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와 프시케
by 송화은율
에로스와 프시케
옛날 어느 나라에 세 딸을 둔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두 언니도 아름다웠으나, 특히 막내딸의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소문은 먼 나라에까지 퍼져 그녀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로 모여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경탄한 그들은 이제까지 아프로디테에게 쏟았던 경의를 그녀에게 바쳤다. 이렇듯 사람들의 정성이 이 젊은 처녀에게로만 쏠리자, 아프로디테의 제단을 돌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어 황폐해지고 말았다. 처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발 밑에 화관이나 꽃을 뿌렸다.
불사의 신들에게나 바쳐야 할 이런 경의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에게 향하는 걸 본 아프로디테는 몹시 노했다. 그녀는 노한 나머지 향기로운 머리 타래를 흔들며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의 명예가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딸 때문에 빛을 잃어야 하는가? 제우스까지도 신임했던 양치기 왕(트로이와 왕자 파리스를 가리킴)의 판정은 엉터리였단 말인가? 양치기 왕은 나의 경쟁자인 아테나와 헤라보다 내가 훨씬 아름답다고 판정을 내렸건만 이제 그 영예도 쓸모 없게 되었다. 그러나 두고 보자. 내 명예에 도전한 저 계집로 하여금 자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는가를 반드시 후회하도록 해주리라." 그녀는 날개 달린 아들 에로스를 불렀다. 에로스는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천성을 타고났는데 어머니의 불평을 듣자 더욱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프시케(막내딸의 이름)를 가리켜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 교만한 미녀를 혼내다오. 그녀가 받는 벌이 심하면 심할수록 내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복수가 된단다. 저 교만한 계집애의 가슴속에 어떤 미천한 자에 대한 연정을 불어넣어라. 그렇게 되면 저 계집애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환희와 영광이 큰 만큼, 장차 받게 될 굴욕 또한 크리라."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아프로디테의 정원에는 샘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물맛이 달고 다른 한 곳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는 두 개의 호박(琥珀)병에다 각각 맛이 틀린 두 샘물을 담아 화살통 끝에 매달고, 급히 프시케의방으로 갔다. 프시케는 잠들어 있었다. 잠깐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에로스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그런 마음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쓴 물 두어 방울을 그녀의 입술 위에 떨어뜨린 다음 그녀의 옆구리에다 화살 끝을 댔다. 순간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에로스 쪽을 바라보았다.(물론 그녀에게는 에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너무 놀란 에로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화살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까지 저질러놓은 장난을 취소하기에 바빴고, 그녀의 비단 같은 고수머리 위에 기쁨의 달콤한 물방울을 뿌렸다.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은 이후 프시케는 자신의 미모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사실 모든 눈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모든 입이 그녀를 칭찬했으나, 왕이나 귀족 청년은 물론 평민들 중에서도 누구하나 청혼하는 이가 없었다. 적당히 아름다웠던 두 언니도 이미 왕자들과 결혼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프시케는 독수공방 고독한 자기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자신의 미에 싫증을 느꼈다. 그녀의 양친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에 신들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닌가 두려워해 아폴론의 신탁을 받고 다음과 같은 말을 얻었다. "그 처녀는 인간에게 시집갈 팔자가 아니다. 그녀의 장래의 남편이 산정(山頂)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괴물로서, 신도 인간도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이 무서운 신탁에 놀란 그녀의 양친은 큰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프시케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왜 이제 와서 제 신세를 슬퍼하십니까? 사람들이 저에게 분에 넘치는 명예를 부여하고 입을 모아 저를 아프로디테라고 불렀을 때, 그때 슬퍼하셨어야 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저는 벌이 내린 까닭을 깨달았어요. 그런 칭호를 들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어요. 이제 제 운명에 순종하겠어요. 불행한 운명이 점지해준 저 바위가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십시오." 그리하여 공주를 보내는 행렬이 출발했는데, 그것은 혼례 행렬이라기보다는 장례 행렬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프시케는 사람들의 한 숨소리를 들으며 양친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이윽고 산꼭대기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그녀를 그곳에 혼자 남겨놓고 슬픈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프시케가 공포에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친절한 제피로스가 그녀를 들어올려 꽃이 잔뜩 핀 골짜기로 실어다주었다. 원기를 되찾아 상쾌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 근처에 큰 나무가 우뚝 솟은 아름다운 숲이 있었다. 프시케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한가운데에 수정과 같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고, 바로 가까이 굉장한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궁전의 장엄함은 보는 사람에게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이 세운 행복한 은신처라는 느낌을 주었다. 감탄과 경이감에 끌려 그 궁전으로 다가간 프시케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보이는 물건마다 그녀의 눈을 즐겁게도 놀라게도 했다. 