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가(離別歌) - 박목월
by 송화은율이별가(離別歌) - 박목월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후략>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별의 정한은 한국 시가의 정서적 광맥이다. 가시리에서 찾을 수 있는 별리의 정한은, 황진이에게 와서 서정 미학의 꽃으로 피더니, 소월에게 와서 역설의 미학으로 한 차원 높은 별리의 서정을 완성하는 듯하였다. 이제 목월은 삶과 죽음을, 이승과 저승을 뛰어넘는 어법을 터득하고 있다.
▶ 성격 : 인간적, 전통적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 위주
▶ 어조 :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
▶ 표현 : ① 방언 → 소박한 정감, ② 반복과 점층 → 그리움과 안타까움 심화
▶ 특징 : 되풀이되는 질문(‘뭐락카노’) 속에 이별의 정한을 드러냄.
▶ 구성 : ①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별리(제1-4연)
② 끊어질 수 없는 인연(제5-7연)
③ 순응과 초극(제8,9연)
▶ 제재 : 인연과 이별
▶ 주제 : 생사를 초월한 이별의 정한
<연구 문제>
1. 이 작품을 대립적 구조로 볼 수 있다면, 대립된 두 세계는 무엇인가?
<모범답>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
2. ㉠을 ‘이별’과 연관지어 볼 때, ‘동아 밧줄’과 ‘삭아 내림’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지 70-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밧줄’은 결합 혹은 인연을 상징한다. 그것이 ‘삭아 내림’은 결합 혹은 인연의 소멸을 함축한다. 시간의 소멸, 만남의 소멸, 인연의 소멸을 함축하고 있다.
3. ㉡에 담긴 화자의 대답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그 대답은 ‘말 없는 말’, 즉 언외언(言外言)의 세계로서 삶이 걸어가야 할 만남과 헤어짐과 다시 만남의 변증법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될 것이다.
4. 제2연의 ‘목소리’와 제9연의 ‘목소리’의 의미상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
<모범답> 제2연의 ‘목소리’는 운명적 상황의 비극적 인식에서 오는 ‘물음’이라면, 제9연의 ‘목소리는 온건한 자기 긍정과 운명적 순응에서 오는 초극의 ’대답‘이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 감상의 길잡이 1 >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시어는 ‘뭐락카노’이다. 경상도 지역의 방언은 한국 시사(詩史)의 전통에서 볼 때 특이한 예에 속하는데, 이 시어가 소설의 화소(話素)처럼 이야기를 끌고가는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누군가가 강의 저편에서 화자에게 말을 건네나 바람에 날려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강 이편의 화자 역시 상대에게 뭐라고 외치지만, 그 목소리 또한 확연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와 나를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은 것은 강― 강은 삶과 죽음의 간격을 의미할 터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인연인데, 그와 생전에 맺은 인연의 밧줄은 삭아 내리고 있다. 세상살이의 인연은 마치 갈밭을 건너는 바람과도 같이 덧없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되뇌인다. ‘하직을 말자’고. 나도 머지 않아 강 건너 저 세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뭐라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는 그가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으로 여겨져 나는 ‘오냐, 오냐, 오냐’라고 알아 들었다는 듯이 대답한다. 나도 곧 갈 거라는 뜻일 게다.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락인 제1-4연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벌리의 상황을 펼쳐 보이고 있다. 강기슭의 차안과 피안, 곧 이승과 저승으로 하직을 고해야 하는 것은 운명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냐? 라는 물음이 하나요,
제2단락인 제5-7연에서는 비록 운명적 상황으로 인한 별리일지라도 연(緣)을 끊어 놓을 수 없는 것 아니냐? 라는 물음이 둘이라면,
제3단락인 제8-9연에서는 온건한 자기 긍정으로 회귀하여 운명에 순응하면서 이별의 정한을 초극해 내고 있는 것이 셋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마침내 이별의 정한을 생사를 초극하는 경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서정 미학의 정점에 ‘이별의 정한’이 놓이게 한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2 >
죽음은 사랑과 함께 오랜 옛날부터 가장 널리 노래되는 문학 소재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삶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인연의 질긴 줄에 이끌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타의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사랑으로 인해 생(生)의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괴로워 울기도 한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바로 죽음을 소재로 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인연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앞의 <하관>이 아우의 죽음을 다룬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누구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시인의 가족이거나 절친했던 친우(親友)일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은 먼저 화자와 청자를 등장시켜 대화체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뭐락카노’라는 사투리가 제시하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오냐’라는 시어가 제시하는 응답 내지 수긍의 상황이 작품 전체의 시상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으로 나누어진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이승인 강 이편에서 저승인 강 저편으로 건너간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 앉아 ‘저편 강기슭에서’ 나를 향해 외치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나, ‘바람에 불려서’ 도저히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니 뭐락카노’ 하며 나도 그를 향해 소리 지르지만,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그저 강안(江岸)에 흩어질 뿐이다. 왜냐하면, ‘강’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즉, 나와 그는 강으로 나누어진 삶과 죽음의 세계에 각각 따로 존재할 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 간의 거리는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전혀 들리지도, 들을 수도 없는 아득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뱃머리’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다. 이것은 화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깊은 인식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죽음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대문 밖이 저승이다.”라는 우리 속담과 상통하는 사생관(死生觀)의 반영인 셈이다.
