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안도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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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에서 복직까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집의 첫머리를 여는 시 '너에게 묻는다'는 단 세 줄로 읽는 이의 가슴을 차고 들어온다. 역사에서도 생활에서도 밥값을 한다는 것이 절실한 질문이었을 시기에 그는 스스로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다.

 

만경평야의 볏단들을 보면서도 안씨는 '밥값'을 되뇌었다.'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

일렬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

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처음 건너는

아이들 같구나

너희들 저녁밥 먹으러 가느냐

날 추운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

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

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

못했는가 생각할 수록 어두워지는구나'('먼 불빛'전문).

 

복직한 1994년 이후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연이었다. 물론 그의 시는 이전까지 역사와 사회를 담았더라도 순정한 서정시였다. 전북 장수군의 전교생 수 120여명에 불과한 산서중학교에 복직한 그는 여기서 온전한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발견했다. 이때는 한국문학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문학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정치사회적 억압, 거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정치사회 그 차제의 변혁을 위해 스스로 혁명아가 되기를 꿈꾸었던 1980년대의 문학이 기대고 있던 기반이 무너졌던 시기였다. 문학이 도대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후일담 문학󰡑의 시기였다. 이때 안씨는 이른바 '신서정(新抒情)'이라는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연 선두주자가 된다. '시에 투쟁성이나 선전성이 강요되기보다는 서정시 본래의 순도가 그리워지던 시점에, 그에 부응하는 시세계를 선보여 환영을 받은'(문학평론가 남진우) 안씨였다.

 

'나 스스로는 운이 좋았다고 느낍니다. 사실 80년대 시에 물려 있었지요. 그 형식이나 내용이 모두 시를 옥죄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란 말 앞에 노동, 해방, 해체 등등 붙이기만 하면 시로 분류가 되는 것에 내심 반발할 무렵 운좋게 자연을 공부할 기회가 산서중학교에 복직하면서 주어진 거지요.'

 

그곳은 학생들이 봄에는 두릅 따 오고 가을이면 밤 삶아서 등교하는 곳이었다. 복직 후 학교의 현실이 전교조의 투쟁과는 상관없이 여전한 것을 느끼고 절망해있던 그는 여기서 자연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고, 시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북극성은 사라졌는데 땅바닥의 들꽃들에서 길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시가 나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았다. 팔목에 힘을 빼고 목소리를 낮추고 발자국 소리를 줄이고 발 닿는대로 걸었다. 시의 길이도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이 시기에 절창이 탄생한다. '겨울 강가에서'는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우리 시의 궁극적 호소력이 빼어나게 형상화된 명편으로 읽힌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의 강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강이기도 하겠지만 금강은 그에게 다시 문학현장이 된다. 그 물줄기가 군산항으로 흘러드는 금강 하구. 1990년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었던 금강 하구에 지금은 하구둑 위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스스로 '시를 지나치게 다듬는다'고 느껴 오히려 '이제는 거칠게 쓰고 싶다'는 안씨는 요즘도 틈나면 이곳을 찾는다. '인간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한, 시인은 시가 가진 창조적인 기능, 즉 시라는 형식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밤을 새울 때'이다.

 

시도 사랑도 안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다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금강 하구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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