반원형 지붕을 황금 기둥이 받치고 있었고, 벽은 사냥의 대상이 되는 짐승과 전원 풍경을 그린 조각, 그리고 그것들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의식용(儀式用)홀 외에도 온갖 종류의 보물과 천연 및 인공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가득 찬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녀가 이런 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이시여,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듣고 계신 이 목소리는 당신의 하인으로서, 우리는 당신의 어떤 분부에도 정성을 다해 복종할 것입니다. 먼저 당신 방으로 들어가 털침대 위에서 편히 쉬십시오. 또한 목욕을 하시려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저녁식사는 옆에 있는 정자에다 준비할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목소리뿐인 시종의 말에 따라 프시케는 침대 위에서 쉬고 목욕도 하여 기운을 차린 다음 정자에 들어가 앉았다. 급사나 하인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맛좋은 음식과 감미로운 술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연주자의 음악은 그녀의 귀를 즐겁게 했다. 그중 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한 사람은 리라를 탔는데 잘 조화된 화음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직 남편 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밤에 들어왔다가 동이 트기 전에 떠나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라나 그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음성은 그녀의 마음에도 같은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때때로 떠나지 말고 얼굴을 보여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이니 자기의 얼굴을 볼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어째서 나를 보고 싶어하오? 나의 사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있소? 아니면 무슨 불만이 있는 거요? 그대가 내 얼굴을 본다면 아마 나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내가 진정 그대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사랑이오. 나는 신으로서 숭배를 받는 것보다 같은 인간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하오."
이러한 말을 듣는 동안 프시케는 잠깐 동안이지만 마음이 안정되었고, 거기에다 남편의 존재가 신비롭게 느껴질 동안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계실 부모님 생각과, 자기의 지위에 대한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없는 언니들 생각 때문에 프시케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래서인지 궁전도 훌륭한 감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남편이 왔을 때 프시케는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언니들을 궁전으로 초대해도 좋다는 승낙을 겨우 얻어냈다. 그녀는 제피로스를 불러 남편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자 제피로스는 그녀의 명령대로 곧장 산을 넘어가서 두 언니를 프시케가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왔다. 언니들과 프시케는 서로 끌어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프시케가 말했다. "이리 오셔서 우리집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뭘 좀 잡수셔야죠."
그녀는 언니들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궁전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목소리만 들리는 수많은 시종들을 시켜 언니들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녀들이 목욕을 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자 프시케는 여러 가지 보물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자기들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을 본 언니들의 가슴에 질투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시케에게 많은 질문을 했는데, 특히 언니들의 관심을 끈 것은 동생의 남편이 어떤 남자냐는 것이었다.
프시케는 남편이 매우 아름다운 청년으로, 낮에는 보통 산에 사냥을 나간다고 대답했다. 언니들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프시케를 다그쳐서 그녀가 아직 남편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자 언니들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동생이 남편에 대해 의심을 갖도록 했다.
"설마 네가 무서운 괴물과 결혼할 팔자라고 한 저 피티아의 신탁(아폴론의 신탁을 말함)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이 골짜기에 사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네 남편은 무섭고 괴상하게 생긴 뱀으로서 얼마 동안 맛있는 음식으로 너를 살찌운 다음 잡아먹으려 한다는 거야. 그러나 우리의 말대로 해라. 우선 등잔과 예리한 칼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겨놓았다가, 그가 깊이 잠이 들 때 침대에서 빠져 나와 등잔을 켜고 이곳 주민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도록 해. 그리고 사실이거든 주저하지 말고 괴물의 머리를 베어 자유를 되찾는 거야."
프시케는 언니들의 말에 개의치 않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니들이 떠나자 그 말은 그녀 자신의 호기심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충동질했다. 그래서 등불과 예리한 칼을 준비한 다음 남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다 감추고 덮개를 씌워놓았다. 그리고 남편이 깊이 잠들었을 때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와 등잔불을 켜들고 남편을 비추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무서운 괴물이 아닌, 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신이었다. 금빛 고수머리가 눈처럼 흰 목과 진홍빛 볼 위에서 물결치고 있고, 이슬에 젖은 두 개의 날개가 어깨에 달려 있었는데, 그 반짝이는 깃털은 마치 봄꽃처럼 부드러웠다. 그때 남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등불을 기울이던 프시케는 그만 뜨거운 기름 한 방울을 그의 어깨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프시케를 응시했다. 그리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흰 날개를 펴고 창 밖으로 날아갔다. 프시케는 그를 따라가려고 허둥대다가 그만 창문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프시케를 본 에로스는 잠깐 날개짓을 멈추고 말했다.