그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해 애태우는 화자가 ‘뭐락카노’를 되뇌이며 그의 말을 들으려 할 때, 그와의 이승에서의 인연을 상징하는 ‘동앗밧줄’은 점차 ‘썩어서’ ‘삭아내’린다. 그가 이승에 남겼던 삶의 족적(足跡)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 맺었던 ‘나’에게까지 그는 잊혀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나는 그와의 깊은 인연을 생각하며 ‘하직을 말자’고 자기 자신에게 약속한다. 이것은 이승에서의 인연을 저승에까지 계속 연장하고 싶어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와의 ‘인연은 갈밭을 건느는 바람’이라 선언하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강이 아무리 드넓다 하더라도, 우리가 맺은 ‘인연의 바람’은 그것을 뛰어 넘어 끊임없이 불어 가고, 불어 오고 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려서’와 ‘바람에 날려서’처럼 ‘장애(障碍)’의 이미지로 사용되던 바람이 여기서는 인연의 ‘정도(깊이)’를 표상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끊어질 듯했던 그와의 인연이 더욱 깊어진 탓으로, 마침내 그의 ‘흰 옷자락’이 보이게 되고, 분명하지는 않아도 그의 말이 희미하게 들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냐, 오냐, 오냐.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다짐의 말도 ‘바람에 날려’ 그에게 잘 들리지는 않아도, 화자는 더욱 큰 소리로 재회의 약속을 하며 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애타게 노래하는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3 >
이 시에서 `의자'는 일상적이며 기능적인 의자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무대이며 터전이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삶의 터전은 특정한 사람에 의해 점유될 수 없으며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게 된다. 시인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물러날 시간임을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의자를 비워줄 채비를 한다. 새로운 세대를 `어린 분'으로 존칭하며, `옵니다', `지요' 등의 존칭어미를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연으로 된 이 시는 전체적으로 볼 때 AABA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1연과 2연, 4연은 `어린'이란 시어의 사용 여부와 끝에 오는 서술어 `비워드리지요, 비워드리겠어요, 비워드리겠습니다' 등의 종결어미의 차이만이 있을 뿐 동일한 양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함으로써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내용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의미 차이를 감지해낼 수 있어야 한다. 1연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사람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냥 `아침을 몰고 오는 분'으로 간략히 지칭되어 있다. 2연에 이르러 `어린'이란 시어가 더 덧붙여짐으로써 그 주인공은 세대교체를 이룰 젊은 세대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묵은 의자를 어린 그 분에게 비워주겠다는 화자의 결심은 1연의 `비워드리지요'에서 2연의 `비워드리겠어요'를 거쳐 3연의 `비워드리겠습니다'에 이르러 더 확고하게 굳어지는 점층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에 따라 화자의 태도도 더욱 겸손하게 변화되고 있다.
3연에서 화자는 묵은 의자를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는 이유와 방식을 설명한다.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었던 것처럼 이젠 내가 그와 같은 일을 나의 후손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의자가, 즉 하나의 삶의 터전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비교적 단순한 구도를 지니고 있는 이 시가 실은 삶의 순환과 세대 교체라는 역사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해설: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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