상실하여 국방력이 약해졌다. 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초기의 군사제를 규정대로 운용하면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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