"오, 어리석은 프시케여, 내 사랑에 대한 보답이 결국 이 정도란 말인가. 나는 어머니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그대를 아내로 맞았는데, 그대는 나를 괴물로 여기고 내 머리를 베려고 했구나. 가거라 언니들에게로 돌아가거라. 내 말보다 그들의 마을 더 믿었으니 당연하지 않으냐. 나는 그대에게 다른 벌은 주지 않겠다. 오직 그대와 영원히 이별할 따름이다. 사랑과 의심이 어찌 한곳에 있을 수 있으리?"
말을 마친 에로스는 땅에 엎드려 울부짖는 가엾은 프시케를 남겨두고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전도 정원도 사라지고, 그녀 자신은 언니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넓은 벌판에 와 있었다. 언니들을 찾아간 프시케는 자기가 당한 재난을 다 이야기했다. 내심 기뻐하면서도 심술궂은 언니들은 겉으로는 슬퍼해 주는 척했다. 그러나 둘 다 속으로는, 이번에는 그가 자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두 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산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산정에 이른 그녀들은 제피로스를 불러 그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제피로스가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두 언니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한편, 프시케는 침식도 잊은 채 남편을 찾아 밤낮으로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높은 산 꼭대기에 훌륭한 신전이 있는 것을 쳐다보며 그녀는 탄식하였다. "나의 님, 나의 사랑은 아마 저 곳에 살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밀 낟가리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는데 묶은 이삭도 있고 묶지 않은 것도 있었고, 간간이 보리 이삭도 섞여 있었다. 수확할 때 쓰는 낫과 갈퀴 같은 여러 농기구는 무더위에 지친 농부가 함부로 던져놓은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프시케는 그것들을 종류별로 갈라 나눈 다음 적당한 장소에 깨끗이 정돈했다. 왜냐하면 어떤 신이라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되며 또 모든 신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자기 편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그곳은 여신 케레스(풍요의 여신 데메테르를 가리킴)의 신전이었다. 여신은 프시케가 신을 위해 정성껏 일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 불쌍한 프시케여, 내 비록 아프로디테의 증오로부터 구할 수는 없으나,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너의 여왕인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오직 겸손과 순종으로 용서를 빌도록 해라. 그러면 아마 은총이 내려와 네 남편을 되찾도록 해줄 것이다." 케레스의 말에 따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갔다. 무슨 말을 해야 여신이 노여움이 풀릴지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결과 초래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프로디테는 노한 안색으로 프시케를 대했다.
"종들 중에서도 가장 불성실한 여인이여, 이제야 비로소 네가 주인을 섬기는 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냐?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병석에 누워 있는 네 남편을 보기 위해 온 것이냐? 너는 정말 밉살맞고 비위에 거슬리는구나. 따라서 네가 남편을 다시 섬기기 위해서는 오직 부지런히 일하는 길밖에 없다. 내 이제 너의 살림 솜씨를 시험해보리라." 이렇게 말하고 난 아프로디테는 자기 신전의 창고로 프시케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비둘기(아프로디테가 총애하는 새의 하나)에게 먹일 밀, 보리, 기장, 완두, 편두 등이 뒤섞인 채 잔뜩 쌓여 있어다. "저녁때가 되기 전까지 이 곡식들을 모두 같은 종류들끼리 가려놓도록 해라."
아프로디테는 이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프시케는 멍하니 곡식더미만 바라보고 있었다. 프시케가 어찔할 바를 모르고 있는 동안 , 에로스는 들판에 살고 있는 작은 개미들을 선동하여 프시케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도록 했다. 수많은 개미들의 대장은 다리가 여섯 달린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곡식더미에 접근하여 온힘을 다해 곡식을 한 알씩 날라다가 종류별로 나눠 쌓아주었다. 그리고 일을 다 끝내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황혼 무렵이 되어 아프로디테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머리에 장미 화관을 쓰고 신들의 향연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프시케가 시킨 일을 다 끝낸 것을 보고 부르짖었다. "못된 계집 같으니라구! 너는 그 일을 네 힘으로 하지 않고 남편을 꾀어 시킨 것이지. 어디 두고 보자. 너도 네 남편도 뒤가 좋지는 못할 터이니……." 이렇게 말을 마친 여신은 프시케에게 검은 빵 한 조각을 저녁 식사로 던져주고 가버렸다. 아침이 되자, 아프로디테는 하인에게 명하여 프시케를 데려오도록 했다. "저길 보라, 물가 건너편에 나무들이 늘어서 있지. 그곳에 가면 털이 금빛인 양들이 양치는 사람 없이도 풀을 뜯어먹고 있다. 거기에 가서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저 값진 양털을 모아가지고 와라." 프시케는 최선을 다해서 여신의 명령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냇가로 갔다. 그러나 강의 신은 갈대를 통해 노래부르듯 속삭였다.
"가혹한 시련을 받고 있는 처녀여, 위험한 냇물을 건너려고 하지도 말고, 건너편에 있는 무서운 숫양떼 속에 들어가려 하지도 말아라. 그 이유는 아침이면 태양의 기운을 받은 양들이 그 날카로운 뿔과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는 잔인한 분노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나 한 낮이 되면 양떼들이 그늘을 찾아가고 냇물이 청명한 정기로 그들을 달래서 재울 때에는 냇물을 건너가도 안전할테니, 그때 가서 덤불과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금빛 양털을 거두도록 하라." 인자한 강의 신은 이렇듯 자상하게 프시케에게 그 임무를 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프시케는 일러준 대로 일을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 양털을 팔 하나 가득 안고 아프로디테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념이 강한 여신은 프시케에게 칭찬대신 오히려 호된 질책을 했다. "네가 이번에도 이 일을 해내기는 했다만, 그것이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직 네가 일을 솜씨 있게 잘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 또 다른 일을 시켜보겠다. 여기 이 상자를 가지고 어레보소로 가서 페르세포네에게 전달하고 이렇게 말하라. '저의 여주인인 아프로디테가 당신의 미를 조금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병석에 있는 아들을 간호하시느라 아름다움이 약간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너무 지체해서는 안된다. 나는 오늘 저녁에 얻어온 아름다움을 몸에 바르고 신들의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프시케는 이제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느꼈다. 목숨을 끊어야 헤레보스로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인 바에야 지체없이 해치우는 방법이 낫다고 판단한 프시케는 높은 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뛰어내려 명부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려 했다. 이때 탑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세포네가 그 상자에 아름다움을 가득 채워주거든 주위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절대로 그 상자를 열거나, 그 속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 또 호기심으로 여신들의 미의 비보를 탐색하려고 하지 말라."
프시케는 이 충고에 힘을 얻고 목소리가 일러준 대로 하여 무사히 명부에 도착했다.
페르세포네의 궁전에 도착한 프시케는 훌륭한 의자와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았지만, 모두 사양하고 거친 빵으로 식사를 한 뒤 곧 아프로디테의 부탁을 전했다. 마침내 아프로디테가 준 상자 안에 귀한 보물이 담겼고 뚜껑이 닫힌 채 프시케의 손에 건네졌다. 온 길을 되짚어 이승으로 돌아온 프시케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 기뻤다. 하지만 위험한 임무를 거뜬히 해치우고 나자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신의 아름다움을 나르는 내가 이것을 좀 가져서는 안되는가? 이걸 조금만이라도 얼굴에 발라 사랑하는 남편의 눈에 좀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 조심스럽게 그녀는 상자을 열었다. 그러나 상자 속에는 아름다움은 전혀 들어있지 않고 뚜껑이 열리자 죽음의 잠이 일시에 몰려나와 프시케를 덮쳤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느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시체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로스는 이미 상처도 치유된 데다 사랑하는 프시케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 자기 방 창문 틈으로 빠져 나와 프시케가 누워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잠을 끌어 모아 다시 상자 안에 가둔 다음 화살로 가볍게 찔러 깨웠다. 그가 말했다. "그 몹쓸 호기심 때문에 예전처럼 그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나. 어서 가서 어머니가 분분하신 임무를 완수하도록 해라. 그 밖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리고 에로스는 번개처럼 빠른 속력으로 하늘로 올라가 제우스에게 애원했다. 제우스는 호의를 가지고 들어주었다. 그 다음 두 연인을 위해 간곡히 아프로디테를 설득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녀도 노여움을 풀고 결혼을 승낙하였다. 이어서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불러 프시케를 천상의 회의에 참석케 했다. 그녀가 도착하자 불로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한 잔 주면서 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프시케여, 이걸 마시고 불사의 신이 되어라. 그러면 에로스도 이 인연을 끊지 못할 것인즉, 이 결혼은 영원히 변함없으리라." 이리하여 프시케는 마침내 에로스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얼마 후 이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쾌락'이라고 붙여졌다.
[흔히 에로스와 프시케의 전설은 우화로 생각되고 있다. '프시케'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나비인데, 이 말은 동시에 영혼을 상징하고 있다. 영혼불명의 예시로서 나비만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나비는 느릿느릿 배로 기어다니는 애벌레 생활을 마친 뒤, 자기가 지금가지 누워 있던 무덤 속에서 아름다운 날개를 파닥거리며 빠져 나온다. 그리고 밝은 햇살 속을 훨훨 날아다니며 봄날의 더없이 향기롭고 감미로운 생산물을 먹고 산다. 때문에 프시케는 갖은 고난에 의해 정화된 후에 참으로 순수한 행복을 맛보게 되는 인간의 영혼인 것이다. 예술작품에도 프시케는 나비의 날개를 단 처녀로 묘사되곤 한다. 그리고 그 곁에는 에로스가 있는데, 이 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애정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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